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건 너였다
2017.05.05.
“내가 널 못 알아보는 줄 알았어?”
“…….”
“왜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어.”
태오는 들고 있던 제안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많은 것들이 생략된 멘트였지만 나봄은 의미심장한 속뜻까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봄은 당황한 만큼 눈빛을 떨다가, 괜히 입술을 깨물다가.
“그, 그야…… 우리가 오래 사귄 건 아니었으니까.”
이내 나름 소신 있는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자 단태오의 눈빛이 다시 잡아먹을 듯 사나워졌다.
“수많은 인연 중에 한 명이었다, 이거냐?”
“나야 인연이 별로 없지만 너는 그러지 않을까 해서…….”
“어, 그래.”
“으, 응?”
“이력에 대학 안 적혀있었으면 끝까지 모를 뻔했어.”
그럼 내 말이 맞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면서 말해?
나봄은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 자리에선 그가 ‘갑’인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해선 안 됐다.
애초부터 단태오라는 녀석은 나봄이 거스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래, 그럴 수 있지. 날 잊었어도 이해해.”
나봄은 최대한 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잠시 더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는가 싶던 태오는 이내 삐딱한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이번 미팅 망해서 어떡하냐.”
“응? 뭐가 망해?”
“하필 면접관이 나니까 상황이 좋진 않잖아.”
그의 말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미팅의 부정적인 신호탄이었다. 그의 사적인 감정을 용납할 수 없었던 나봄은 서둘러 반박했다.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과거 인연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업체 대 업체로 만난 거잖아. 난 아직 제대로 보여준 것도 없는데 망했다고 하면…….”
“니가 니 입으로 그랬어.”
“뭐?”
“내 얼굴 보자마자 망했다며.”
치사한 놈.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마음에 담아뒀나 봐.
말문이 막힌 나봄은 잠시 일렁이는 시선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안엔 약간의 원망이 서려 있었지만.
“그건…… 미안.”
결국 뱉어내는 말은 사과뿐이었다. 고갤 숙여가며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건 비참해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현실이었다.
“그러게 여기 왜 나타났냐.”
뿔난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태오가 물었다.
“……먹고 살려고.”
나봄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일차원적인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러자 태오의 입꼬리가 한 쪽만 유독 들어 올려졌다. 저 재수 없는 비웃음 뒤에 따라올 말은 분명 독설일 게 뻔했다.
“나는…….”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렸죠?”
하지만 그가 입술을 움직이던 순간, 회의실로 돌아온 차준은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아, 잘 오셨습니다! 본부장님!”
그래서 태오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표정으로 밝게 인사하니, 차준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반겨주시니까 기분 좋네요, 한나봄 팀장님.”
차준의 예쁜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태오가 몰고 온 먹구름을 모두 물러가게 만들었다.
우울하고 난처했던 감정이 두근대는 설렘으로 바뀌자 어느새 나봄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얹혔다.
“…….”
물론 그런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단태오는 들뜬 기분도 망가트려 놓았지만.
돌아온 차준이 다시 제자리에 앉자, 나봄은 들고 온 시제품을 상자에서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오랜 시간 연습해온 첫 멘트를 내뱉었다.
“한봄 도어락에서 제안 드리는 도어락 제품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동시에 그녀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시선에도 촉감이 있다면 분명 차준은 양털처럼 몽글몽글 할 것이고, 단태오는 고슴도치 등짝처럼 뾰족뾰족 할 것이다.
지금 나봄이 느끼는 바로는 그렇다.
“우드레일이 새롭게 기획하고 있는 수제가구 ‘Lily’ 라인은 기존의 모던한 가구디자인과 달리 앤티크하고 동화적인 요소가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네.”
“그래서 저희 한봄 도어락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Lily’라인에 섞여 들어갈 수 있도록 백합꽃을 모티브로 하여 레버형 도어락을 디자인해 보았습니다.”
“네, 네. 그렇군요.”
나봄의 사소한 얘기에도 항상 ‘응, 응’ 하며 두 번씩 대답해주는 차준의 버릇은 여전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반응해줄 때마다 나봄은 더욱 신이 나서 종알대곤 했었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린 나봄의 표정이 더욱더 편안해졌다.
“먼저 문이 열리고 잠기는 방식을 설명 드리자면…….”
“그립감이 최악이겠는데요.”
하지만 그녀가 행복한 꼴을 보지 못하는 태오가 흥을 깨트렸다.
“예?”
“디자인 하나 살리자고 그립감이고 안정성이고 다 포기한 겁니까?”
“아뇨, 그립감도 그리 나쁘지는…….”
“꼭 완벽하지 않은 제품을 우드레일로 가져왔다고 들리는군요. 딱 잘라 얘기하죠. 내 작품엔 저런 문고리 달아놓기 싫습니다.”
딱 잘라 얘기하지 마. 이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 같은 놈아.
나봄은 울컥하는 마음을 달랬다. 차준이 달궈놓았던 그녀의 온도는 태오와 대화를 하자마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확실히 도어락 디자인이 특별하다보니 그립감이 걱정되긴 하네요.”
설상가상으로, 시제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차준이 태오의 못된 의견에 동의했다. 나봄의 얼굴에 곧바로 울적함이 드러났다.
“제가 시제품을 만져 봐도 될까요?”
차준은 진지한 눈빛에 다시 웃음기를 머금으며 물었다.
“아, 그럼요!”
시제품을 넙죽 내미는 나봄의 손은 초조함 때문에 덜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흐음…….”
조심스레 시제품을 넘겨받은 차준은 나른 숨을 내쉬었고, 머지않아 진중한 목소리로 첫 평가를 내렸다.
“그립감은 확실히 기존 자사제품보다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건 분명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나봄은 조금도 기분 상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봄이 공들여 제작한 제품을 정성들여 훑어보는 그의 성의 있는 눈빛 때문인 것 같다.
나봄은 짧은 시간동안 깊은 생각을 한 그가 여러 가지 표현들 중에서도 가장 친절한 것만을 골라내는 걸 느낄 수 있다.
제 심술대로 막 내뱉는 단태오랑 다르게.
“하지만 작은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게 느껴지네요. 특히 이 잠금장치는 정교하게 움직여서 살짝 놀라기까지 했어요.”
“그, 그런가요?”
“그립감도 잡는 부분의 곡면만 조절하면 충분히 개선 가능하리라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차준에게서 이어지는 평가는 내구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 사장의 미학까지도 잘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봄은 긍정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모든 기대를 싣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단 팀장님도 자세히 보시겠어요?”
차준은 삐딱한 태오에게 시제품을 내밀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봄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태오는 애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봤습니다. 본부장님이랑 같이.”
거짓말. 내내 나만 노려보고 있었으면서.
“그렇다면 조금 더 사업적인 측면에서 얘기 나누고 싶네요. 한나봄 씨, 마저 설명 부탁드립니다.”
단태오가 망쳐놓으려 했던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 차준이 시제품을 돌려주며 말했다.
차준으로부터 힘을 얻은 나봄은 보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끊어졌던 발표를 이어나갔다.
“네, 그럼 다음으로 장점이라 여겨주신 잠금장치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터져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힘이 있었다.
나봄은 두꺼운 제안서를 막힘없이 설명하며, 지금 이 순간처럼 차준이 그녀 곁에 머물러주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오빠! 나 진짜 자전거 못 타는데!’
‘괜찮아,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절대 손 놓으면 안 돼! 알았지? 난 오빠가 안 밀어 주면 앞으로도 못 간단 말이야!’
그 시절에도 작은 일에 겁부터 집어먹던 나봄은.
‘아니, 넌 나 없이도 할 수 있어.’
차준의 주문 같은 말 한 마디에 모든 두려움을 잊어버렸고.
‘와앗! 놨지! 놨구나! 어떡해!’
‘어떡하긴 어떡해! 잘 가잖아!’
‘나 지금 자전거 타는 거야?! 응?!’
결국엔 그의 손을 떠나 해냈던 것 같다.
“이상으로…… 품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회사, 한봄 도어락의 협업 제안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바로 오늘처럼.
* * *
퇴근 시간이 다가온 우드레일 본사 옥상.
업무에 지친 회사원들이 잠깐이라도 숨통을 틔우려 찾아오는 그곳에 태오가 있었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흐린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그는 그녀의 마지막 얼굴만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 부탁드립니다.’
한 시간 남짓한 미팅을 끝마치며 나봄이 남긴 말은 굉장히 사무적이었다.
선우차준 본부장을 향해 풋풋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이내 태오 쪽으로 작은 몸을 돌렸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녀가 건넨 멘트는 살가웠으나 태오를 마주한 표정에서 드러나는 진심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딱딱하게 경직된 눈빛은 그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반가웠으면서.
마지막 순간에도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맨 처음에 내뱉었던 ‘……망했다.’라는 그 나쁜 한마디면서.
사실 태오는 일주일 전부터 한봄 도어락에서 찾아올 팀장이 나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순히 인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몰래 디데이를 세고 있었을 정도로 온 맘을 다해 애타게 기다렸었다.
‘저기요.’
‘아, 뭐.’
‘저, 저기요?’
‘왜 자꾸 귀찮게 사람을…….’
매사에 거침없는 불도저 같은 남자 단태오에게 날아든.
‘가방 문 열렸는데…….’
‘…….’
‘닫아드려도 될까요?’
한 마리 나비 같은 여자 한나봄과의 재회를.
스무 살 때부터 스물세 살 때까지 자그마치 4년이나 먼발치서 짝사랑만 했다.
그러다 겨우 마음이 닿았지만, 매사에 서툰 태오가 겁 많은 그녀를 놓쳐버리는 데까지는 2주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에게 줄 마음조차 없었던 그녀는 4년이나 묵혀왔던 태오의 사랑을 버거워 했던 것 같다.
4년이나 유지해온 짝사랑. 5년 동안 끝내지 못한 첫사랑.
나봄은 도합 9년 동안 단태오를 쥐고 흔들었고, 오늘이 되어서야 다시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건 태오가 포기하고 있던 꿈같은 상황이었으나.
‘……망했다.’
그녀의 보인 첫 반응은 차라리 평생 안 마주치고 사는 게 나았을 만큼 최악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다리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뻗쳐 나오는 성질머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 면전 앞에서 ‘망했다’라니…… 말이 심하네.’
그렇게 니가 박아 넣은 가시 같은 첫 마디가 너무 아프다고 있는 대로 징징거렸더니, 결국 우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져 있더라.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를 겁먹게 만든 내 잘못이더라. 예전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사실 태오는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자마자 내뱉었던 가시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쳤어야 했을지 모르겠다. 기대감만큼 몰아친 좌절감을 어떻게 감춰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냥 상처받은 것조차 티내지 말았어야 했나.
그는 잠시 후회해 보았으나 어쩐지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하아…….”
태오는 긴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뿜었다. 매캐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안 그래도 사나웠던 눈썹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래, 니 말대로 오늘은 확실히 망한 거 같네.”
태오는 아는 사이인 자신보다도 처음 보는 본부장에게 더욱 의지했던 나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너한테 악감정 없었어.”
이내 꺼내놓는 건 지레 겁먹은 그녀에게 꼭 해주고 싶던 말이었다. 하필 그때 들이닥친 본부장 때문에 오해는 풀지 못했지만.
“나쁜 가시나. 반갑게 인사해주는 게 그리도 어렵냐.”
그 뒤를 따라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속마음은 본인이 생각해도 참 못났다.
“예쁘지라도 말든가…….”
하지만 그녀는 온갖 섭섭한 말들을 꺼내놓던 입술조차도 예뻤다.
비록 시종일관 굳어있긴 했어도, 순하게 내려앉은 눈꼬리는 여전히 더럽게도 귀엽더라.
‘단 팀장님. 저는 한봄 도어락 시제품의 내구도가 좋아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예정인데, 팀장님 생각은 어때요?’
나봄이 떠난 자리에서 차준은 태오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그의 평가엔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문제는 태오 마음의 내구도였다.
협업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태오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굳은 눈동자를 견뎌내야 할 텐데, 과연 그걸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오늘만 해도 망했다는 한마디에 벌써 절반은 와장창 깨져 버렸으니.
태오는 다 타버린 담배를 난간에 지져 끄고는 고집스럽게 몸을 돌렸다.
밀린 업무도 제쳐두고 회의에 참석했던 태오는 쓰라린 가슴을 않고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평소엔 그렇게나 싫어했던 잔업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게 감사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밤새도록 일이나 해야겠다.
오늘 그는 다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을 절대 떠올리지 않을 생각이다.
* * *
‘한동석’의 명의로 된 화곡동 단독주택,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즐비한 나봄의 방.
“나봄아, 치킨을 시켜 주거라.”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반나절 만에 기력을 찾고 퇴원한 한 사장이 얼토당토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의사로부터 하루 동안의 금식을 권고 받은 사실을 알고 있는 나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매정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빠, 오늘 장염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신경성이라서 너 미팅 끝나니까 싹 나았다.”
“안 돼요. 오늘은 이온음료로 배 채우세요.”
한 사장은 단호하게 구는 딸을 너무하다는 듯 흘겨보았다.
그러다 이내 인상을 풀고, 아까 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내 물었다.
“그래서, 오늘 미팅은 어떻게 됐냐?”
“으음…….”
돌아온 나봄의 반응은 희비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한 사장은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서며 대답을 재촉했다.
“왜. 어땠는데.”
“딱 뭐라고 말하기가…….”
“망했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아, 그럼 뭔데!”
성질이 급한 한 사장은 뜸을 들이는 나봄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나봄은 조금 더 망설인 끝에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뱉었다.
“운이 좋으면 승은을 입고, 운이 나쁘면 곤장을 맞고.”
“그게 무슨 소리야? 쉽게 말해 봐.”
“본부장이랑 팀장, 이렇게 두 사람이 왔는데 반응이 너무 극과 극이라서요.”
나봄의 말을 들은 한 사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좋은 쪽이 본부장이냐, 팀장이냐?”
“본부장님이요.”
“휴우, 그럼 되겠네.”
“그, 그래요?”
“응! 당연하지! 회사에서 팀장보다 본부장 입김이 더 세잖아!”
한 사장은 확신했으나 나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 내 입김은 본부장이 더 셀지 몰라도, 팀장이 성질 더러운 단태오인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대학 때도 어찌나 온갖 군데에 성질을 부려대던지.
‘교수님, 논문만 도와주면 레포트를 발로 쓰든 혀로 쓰든 무조건 A+인 겁니까?’
‘니가 1년 재수해서 나보다 형인 걸 뭐 어쩌라고 운동장으로 집합하라 마라야.’
‘오늘은 술 마시기 싫다고 다섯 번째 말합니다. 귀 먹은 선배새끼야.’
교수님이건, 동기건, 선배님이건. 단태오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면 쪽을 못 썼지, 쪽을.
“일단은 두고 봐야 알 것 같아요.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금방 연락 오겠죠.”
나봄은 결과를 과신하고 있는 한 사장을 진정시켜두었다. 단태오라는 변수가 워낙 커서 그녀도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한 시름 놓은 한 사장은 어깨를 흔들며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룰루랄라. 그럼 내일은 파티다, 파티.”
“파티는 무슨. 결과 아직 안 나왔어요.”
“출근하자마자 직원들한테도 알려야지.”
“우리 아직 우드레일이랑 손잡은 거 아니라니까!”
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연신 소리를 쳤다.
♪♩♬♪♩♬
그때,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요란한 벨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깜짝 놀란 나봄의 시선이 책상 위 휴대폰으로 향했다.
“응? 모르는 번호인데…….”
나봄은 낯선 아홉 자리 숫자를 바라보다 조심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다소 겁먹은 듯 꺼내진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침묵.
“여보세요. 전화 받았습니다.”
―저…….
어렵게 꺼내진 상대방의 음성은 살짝 긴장되어 있었다. 나봄은 휴대폰을 고쳐 쥐며 본능적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더니, 수신인은 보다 또렷한 첫 마디를 건넨다.
―한나봄 씨, 안녕하세요?
“네?”
―저 지금 어쩌다보니 나봄 씨 집 앞까지 와버렸는데…… 어떡하죠?
설마, 설마, 설마!
나봄은 휴대폰을 든 채 창문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서 노란 가로등 빛을 받으며 서있는 남자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니 얼굴 보인다.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춰 배시시 미소 짓는 그 사람은 달빛 아래서도 아름다웠다.
“차준 오빠……?”
떨리는 나봄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를 따라 휴대폰을 내려놓은 차준은 장난스러운 인사를 꾸벅.
“한나봄 씨, 안녕하세요.”
“아, 아…… 예.”
“혹시 저녁 드셨어요?”
차준이 입가에 손을 모은 채 달콤한 질문을 던졌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수 없었던 나봄은 숨도 쉬지 않고 소리쳤다.
“아니요! 안 먹었어요! 같이 먹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