04. 나봄아, 하고 불러 버렸다
2017.05.12.
“뭐? 누구 오빠……?”
‘차준 오빠’라는 호칭을 들은 태오는 안 그래도 사나운 눈동자를 더욱 번쩍이며 되물었다. 그걸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나봄은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아니!”
“뭐가 아니야. 내가 귓구멍으로 똑똑히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
“너 나랑은 동갑인데도 말 놓기 힘들어하더니…… 본부장님은 곧바로 오빠, 오빠 잘도 부르네.”
그녀는 뒤늦게 손사래를 쳐 봤지만 모든 것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얼어붙어있었더니 태오는 잔뜩 겁먹은 나봄을 몰아붙였다.
“나를 죽도록 불편하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본부장님을 필요 이상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거야?”
죽도록 불편한 사람의 죽도록 난처한 질문.
당황감에 머릿속이 하얘진 나봄은 한동안 입술만 뻥끗거리다가 서둘러 해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선우차준 본부장님이랑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고등학교 선배라서…….”
“선배?”
나봄은 차준이 첫사랑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일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녀와 그녀의 회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태오라면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차준과의 인연을 이용했을 거라며 초를 칠 게 뻔했다.
그래서 떨리는 눈동자를 애먼 곳으로 옮겨 두자.
“회사에 아는 사람 많아서 좋겠다. 고등학교 선배에 대학교 동창에 아주 난리가 났네.”
태오는 삐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까칠함이 가라앉은 건 아니었지만 우선은 납득한 모양이었다.
“저…… 우리 나봄이와는 어떤 사이인지요.”
그때,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한 사장이 넌지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순간 흥분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태오는 뒤늦게 한 사장의 존재감을 인지했다.
지금 못 볼꼴을 보여 버린 업체 사장은 다름 아닌 첫사랑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를 못 잊은 이상,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좋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태오는 잔뜩 구겼던 미간을 풀고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아버님?”
너무 긴장한 탓에 튀어나온 밑도 끝도 없는 호칭은 들은 한 사장도, 말한 태오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표정이 굳어 버리는 태오는 한 사장을 더욱 잡아먹을 듯 쳐다보며 서둘러 수습했다.
“아니, 한 사장.”
“…….”
“……님.”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망했다.
오해를 풀러 왔는데 그녀의 식구와 더 큰 오해의 만리장성을 쌓게 생겼다.
태오는 다시 고갤 숙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것이 더욱 큰 분노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장은 작은 목소리로 나봄에게 물었다.
“이분이 그분이냐.”
‘우리 제품 마음에 안 들어 한다던 팀장.’
입모양만으로 꺼낸 뒷얘기까지 전부 알아들은 나봄은 태오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 사장은 꾸벅 고개를 숙여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팀장님. 어쨌든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따라 허리를 숙이는 태오는 그저 참담한 심정이었다.
지금은 공적인 만남이라 그렇지, 사적인 자리였다면 제 딸에게 사납게 구는 태오를 호통 치며 내쫓을 게 뻔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얼어있던 나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한 사장을 따라 인사했다.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모습으로 보니 순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오늘 수습은 절대 못 하겠구나.’
원래 예정되어 있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온 건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렸다. 본의 아니게 화부터 내버린 지금, 태오는 그녀를 붙잡고 어제 못되게 군 건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을 꺼낼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선우차준이 올 때까지의 붕 떠버린 공백.
“저…… 본부장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아, 네.”
“하긴 원래 잡혀 있던 약속시간은 오후 두 시니까.”
“뭐…… 그렇죠.”
괜히 일찍 온 태오 때문에 한 사장까지 난처해하던 그때.
부웅— 끼익!
고급 세단 한 대가 한 사장의 공장 앞에서 멈춰섰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핏 좋은 정장을 빼입은 차준이었다.
“어, 나봄…… 단 팀장님?”
차준은 문을 닫기도 전에 나봄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다가 함께 서 있는 태오를 확인하고는 두 눈동자를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삼자대면이 또 한 번 펼쳐지자 나봄의 기분은 한순간에 착잡해졌다.
“단 팀장님이 벌써부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녀를 위해 근처 차이니즈 레스토랑까지 예약해놓은 차준은 예상치 못한 태오의 등장을 곤란해 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그러자 만만찮게 머릿속이 복잡했던 태오는 경직된 얼굴로 대답했다.
“……시계를 잘못 봤습니다.”
단태오 특유의 최악의 연기력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한 이유를 캐낼 생각은 없었던 차준은 순순히 넘어가기로 했다.
“잘 됐네요. 점심이나 같이 하죠.”
“같이요?”
차준의 제안을 들은 나봄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그걸 깨닫기가 무섭게 그녀에게로 훽 고개를 트는 태오는 다시 처음처럼 날이 서있었다.
여유로운 선우차준, 난처해하는 한나봄, 그리고 사나운 단태오.
한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어쩐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의미심장한 분위기에 한 사장의 예민한 대장이 다시 폭발의 신호탄을 울렸다.
“나, 나봄아! 나 화장실 좀!”
* * *
나봄의 공장 근처, 차이니즈 레스토랑.
“한 사장님도 식사 못 하셨을 텐데 함께 오지 못해서 아쉽네요.”
향기로운 국화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인 차준이 말했다. 눈에 띄게 어색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던 나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신경성 대장증후군을 거의 지병처럼 앓고 계셔서…….”
“괜찮은 메뉴는 주문해서 가져가요. 아버님 속 괜찮아지면 드시게.”
“아니에요!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본부장님!”
“아버님도 아쉬워하시던데, 뭘.”
태오는 딱 한 번 올리고도 당황스러워서 어쩌질 못했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차준은 연달아 자연스레 입에 담았다.
그걸 들은 나봄은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미소 지을 뿐.
그 둘을 바라보고 있는 태오는 뒤틀리는 속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쌓아왔을 둘만의 유대감이 그를 외롭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낼 자격은 없었기에, 그는 차가운 국화차만 들이켰다.
냉수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한결 숨통이 트였다. 이대로 태연하기 버티기만 하면 더 이상 어색해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단 팀장님, 음식 주문하세요.”
차준이 다정한 손길로 메뉴판을 내밀었다.
먼저 고르라고 하기 위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더니 차준은 묘한 경계심이 느껴지는 설명을 덧붙였다.
“단 팀장님이 계실 줄 몰라서 2인 코스요리만 예약해 뒀거든요.”
“…….”
‘2인’이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실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태오는 까칠한 눈동자를 차준에게로 두었다. 그가 내민 메뉴판은 어쩐지 받기 싫었다.
“그냥 짜장면 하나 추가해 주세요.”
“다른 메뉴도 많은데 한번 보시죠.”
“됐습니다. 그걸로 하겠습니다.”
차준은 오기만 부리는 태오에게 싱긋 웃어보이곤 호출벨을 눌렀다.
“네,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여기 짜장면 한 그릇 추가할게요.”
곧바로 다가온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는 차준은 여유가 넘쳤다. 계속 딱딱하게 굳어있는 태오와 달리.
태오는 차라리 그에게서 고갤 돌리고 제 앞에 놓인 젓가락만 내려다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경직되어 있는 그 모습은 그거대로 불편해서, 눈치를 살피던 나봄은 괜히 비어있는 그의 물잔에 국화차를 채워 주었다.
“여기 너도 물.”
“어, 고마워.”
대화 자체는 굉장히 어색했지만 두 사람이 쓴 건 어디까지나 친근한 반말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나봄의 반말을 들은 차준은 태오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예요?”
순간 태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은.
‘전에 사귀었다 헤어진 사이입니다.’
물론 그걸 곧이곧대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형식적인 대답을 하려 입술을 떼어내자 나봄은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대학 동기입니다!”
“…….”
나도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니가 먼저 해명하듯이 말하는 건 어쩐지 기분이 안 좋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차준은 그 모습을 그대로 눈에 담았다.
통찰력 좋은 차준의 눈엔 무언가가 얼핏 보였지만.
“아하, 그렇구나.”
굳이 아는 체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의 앞에서 눈에 띄게 난처해하는 나봄이 더 이상의 질문을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저는 한나봄 팀장님이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어요.”
차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과 나봄의 관계를 설명했다.
“압니다.”
곧바로 이어진 태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칼처럼 단호한 단답에 차준이 살짝 놀라자 나봄은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아, 제가 말했어요. 들켜 버린 것 같아서…….”
“뭘 들켜?”
“공장에 차가 들어왔을 때 본부장님이 온 줄 알고 ‘차준 오빠!’ 하고 불러 버렸거든요.”
또 한 번 그녀의 목소리로 꺼내진 ‘오빠’ 소리.
그 단어에 태오는 남몰래 숨을 멈췄고 차준은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오빠라고 했었구나.”
“예? 아, 예…….”
“약속 지켜 줘서 고마워.”
서른이 넘었어도 수줍게 웃는 차준의 얼굴은 여전히 소년 같았다. 언제나 그 풋풋한 모습에 설레어했던 나봄은 그를 따라 은은한 웃음기를 퍼트렸다.
“그런 약속은 또 언제 하셨습니까.”
물론 대단한 존재감을 지닌 단태오가 한 마디를 꺼낸 순간 그녀의 얼굴은 다시 굳어 버렸지만.
“그저께 저녁에 잠깐 들렀어요. 너무 오랜만에 봤는데 나봄이랑 인사를 제대로 못 했거든요.”
차준은 지나치게 예민한 태오가 불편할 만한데도 살갑게 대답했다.
“팀장님은 나봄이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셨나요?”
그리고 별 뜻 없이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허나 계속 연락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럼없이 ‘나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부장과 달리 그녀와 어렵고 불편한 사이였던 태오는 대답하기 곤란해졌다.
그래서 입술을 꾹 다문 채 눈빛만 일그러트리고 있었더니, 이어지는 침묵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봄이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도 어제 오랜만에 만났어요.”
“아, 그래? 반가웠겠네.”
“어…… 하하, 네. 반가웠죠.”
거짓말. 하나도 안 반가워했으면서.
태오는 불쑥 튀어나올 뻔 했던 말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것처럼 다정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국대 나왔다고 했지? 거기 봄 되면 벚꽃이 정말 예쁘다고 하던데.”
“네, 예뻐요. 향기도 정말 좋고.”
“가장 날씨 좋을 때 보러 가고 싶어. 시간 되면 같이 가서 캠퍼스 구경 시켜 줘.”
“캠퍼스라…… 벚꽃 말고는 볼 게 없기는 한데.”
“학교 근처에는 맛집도 많지 않아?”
“아, 있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 집!”
“응응. 그럼 거기도 가자.”
“그래요, 벚꽃 보고 점심 먹고 근처에 자주 가던 카페에 들러서 오랜만에 라떼도 마셔야겠다.”
능숙하게 진행되는 데이트 약속은 태오의 속을 문드러지게 만들었다.
가로 막고 싶은데 그럴 자격은 없고, 끼어들고 싶은데 그럴 용기도 없고.
게다가 나봄과 같은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함께 벚꽃을 구경하지도 못했고,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김치찌개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녀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 적도 없다.
그래서 대화를 엿들으면 엿들을수록 덕지덕지 붙어있던 미련만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그래, 아무리 기적처럼 다시 나타난 너라도 여전히 우리 사이는 남남보다 못한 사이. 붙잡고 있을 추억도 없는 과거는 품고 있는 사람만 이상해지는 쓸모없는 시간.
“주문하신 코스요리와 짜장면 한 그릇 나왔습니다.”
때마침 종업원이 요리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세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차준과 나봄의 앞에 하나씩 놓인 예쁜 접시와 태오 앞에 덜렁 놓인 투박한 짜장면 그릇.
동떨어질 대로 동떨어진 테이블 위를 두 눈으로 확인한 태오는 이 자리에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결심을 했다.
이제 진짜로, 나만 목매달았던 마음은 깔끔히 정리해야겠다고.
* * *
“잘 먹었습니다, 본부장님. 여기 사탕 드실래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차이니즈 레스토랑을 나서는 길.
나봄은 결제 중인 차준에게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인사하며 사탕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한 팀장님.”
그리고 그가 웃으며 받아들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태오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자, 여기 너도 하나 먹어.”
조심스레 내밀어진 손은 태오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녀의 작은 손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몹시도 무심할 따름이었다.
“됐어.”
이내 짧은 말로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태오는 아쉬운 마음도 없다.
원래 단 걸 싫어하니까 거절하는 게 맞지. 이걸로 한나봄이 섭섭해 하든 말든.
태오는 예전부터 한 번 정리하겠다 마음먹은 인연은 단칼에 정리해 왔다. 그러니 그는 앞으로 좀 더 차가워질 생각이었다.
모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만 그녀를 대한다면 더 이상 제 처지가 우스워질 일도 없을 터였다.
굳게 다짐한 그는 먼저 나가 담배하나를 태울 생각으로 차이니즈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여기 라이터 있나요?”
“본부장님 담배 피우세요?”
“응. 담배냄새 싫어해?”
“아…… 네, 하지만 뭐 그건 어디까지나 기호이니까 잠깐 피해있으면 되죠.”
때마침 들려온 두 사람의 대화는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녀가 담배냄새를 싫어한다는 건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슬쩍 꺼내려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을까 했으나.
‘신경 쓰면 안 돼. 그냥 피우자.’
그는 고집을 부려보기로 했다.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일, 그것이 첫사랑 청산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런 태오와는 달리 나봄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차준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지금은 나한테서 좋은 냄새 나?”
“네? 아, 네. 이런 향수 냄새 좋아해서.”
“그럼 안 피울래. 이대로 좋은 냄새만 풀풀 풍기고 있어야지.”
차준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나봄은 배시시 실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태오는 문을 열고 그대로 나서 버렸다. 누가 봐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뒷모습이었다.
그보다 한 템포 느리게 레스토랑을 빠져나온 두 남녀는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조심히 내려가. 너 잘 넘어지잖아.”
“이젠 안 넘어져요.”
아직 끝나지 않은 둘만의 세계는 태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울분을 모두 실어, 그는 내려가자마자 그녀가 보이는 자리에서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며 담배 하나를 통째로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괜한 심술만 키워가고 있던 그때.
“앗!”
태오의 뒤편에서 나봄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 태오가 곧바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미처 그녀에게 닿지 못한 차준의 손.
그리고 마치 꿈결처럼, 자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
“어……?”
“엄마야!”
그토록 원했지만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던 온기가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 늘 멀어지기만 했던 두 손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를 가슴 뛰게 하는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먼발치서만 느껴야 했던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기적과 다름없는 이 순간을 놓칠 새라, 태오는 천사처럼 날아온 나봄을 두 팔로 있는 힘껏 옭아맸다.
쿵, 쿵, 쿵.
멈출듯 용케 멈추지 않던 심장은 이내 폭발할 것처럼 쿵쿵쿵쿵쿵!
“……나봄아.”
맨 정신으로도 잘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나도 모르게 불러버렸다.
“아…….”
그녀의 흐린 신음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큰일 났다. 더 이상 반응하지 않기로 했던 가슴이 아프도록 조여 온다.
마치 그녀를 만나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