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오빠라고 불러 줘
2017.05.08.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잊지 못한 첫사랑이 그녀 앞에 앉아 파스타를 먹는 기적이 나봄의 인생에 찾아왔다.
“예전에도 여기 와 봤던 것 같은데. 너 생일 때였나?”
차준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물었지만 나봄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급한 마음에 아무 티셔츠나 막 주워 입고 온 그녀는 차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그, 그랬나요…….”
나봄은 제 앞에 놓인 파스타에 두 눈을 내려박은 채 움츠러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차준의 입가에 더 깊은 미소가 배어들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그의 표정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랑 같이 있는 거 어색하지?”
“예? 아, 아니요! 어색하지는……!”
“거짓말. 여긴 회사도 아닌데 아직까지도 존댓말 쓰잖아.”
차준은 서운함을 드러냈지만 나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그의 얼굴은 갓 스무 살짜리 앳된 얼굴인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건 그때보다 몰라보게 성숙한 서른 살짜리 어른 남자였으니까.
게다가 벌써 한 회사의 본부장 자리에 올라서 있다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들보다 월등히 앞서가는 건 여전하구나.
“저도 오빠라는 호칭이 익숙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업체 본부장님으로 만난 거라 조금 어려워요.”
나봄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차준은 포크로 제 그릇을 휘휘 저으며 대꾸했다.
“본부장도 본부장 나름이야.”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나봄은 본능적으로 씁쓸한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자세히 되물어 볼 새도 없이 그는 까만 올리브 여러 개를 포크에 꽂아 두고는 나봄에게 물었다.
“으흠, 나는 올리브 아직도 싫어하는데 너는 아직도 좋아해?”
“아, 네. 좋아해요.”
“그럼 덜어 줄까? 예전처럼.”
예전처럼.
차준은 지금 너무나도 쉽게 입에 담는 그날이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날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을까.
나봄은 저도 모르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포크에 가득 꽂힌 올리브를 그녀에게 넘겨주는 차준은 10년 전 모습과 똑같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귀염성 있게 움직이는 오른쪽 눈 밑 매력 점도 그대로였다.
“앗, 고맙습니다. 본부장님.”
“앗, 아닙니다. 한나봄 팀장님.”
나봄의 인사를 장난스러운 고갯짓과 함께 받아 든 차준은 다시 제 접시로 눈동자를 옮겨 두었다.
나봄은 길게 늘어진 그의 속눈썹을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애써 정신줄을 붙잡고 그에게서 받은 올리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원래는 올리브의 짭짤한 맛을 좋아하는 것이었으나, 차준의 그릇에 있던 거라 그런지 잘 익은 포도보다 달았다.
“저기…… 그런데요. 본부장님.”
“응응.”
“오늘 저희 집엔 왜 찾아오신 건지…….”
나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넌지시 묻자, 막 스파게티 면을 입 안 한가득 집어넣은 차준이 고갤 들었다.
그는 나봄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한 채 턱을 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어느 정도 음식물이 삼켜지자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 놓았다.
“낮에 하다 말았던 얘기 다시 들려줘.”
“예? 낮에 하던 얘기라면 어떤…….”
“결혼. 한 거야, 안 한 거야?”
오늘 회의실에서 단태오가 등장하기 직전에 들려왔던 단어. 아직도 첫 사랑을 잊지 못한 나봄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결혼.
낮에 당황스러움이 다시 떠오른 그녀는 부인하고 싶은 만큼 손을 휘저었다.
“그런 거 안 했습니다!”
“…….”
“대체 누가 그런 얘길…… 혹시 채소라인가요! 소라가 그랬나요!”
그래, 범인이 있다면 술 취할 때마다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고등학교 친구 채소라. 채소라가 분명해!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나봄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차준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둥근 호를 그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랬구나. 결혼 안 했구나…….”
“네, 안 했……!”
“하아…… 다행이다, 정말.”
그의 입술 새로 사랑스럽다 여겨질 만큼 예쁜 실웃음이 새어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차준의 모습은 꼭 그녀를 바랐던 것처럼 느껴져서 나봄은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 당연하죠. 결혼이라니…….”
“난 내 첫사랑 빼앗긴 줄 알고 속상할 뻔했어.”
‘내 첫사랑’ 부분에서 나봄의 심장은 쿵!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귀와 붉어지는 뺨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봄은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차준에게 계속 동요하고 있다.
마치 첫 설렘을 느꼈던 10년 전 그때처럼.
“그나저나 소라라면 너랑 제일 친하던 채소라 맞지? 아직도 친하게 지내나 보구나.”
“네, 뭐…… 소라랑은 올해로 12년 지기죠. 생각해보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네.”
“좋겠다. 12년 동안 계속 보고 지내서.”
“음, 좋은 것 같아요. 잘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소중한 거니까.”
“아니, 너 말고 소라 말이야.”
“네?”
아니야, 내가 휘둘리는 게 아니야. 이 남자가 자꾸 괜한 말로 날 휘두르고 있는 거야.
나봄은 남몰래 ‘그가 날 아직까지 좋아하는 걸까’라고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제 스스로도 낯 뜨거워질 만큼 터무니없는 기대감이라 접어 두기로 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이성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던 나봄과 달리, 예전부터 인기를 몰고 다녔던 차준이라면 그녀보다 더 번듯한 여자들이 많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지금 이 상황이 10년 전과 똑같을지라도, 훌쩍 흘러 버린 세월의 공백을 무시해선 안 되는 거다. 분명 그 사람의 진심은 10년의 세월만큼 변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 설레발치는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
“나 내일모레쯤 너희 회사 놀러갈 거야.”
차준이 생각지도 못한 일정을 꺼내 놓았다. 복잡함으로 인해 살짝 구겨졌던 나봄의 눈썹이 다시 동그랗게 펴졌다.
“네? 우리 회사요?”
“1차 통과했으니까 2차 심사 들어가야지.”
기대한 적도 없었던 협업 통과 소식이었다.
오늘 면접장의 단태오가 그녀의 문고리를 얼마나 탐탁지 않게 여겼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나봄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반응이 안 좋지 않았나요?”
“내가 좋아했잖아.”
“하지만 단태오가…… 아니, 단태오 팀장님이 저희 제품 달아 놓기 싫다고 하셨는데요?”
“그래도 내가 좋아했잖아.”
비슷한 대답이었지만 두 번째로 꺼내진 쪽엔 더욱 힘이 실려 있었다.
그건 분명 문고리를 얘기한 것일 테지만, 나봄의 귀에는 자꾸만 다른 의미로 들려와서 큰일이었다.
“아…… 그렇죠. 좋아, 좋아하셨죠.”
“응, 좋아했어.”
“문고리를!”
“그래그래, 문고리.”
차준의 입술 새로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봄은 그런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의미를 찾고 싶지 않아서 굳이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식사는 지극히도 평범하고 단조로웠다.
“그럼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그냥……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아버지 회사 일은 어떻게 도와드리게 된 거야?”
“글쎄요. 어쩌다 보니…….”
이유는 순전히 이런 저런 근황들을 묻는 차준에게 얼어붙은 반응밖에 내비치지 못한 나봄 때문이었다.
나봄은 편안하게 그를 대해 보려고 해도, 막상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다.
‘긴장하면 안 돼. 오래된 친구랑 밥 먹는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자, 편하게.’
나봄은 경직되어 있던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은 그녀의 인생에 찾아온 기적과 다름없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저…….”
하지만 의욕만 가득한 입술을 떼어 내기가 무섭게.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손목시계를 확인한 차준이 그녀에게 물었다.
순간 당황한 나봄은 제 그릇을 확인했다. 분명 다 먹은 기억은 없는데, 그녀의 파스타는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게요. 다 먹었네요.”
나봄은 흘려보낸 목소리에선 아쉬운 감정이 잔뜩 묻어 나왔다. 그걸 알아챈 차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맺혔다.
“사실 오늘 회사 일 다 안 끝내고 온 거야.”
“그, 그래요?”
“응응. 같이 저녁밥 먹을 사람이 없었거든.”
거짓말. 예전부터 주변엔 온통 사람밖에 없었으면서.
“오늘은 전할 소식 다 전했으니까 이만 회사로 돌아가 봐야겠다.”
그리 말하며 휴대폰을 챙겨드는 차준은 미련 따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봄은 괜히 긴장한 자신 탓에 분위기가 좋지 못했던 것 같아 후회스러워졌다. 차준이 자연스럽게 이끌고자 했던 대화도 지나치게 경직된 나봄 탓에 좀처럼 이어지지가 않았다.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재밌게 못 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내뱉었더니 차준은 곧바로 되물었다.
“난 재미있었는데. 넌 재미없었어?”
“아,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고……!”
“아아, 지루했나 보구나. 나 상처받았어.”
“아닙니다! 안 지루했어요!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하하.”
수습하려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꼬이는 대화의 끝은 차준의 나긋한 웃음소리였다.
당황한 나봄을 즐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내 예쁜 입술을 마저 움직였다.
“그럼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이요?”
“다음부터 둘이 있는 자리에선 예전처럼 오빠라고 불러 줘.”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그 시절의 ‘오빠’.
그 말을 하던 순간, 눈웃음을 따라 씰룩 움직이는 눈물점은 나봄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참고로 내일모레는 혼자 올 거야.”
이어지는 말은 나봄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겨우 온도를 낮춰 놓았던 얼굴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애써 진정시켰던 호흡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가빠진다.
“아…….”
대답이 나오질 않았던 나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했다.
차준은 그런 그녀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정한 손길을 건네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집에 데려다줄게요. 같이 나가요, 팀장님.”
그 손길을 따라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난 나봄은 온몸에 전기라도 오르는 듯 짜릿짜릿해졌다.
이미 다 지나간 줄 알았던 감정이 다시 되살아날 것 같아 큰일이다.
* * *
“지금…… 한봄 도어락이라고 하셨습니까?”
우드레일 회의실.
‘Lily’ 라인과 콜라보를 맺을 협력업체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태오가 차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러자 차준은 빙긋 미소를 띤 채 군더더기 없는 대답을 했다.
“네, 한봄 도어락에서 제시한 시제품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태오는 방금 제 귀로 들려온 말을 쉽사리 소화할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한봄 도어락은 우드레일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봄과의 만남도 어제부로 끝인 줄 알았건만……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한봄 도어락 같은 작은 기업이랑 손을 잡았을 때, 저희가 얻는 이득이 뭡니까?”
그때, 회의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이의를 제기했다.
기획담당 차준, 현장담당 태오와 함께 ‘Lily’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는 영업 담당 최태영 부장이었다.
그는 차준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던 한봄 도어락의 제안서를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꺼내두는 건 다른 업체의 제안서였다.
“예전부터 우리 쪽 대형 프로젝트와 콜라보 해 왔던 케이 도어락도 한 번 더 고려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업체와 계약했던 3년 동안 불량품 신고와 수리 요청이 많이 들어오지 않았나요?”
“그런 거야 판매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판매율을 감안해 봐도 그건 문제가 되죠. 소비자들이 공장 제품보다 두세 배는 비싼 수제 가구를 구매하는 이유가 무엇인데요.”
최 부장은 어떻게든 결과를 바꿔 보려 했으나 대쪽 같은 차준은 좀처럼 마음을 바꿔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새 업체에게는 절대로 없는 신뢰감을 들먹이며 한 번 더 매달려 보려던 그때.
“어차피 신뢰 관계도 최 부장님하고만 쌓아왔으니까, 저는 새로운 업체와 협약을 맺는 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네요.”
차준은 아직 꺼내지도 않은 말을 미리 간파하고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미 최 부장이 기존업체에게 리베이트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멋대로 누구랑 약속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차준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뼈 있는 한 마디를 날렸다.
나이는 최 부장보다 한참 어렸으나 웃고 있어도 묘하게 한기가 도는 차준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상대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결국 차준과 정통으로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던 최 부장은 한 발 물러났고, 태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보에 빠삭한 후임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한봄 도어락에 대한 단 팀장의 반응이 너무 좋지 않아서, 협약까지는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선우차준 본부장의 이상한 고집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소문난 단 팀장이 꺾어 줬으면 좋겠는데…….
“최종확정입니까?”
곧이어 터져나온 태오의 반응은 예상대로 탐탁지 않았다.
“아니요, 내일 직접 업체를 방문해서 2차 심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럼 같이 갑시다. 내일 저도 스케줄 빼 둘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의외로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네? 단 팀장님이요?”
“네. 현장팀으로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업체 미팅까지 따라나서려는 그의 태도는 차준까지 놀랄 정도로 의외였다.
업계에 입문하자마자 천재적인 디자인과 완벽한 제작 능력을 자랑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승진했던 단태오 팀장.
일적으로는 완벽했던 그에게 단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협조심이었다. 오직 현장에 틀어박혀 가구제작에만 몰두하는 그는 이때껏 본사 미팅이나 업체방문에 참여해 본 역사가 없었다.
언제나 결과만을 간단하게 서면으로 통보받았을 뿐.
그렇게나 사람 상대하는 걸 싫어하면서 왜 이번 프로젝트는 이렇게까지 나서려는 건지.
“단 팀장님 업무량을 아는데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죠. 저 혼자 다녀와도 괜찮습니다.”
이미 홀로 나봄과 점심 약속을 잡았던 차준은 넌지시 그를 저지시켰다. 그러나 이어지는 태오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닙니다. 현장을 보러 가는데 현장 팀장이 동행하는 건 당연하죠.”
“하하, 이제까진 그러신 적 없으시면서.”
“개과천선했습니다.”
이 순간 태오에게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의지까지 느껴졌다.
1차 면접 때 훼방을 놓던 것보다는 나았으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차준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집을 순순히 접어 두고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뭐…… 알겠습니다. 내일 같이 가 보도록 하죠. 그럼, 저는 인사회의가 잡혀 있어서 이만.”
차준은 일방적으로 회의를 마무리하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그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오는 멍하니 책상 위만 바라보고 있다가, 차준이 회의실 문을 닫고 사라지자 난데없는 한숨을 터트렸다.
“하아…….”
그것이 불만 표현이라고 생각한 최 부장은 탐탁지 않은 심정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단 팀장님도 마음에 안 드시죠? 우드레일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C급 업체랑 협업이라니요.”
순간 최 부장에게로 홱 쏘아붙여진 태오의 눈빛엔 극악의 컨디션일 때만 내뿜는 성질머리가 한가득.
“현저히 떨어지다니요.”
“네, 네?”
“1차 회의 불참하셨으면 평가 내리지도 마시죠.”
평소보다도 날이 서있는 태오는 지금 최 부장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 그가 신경 쓰고 있는 유일한 것은 내일 다시 재회할 그녀에게 건넬 첫 마디, 딱 그거 하나.
아직 어긋난 우리 관계를 되돌려 놓을 뾰족한 수는 없다.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웃게 만들었던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너의 기분이 좋아질지 감도 안 잡힌다.
그러나 어제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은 분명하다.
‘수고했어.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랄게.’
되새겨보니 나쁘지는 않은 멘트였다. 잘하면 어제 퍼부었던 저주를 돌이킬 수도 있고.
태오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제품도 직접 만져 본 적 없으면서 급 운운하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뒤끝 있는 핀잔을 내뱉은 뒤 회의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크나큰 기대감에 차있었다.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본사를 떠나던 어제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 * *
“차, 차준 오빠.”
한봄 도어락의 사무실,
지난번보다 더욱 힘을 내서 차려입은 나봄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설레는 호칭을 내뱉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준 오빠!”
나봄은 목소리 톤을 한층 높여 해맑은 분위기를 내보았다. 들리는 건 훨씬 편안해졌으나, 이번엔 거울 속 그녀의 동공 지진이 문제였다.
“하아……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떻게 불렀었는지 생각도 안 나네.”
결국 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벽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벌써 차준이 도착하기 십 분 전.
오늘도 이렇게 어렵게 대했다간 좋던 사이도 어색해지고 말 텐데, 아직까지도 추슬러지지 못한 마음은 몹시 걱정스러웠다.
“긴장하지 말자. 오늘은 진짜 불편한 티 내면 안 돼!”
나봄은 억지로 사기를 충전하며 습관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폈다.
그리고 한 번 더 예전 호칭으로 차준을 불려 보려던 그때.
“아이고! 우드레일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네.”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벌써 오셨네요!”
“한나봄 팀장님이랑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주차는 어디에 하면 됩니까?”
“아,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으로!”
소란스러운 나봄의 아버지, 한 사장의 목소리와 함께 낯선 차가 회사 부지 내로 들어왔다.
오늘 나봄을 찾아올 우드레일 사람은 단 한 명.
나봄의 심장을 자동적으로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 사람뿐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벌써 왔어!”
당황한 나봄은 재빨리 거울을 확인하고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렁차게 그 사람이 그렇게나 원하던 예전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차준 오빠!”
목소리의 톤도, 반가움만 가득한 눈빛도 더할 나위 없이 살가웠다. 하늘에서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빛도 그녀를 더욱 빛나 보이게 도와주는 듯했다.
가히 모든 것은 완벽했다.
단지, 딱 하나.
“뭐? 누구 오빠……?”
그 검은 차 안에서 내리는 사람이 단태오라는 사실만 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