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내가 널 못 알아보는 줄 알았어?
2017.05.01.
“늦어서 죄송합니다.”
분홍빛 기류가 흐르던 회의실에 찬물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끼얹어졌다.
그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나봄은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회의실 문 쪽으로 옮겼다.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절대 다시 마주쳐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러니 제발 나의 예상이 틀리기를, 그저 목소리만 비슷한 사람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건만.
“안녕하세요.”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로 첫 인사를 건넨 그는.
“우드레일 현장팀을 총괄하고 있는 단태오라고 합니다.”
이윽고 무시무시한 이름 석 자를 입에 담았다.
“망했다…….”
나봄의 입술 사이로 솔직하게 튀어나와 버린 한탄.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은 그가 살벌한 눈빛으로 나봄을 직시했다.
하지만 도망가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 버린 나봄은 그저 혀라도 깨물어 기절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지옥 불에 떨어지기 10분 전.
‘한봄 도어락 총괄팀장 한나봄’
나봄은 목에 건 명찰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뭐가 묻지는 않았지만 긴장감을 달래기 위해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행동이었다.
책상 위에 얹어둔 협약 제안서는 하도 읽어서 너덜너덜해졌다. 이젠 꿈도 제안서를 발표하는 꿈만 꿀 정도로 연습은 완벽하게 마쳤다.
물론 선천적으로 긴장을 잘하는 성격이지만 오늘은 청심환도 두 개나 씹어 먹고 왔다.
아마 무슨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10년 전 수능을 볼 때처럼 긴장감을 못 이기고 엉엉 울어 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후우…….”
명찰을 다시 손에서 내려놓은 나봄은 긴 한숨과 함께 정면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대한민국 수제가구 회사계의 No.1, 우드레일 본사의 한 회의실.
그녀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는 한봄 도어락을 위해 엄청난 외주 프로젝트를 따러 온 참이다.
비록 우드레일은 한봄 도어락이 감히 손조차 뻗어볼 수 없는 거대기업이긴 하지만, 그녀는 오늘 반드시 우드레일이 주최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문고리 파트를 얻어가고자 한다.
오늘 아침, 이 미팅을 앞두고 너무나도 긴장했던 한 사장은 결국 신경성 대장과민증후군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고 말았다.
‘나봄아, 아빠 몫까지 힘내거라. 가문의 영광이 너에게 달렸다!’
구급차에 오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는 나봄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졌다.
대기업을 혼자 상대해야하는 위기에 처한 나봄이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빠, 제 걱정은 마시고 병원으로 가세요. 돌아올 땐 제 손에 계약서가 들려 있을 겁니다.’
그제야 안심하던 한 사장의 눈빛은 고스란히 나봄의 책임감이 되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모든 것을 건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외주 프로젝트를 따가고 말 것이다.
우드레일에서 3년 만에 출시하는 새 라인, ‘Lily’는 본부와 현장이 모두 달려들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니 오늘 첫 외주미팅 때만 상대해야 하는 사람만 해도 본부장과 현장팀장, 이렇게 높은 사람들만 두 명.
미팅 때까진 신상 정보조차 공유되지 않는 우드레일의 영업방침 탓에 본부장이 어떤 스타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미 그를 겪어본 외주업체 사람들은 본부장이 묘하게 기 센 사람이라 했다.
나비처럼 살랑살랑 다가와서 벌처럼 뒤통수를 쏴 버린다나 어쩐다나.
때마침.
똑똑―
“서울본사 본부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직원이 첫 번째 우두머리의 도착을 알렸다.
나봄은 하도 봐서 낡아버린 제안서 대신 새로운 제안서 세 부를 꺼내며 대답했다.
“네, 네! 준비되었습니다!”
“본부장님, 이쪽입니다.”
“고마워요, 미소 씨.”
소문으로만 듣던 만만하지 않은 본부장의 목소리는 그저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심지어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어쩐지 오래된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봄아.’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참 가슴 설레게 만들었던…….
‘아, 지금 첫 사랑이나 추억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깐 딴 곳으로 향하려던 정신을 다잡은 나봄은 자리에서 일어나 본부장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뚜벅― 뚜벅― 뚜벅―
다가오는 구두소리는 무척이나 정갈했다.
나봄은 와이셔츠에 달린 리본을 매만지며 회의실 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머지않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매끈하게 잘 닦인 남자의 구두 앞코, 길게 잘 뻗은 다리, 핏 좋은 정장이 멋스럽게 잘 어울리는 듬직한 가슴.
그리고…….
“한나봄?”
흰 눈처럼 깨끗한 피부, 붉은 핏기가 어린 입술, 보들보들한 옅은 갈색 머리카락, 오른쪽 눈 밑에 난 매력적인 눈물점.
다시는 만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래서 추억 속에만 보석처럼 간직해 두었던 나의 첫 사랑이자 유일한 사랑.
“차준 오빠……?”
“정말…… 나봄이야?”
눈앞에 두고도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물었다.
나봄은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리며 마주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나타난 그는 아무리 봐도 선우차준이었다.
‘딸기향 립글로스는 딸기 맛이 나려나.’
‘……먹어 봐도 돼?’
풋풋한 고등학교 시절, 17살 나봄에게 다가와 달콤한 설렘을 선물하고.
‘한국을 떠나야할 것 같아, 나봄아.’
‘미안해…….’
19살 나봄에게는 쓰라린 이별의 맛을 보여주었던, 태양보다 빛나고 다이아몬드보다 특별했던 사람. 처음으로 다가와서 진한 추억만을 남겨준 천 년의 사랑.
“우리 10년 만인가?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잘 지냈어?”
10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해진 차준이 물었다. 옛날부터 달디 달았던 목소리는 세월을 맛있게 머금어 훨씬 더 농익어진 상태였다.
“어, 아, 어, 저기…….”
그런 그의 앞에서 대책 없이 말을 더듬는 나봄은 그야말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10년 동안 내리 사랑한 건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재회의 순간은 현실을 꿈결로 둔갑시킨다. 10년이나 케케묵은 감정이 예전과 같을 리 없는데,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요동친다.
워낙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해 주었던 사람이라 남몰래 재회의 순간을 꿈꿔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과 같은 자리일 줄은 몰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열악하디열악한 문고리 공장의 팀장으로서 이 자리에 찾아 왔고.
“한봄 도어락에서 일하는구나. 우리 비슷한 분야에 있었네.”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회사라서…… 어, 어쨌든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준은 그녀가 계약을 따내기 위해 수천 번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대기업의 본부장으로서 이 자리에 친히 참석해 주셨으니까.
나봄은 대지진이 난 동공을 그에게서 거두고 회의실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혼이 담긴 도어락 시제품이 날아갈 뻔했던 그녀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주었다.
‘그래! 나는 외주계약을 따내기 위해 이 자리에 찾아왔어! 황금 같은 기회를 미련 때문에 날려 버릴 순 없지!’
각오를 다진 나봄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
“저, 정식으로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우차준 본부장님! 저는 한봄 도어락 총괄팀장 한나봄이라고 합니다!”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나봄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그걸 본 차준은 싱그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 말투 어색해.”
“그, 그런가요?”
“아직 우리 둘 밖에 없으니까 편하게 대해도 되는데.”
“아니요, 본부장님!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회사잖아요! 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업체 대 업체로 만난 거니까요!”
나봄은 업체 대 업체라는 말을 특히 더 강조했다. 이곳은 공식적인 자리이니 더 이상 옛날과 같은 태도로 대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흐음, 그런가?”
차준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봄을 올려다보더니 곧 장난스러운 손을 배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공손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나봄 팀장님. 우드레일 기획부 본부장 선우차준이라고 합니다.”
“…….”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달콤하게 이어지는 존댓말. 눈웃음을 따라 살짝 움직이는 눈물점.
이건 이거대로 문제였다.
그는 분명 나를 공식적으로 대하고 있는데, 어째서 내 마음은 사적인 분위기일 때보다 더 설레는 것인가.
“예전엔 학교 뒤편에 한나봄 팀장님 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아, 기억하시는구나.”
“지금은 어디 살아요? 여기까지 오는데 멀지는 않았어요?”
차준은 나봄에게 질문하며 회의실 책상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봄은 그를 따라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였고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전에 살던 거기 그대로예요.”
“그래요? 하긴 동네가 조용해서 아이 키우기는 괜찮죠.”
“아, 아이……?”
“그나저나 사장님은 어디 계신가요? 오랜만에 인사드리고 싶은데.”
차준의 입에서 슬쩍 나온 단어는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봄은 아버지의 불참소식부터 알리는 게 우선이었다.
“저희 회사 사장님은 오늘 아침 신경성 대장증후군 때문에 응급실로 실려 가셨습니다. 그래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셨어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붉어진 얼굴도 수습하지 못한 채 양해를 구하자 보기 좋게 다듬어진 그의 눈썹이 아래로 귀엽게 휘어졌다.
“그래요? 그럼 아버님한테 가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너무 긴장하셔서 그런 거라 심각한 상태는 아닙니다. 괜찮으실 거예요.”
“심각하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이 남자는 입에 향수라도 뿌리는 걸까. 어째 말할 때마다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아.
“아, 한나봄 씨는 점심 드셨나요?”
“네, 저는 먹고 왔죠.”
그의 질문에 곧잘 대답하고는 있지만 나봄의 정신은 애먼 곳에 가 있었다. 그녀는 차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이 마치 고등학교 시절 같다.
그래서 잔뜩 긴장해야 할 회의시간은 10년 전 데이트 할 때처럼 두근두근.
“안타깝네요. 나봄 씨도 공복이었으면 회의 끝나고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는 건데.”
“점, 점심이요?”
“나봄 씨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어떻게 지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은 없었는지.”
“…….”
“그래서 지금 그 사람이랑은 많이 행복한지.”
지금 그 사람?
인생에 남자란 선우차준 밖에 없었던 나봄에게 영문 모를 존재가 스쳐 지나갔다.
아까부터 미묘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던 나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그 사람이라면 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러자 살짝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차준이 꺼내놓는 대답은 너무 뜬금없어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결혼했잖아, 너.”
결혼이라니. 평생을 선우차준 밖에 못 담아두고 산 내가 결혼이라니!
“아니에요! 그게 무슨……!”
놀란 나봄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자 차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녀의 해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유독 낮고 건방진 목소리 하나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찼다. 커다래진 차준의 눈동자가 나봄을 벗어나 곧바로 인기척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나봄은 섣불리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난데없는 결혼설이 억울해서는 아니었다. 이 목소리 역시 나봄의 귀에 이상하리 만큼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차준이 설렘을 자아냈다면 지금 들려오는 건 뭐랄까.
‘한나봄, 넌 인생 원래 그렇게 사냐?’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수 같은 놈을 떠올리게 하는…….
오랜 시간 묻어뒀던 존재가 머릿속을 스치자, 나봄의 심장은 곧바로 쿵! 내려앉았다.
순간 나봄의 호흡은 몹시 가빠지는 듯했으나 그녀는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지금껏 나봄이 29년을 살아오는 동안 사귀었던 남자는 단 두 명.
그중 아련한 첫 사랑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도 기적인데, 악연과 다름없었던 그다음 인연마저도 연달아 등장할 리가 없었다.
특히 재수가 오질나게 없지 않은 이상, 극단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 두 존재와 한 자리에서 삼자대면할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닐 거야. 지금 들어오는 저 남자는 절대 그놈이 아닐 거야. 그래,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똑바로 인사하자!’
나봄은 남몰래 심호흡을 한 뒤 회의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가운 미소를 띤 채 첫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안녕하세요. 우드레일 현장팀을 총괄하고 있는 단태오라고 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주한 얼굴은 목소리보다도 익숙했다.
햇빛이 잘 그을려놓은 아몬드 색 피부, 핏기가 짙게 밴 검붉은 입술, 매서운 듯 유약한 듯 알 수 없는 눈매.
‘한나봄, 남자친구 있어?’
‘아, 아니. 없는데…….’
‘그럼 나 시켜 줘.’
‘뭐?’
‘대신 이거 너 줄게.’
대학시절, 맹수 같은 이목구비와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며 건넨 딸기우유가 귀여워서 사귀었다가.
‘한나봄, 너는 왜 말을 똑바로 못해? 계속 당하고 살 거야?’
‘어차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인데…….’
‘말이 안 통하면 바락바락 짖기라도 해.’
‘……지금 너처럼?’
‘뭐?’
그의 불같은 성질머리와 나봄의 소심한 성격이 도무지 맞질 않아서 2주 만에 최악의 배드엔딩을 맞이한 전남친.
그 이름도 대학에서 제일 유명했던 한국대 미친개, 단태오.
“망했다…….”
그를 알아본 나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사나운 단태오의 눈동자가 똑바로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앗.”
나봄은 망발을 내뱉었던 입술을 닫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세월은 커다란 바위도 깎아 놓는다는데, 왜 그에게 돋쳐 있는 가시는 5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긴장감 넘치는 정적을 견디고 있던 그 순간.
“한봄 도어락 총괄팀장 한나봄 씨 맞죠?”
단태오가 첫 질문을 던졌다. 마치 초면인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자리에 앉죠.”
“아…… 네.”
단태오는 서먹한 인사를 마치고 회의실 책상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나봄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를 뚫어져라 지켜보았지만 역시나 그녀를 알아보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를 보고 이렇게 침착할 리가 없는데…… 혹시 얼굴을 까먹은 건가?’
비록 연인이긴 했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애초부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연애기간은 겨우 2주, 데이트는 단 두 번, 게다가 손끝도 스쳐본 적 없었으니.
악연 중의 악연이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건 나봄에게 굉장히 잘된 일이었다. 아예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인연을 리셋시킬 수 있으니,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훨씬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나봄은 혹시나 그가 뒤늦게라도 자신을 알아차릴까 싶어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저도 처음으로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처음으로’라는 수식어를 유독 강조하는 나봄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태오는 입꼬리 끝에 비웃음을 피식.
“반가울 것까지야.”
‘‘반가울 것까지야’라니? 사실은 나를 알아본 건가?’
“한봄 도어락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나이가 제법 있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아닌가? 역시 못 알아봤나?
이목구비 자체가 사납게 생긴 단태오는 악감정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헷갈리는 상황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나봄은 일단 그들의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 그럼 단 팀장님도 오셨으니 회의를 시작할까요?”
“그러시죠.”
“아, 아…… 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과 대학시절 흑역사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두 남자 모두 다른 의미로 나봄의 숨을 멎게 만드는 존재라서, 그녀는 이대로 기절을 해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봄은 그럴수록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시제품 제안서부터 나눠 주었다.
“저희 한봄 도어락에서 제안 드리는 시제품의 기획안과 협업제안서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받는 차준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봄은 그의 감사에 화답하기 위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태오는 제안서를 몇 장을 휙휙 넘겨, 나봄의 이력이 적힌 부분을 찾더니.
“한국 대학교 가구디자인학과 한나봄…….”
하필 그 많은 사항들 중 그와 함께 졸업한 대학교 한 줄만 소리 내어 읽는다.
놀란 나봄의 눈동자가 차준에게서 떨어져 그에게로 득달같이 따라붙었다.
“……예?”
“좋은 학교 나오셨네요.”
“아…… 감사합니다.”
대체 나를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사람 피 말리는 것도 아니고 미치겠네, 정말!
나봄은 욱하는 마음에 소리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 대신 조심스러운 눈길로 태오의 눈치를 살피자,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눈빛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 반응에 다시금 안도하는 그녀는 꼭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차준의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재빨리 수신자를 확인한 그는 미안한 기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한데 중요한 전화가 걸려와서요. 한나봄 팀장님, 딱 일 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니요. 일 분은커녕 단 일 초라도 단태오와 둘이 있고 싶지 않은데요.
나봄은 정말 하고 싶은 대답을 숨겨두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다녀오세요.”
“정말 죄송해요. 금방 돌아올게요.”
양해를 구한 차준은 무거운 향수냄새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기척이 멀어지자, 회의실에는 소름 끼치도록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나봄은 기획안을 살펴보는 척하며 흘끔흘끔 속내를 알 수 없는 단태오에게 눈길을 주었다. 단태오는 그때까지도 무심한 눈동자로 시제품 도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를 알았다면 보자마자 인상부터 썼을 사람이야.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걸 보면 역시 날 모르는 게 분명해.’
나봄은 둘이 남아도 별 반응을 보이질 않는 태오를 보며 조심스레 확신을 가졌다.
그 순간.
“사람 면전 앞에서 ‘망했다’라니…….”
정적을 가리고 꺼내진 태오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오싹했다.
“……여전히 말이 심하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따라붙은 시선은 두려울 정도로 사나웠다.
“네……?”
토끼 눈이 된 나봄의 눈동자가 보다 또렷하게 태오를 마주했다.
이때껏 진정시켜놓은 심장은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고, 겨우 정돈해 둔 생각들은 도로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마저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널 못 알아보는 줄 알았어?”
지, 지금 뭐라고…….
“왜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어.”
나봄의 두 번째 남자이자, 단 2주간의 연애기간 동안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원수 같은 놈이 비꼬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봄은 터져 나오는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게. 왜 나는 안일한 생각을 했을까.
오늘 아침 집에서 출발하면서, 내 인생의 꼴랑 두 명뿐인 전남친들과 재회할 상황쯤은 미리 염두에 뒀어야 했는데.
‘그것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