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약속 하나만 해 줘요.”
“뭐든 말씀하세요.”
“우리 해주, 지한 씨 아버지 절대 못 만나게 해 줘요. 그 사람이 절대 해 끼치지 못하게 해 줘요.”
“약속드립니다. 해주 씨 힘든 일 겪게 하지 않겠습니다. 제 가족이니 제가 지키겠습니다.”
“부탁해요. 그저 둘이서 웃고 지내 줘요. 난 그것만 바랄게요.”
진섭이 그제야 홀가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해주하고는 내일 만나도록 해요. 오늘은 내가 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일어나죠.”
진섭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지한도 그를 따랐다.
이내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지한이 진섭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과 함께 진섭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동시에 지한은 심장이 생생하게 뛰는 기분을 느꼈다.
암흑이었던 세상에 한순간 빛이 깃드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평온한 빛이 순식간에 지한의 외롭던 마음을 매만져 주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해주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는 인내했다.
***
진섭은 해주가 입원해 있는 VIP실 문을 열었다.
그새 죽 그릇을 다 비운 해주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울음은 그쳤지만, 무기력한 모습이 진섭의 마음을 짠하게 만들었다.
진섭은 해주에게로 다가갔다.
“밖에 뭐 좋은 거 있어?”
해주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진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왔어? 어디 갔다 오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어?”
“강지한 씨 좀 만나고 왔어.”
진섭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한순간 해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응? ……그 사람은 왜?”
“두 사람 내일 이혼하는 날이니까.”
진섭은 입가에 조금 미소를 띠고 말했다.
“늦지 않게 말하고 왔어. 이혼하지 말라고.”
“……뭐?”
보조 의자에 앉은 진섭이 해주와 시선을 맞췄다.
“해주야, 힘들어하지 마. 울지도 말고, 아파하지도 마. 지한 씨랑 이제 진짜 결혼 생활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자.”
“아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를 못 하겠어.”
“그냥. 지한 씨는 잘못 없잖아. 모든 걸 바로잡으려 노력한 사람인데, 기회를 주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해주는 진섭에게 미안했다. 진섭의 괴로운 마음을 알면서도 지한을 포기하지 못한 게 미안했고, 진섭의 말을 듣고 숨통이 트여 또 미안했다.
“미안해…… 미안하고, 고마워. 아빠.”
“전화하고 싶어 죽겠지? 아빠 잠시 자리 비울 테니까 통화해. 대신 만나는 건 내일 해. 오늘은 아빠랑 시간 보내자.”
“미안해. 내가 미안해.”
“울지 말래도.”
진섭이 해주의 등을 토닥였다.
다정한 부녀가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
매미 소리가 귀를 따갑게 하는 완연한 여름, 지한과 해주가 집을 나섰다.
오랜만의 평일 데이트였다.
점심은 요즘 인기 있는 스페인 음식점에서 먹기로 했는데, 텔레비전에 나온 걸 보며 해주가 지나가듯이 맛있겠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 지한이 예약을 해 두었다.
“포장도 된다니까, 포장해서 아버님 댁에 들렀다가 미술관 가요.”
“아빠 좋아하겠네요. 저녁 먹지 말라고 전화해야겠어요.”
“지금 해요. 식사 빨리하시니까.”
지한의 말에 해주가 전화를 걸었다. 금세 진섭은 전화를 받았고, 해주가 말했다.
“아빠, 오늘 집에 있지? 이따 음식 포장해서 갈 테니까 저녁 먹지 마.”
해주가 진섭의 대답을 듣고는 잠시 귀에서 핸드폰을 떼며 지한에게 말했다.
“오늘 화원 아저씨랑 저녁에 술 드신대요.”
“그럼 2인분 포장해 가죠.”
지한의 말에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전화를 받았다.
“그럼 그 가수 아저씨 것도 사 갈게. 또 밖에서 술 마시고 힘들어하지 말고 집에서 마셔. 밤중에 갑자기 가기 힘드니까.”
해주가 지한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다 큰 자식과 부모는 분리가 돼야 한다며 진섭은 지한이 해 주었던 해주 명의의 아파트에서 홀로 지낸 지 어느덧 한 달.
요즘 진섭은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 아빠보다 한 살 많은, 바로 윗집에 사는 김필중 씨.
처음 안면을 튼 건 층간 소음을 참다못한 아빠가 위층으로 올라가면서였다. 발소리도 그렇지만, 매일같이 치는 통기타 소리가 참 듣기 거슬렸는데 사연을 들어 보니 좀 짠해졌다.
김필중은 첫 만남에 대뜸 말했다. 본인은 통기타 가수인데, 마누라가 통기타를 싫어해 이혼하자고 했다고. 이혼한 지 꼬박 10년째 되는 날인데 이맘때면 마음을 달래려 통기타를 쳐야만 한다고. 그러니 사람 좋아 보이는 아랫집 사장님이 좀 이해해 달라고.
진섭은 안타까운 마음을 그냥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 한잔하겠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그길로 아파트 근처 꼬치집으로 가, 술 세 병을 나눠 마시며 친해졌다.
해주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약간 철이 덜 든 느낌이었다. 젊은 시절 앨범을 냈던 가수라면서 사인해 주겠다는데, 거절하지 못해 A4 용지에 강제로 사인을 받아 왔었다.
좀 괴짜 같지만 해주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늘 어른스럽던 진섭이 그와 어울리며 술을 배우고, 밤늦게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며 필중과 진상을 부렸지만, 해주는 아빠의 활기찬 모습이 반가웠다.
“할아버님도 봬야 하는데요. 주말에 갈까요?”
“그럼 좋죠. 어제도 해주 씨 보고 싶다고 전화하셨어요.”
“저한테 직접 하셔도 괜찮은데요.”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꼭 나 통해서 하시겠대요. 맞는 말이죠. 나이 드시곤 말이 참 많아지셔서 귀찮긴 해요.”
“왜요. 난 좋기만 해요. 할아버지 수다 많이 들어 드리고 싶어요.”
권호재는 두 사람의 재결합을 반겼다. 이혼하지 않기로 했다고 함께 얘기하러 갔던 날, 쌍수 들고 환영하며 호재는 지한이 잘못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몽둥이질하겠다고 말했다.
아끼는 손자를 험하게 다룰 리 없지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그는 격하게 해주 편을 들 만큼 손자가 가족을 만든 게 안심됐던 모양이었다.
해주는 호재를 자주 찾아가고 싶었다. 최근에 만난 그는 부쩍 몸이 쇠약해진 듯 보였기에. 그가 그나마 건강할 때, 자주 추억을 쌓고 싶었다.
어느덧 레스토랑에 가까워졌다. 저 멀리 건물이 보일 때쯤 지한이 말했다.
“우리 결혼식 다시 하는 거 어때요?”
“결혼식을요?”
갑작스러운 말에 해주가 그를 쳐다보며 묻자 지한은 썩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창하게 말고, 집 공원에서 작게. 아버님하고 할아버지만 모시는 정도로 다시 하고 싶어요. 정성 없이 했던 결혼식 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결혼식으로.”
“전 좋아요. 안 그래도 아정이 말고는 제 쪽 하객이 없어서 좀 아쉬웠어요.”
해주는 갑자기 마음이 들떴다.
플래너가 짜 주었던 일정대로 움직이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했던 결혼식은 기억에도 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아쉬워했을 뿐, 두 번 결혼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특별히 생각하진 않았는데 새롭게 결혼식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원하는 것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스몰 웨딩, 야외 웨딩, 이번엔 티아라가 아닌 나뭇잎 모양의 반짝이는 헤어핀으로 헤어스타일을 가볍게 마무리하고 싶고…… 그런 것들이.
결혼 얘기는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도 계속됐다.
“메뉴판 천천히 보고 계시면 담당 서버가 주문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레스토랑 직원에게 안내받아 예약석인 창가 자리에 지한과 마주 앉은 뒤 해주는 말했다.
“드레스는 아빠랑 같이 보러 가고 싶어요. 어릴 땐 공주 드레스 같은 스타일 입길 바랐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지한이 대답 대신 테이블에 올린 팔에 턱을 괴고 웃음 지었다.
그가 빤히 보고만 있자 해주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요?”
“갑자기 들뜬 모습이 귀여워서요. 진작 다시 하자고 할 걸 그랬어요. 요즘 회사가 정신없어서 너무 늦게 말했네요.”
“늦긴요. 난 아예 생각도 안 했는데요. 요즘 정신없을 만하죠. 결혼 준비 천천히 해도 되니까 내가 들떠 있다고 서두르지 말아요.”
요즘 들어 지한은 정말 바빴다. 이렇게 평일에 시간 낸 게 용할 만큼.
3주 전, 우상전자로 계열사 이동이 확정되면서 지한은 우상그룹 사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사장으로 승진한 그는 책임감이 무거워졌는데, 아직 우상리조트 남해 공사 건도 함께 붙잡고 있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그럴게요.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 결혼식은 원하는 대로 해요. 뭐든 좋아요. 입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그때였다.
“식전 빵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담당 서버가 준비해 온 식전 빵을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으며 이어 물었다.
“주문 바로 도와드릴까요?”
결혼 준비 얘기에 들떠 아직 메뉴판을 펼치지도 못했던 해주는 조금 후에 다시 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담당 서버를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어, 김주경?”
해주가 놀라 그녀의 유니폼 왼쪽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쳐다봤다. 역시나. 명찰엔 주경이 어머니 성을 따라 개명한 이름, ‘권주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경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한테 내 소식 전한 거 너지?”
해주가 지한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해주는 당당하다. 그렇다는 건, 보혜를 끌어들인 보람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서버 불러 드리겠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주경아. 남의 불행을 네 행복의 자양분으로 삼지 마.”
테이블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돌았던 주경은 등 뒤로 들려오는 해주의 목소리에 다시 해주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뭘. 내가 없는 말 했어? 그냥 사실만 말한 건데.”
뻔뻔한 주경의 태도에 해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잘못한 게 없어? 그래, 없으면 말아.”
주경이 짜증스럽게 발소리를 내며 멀어지자, 지한은 물었다.
“컴플레인이라도 걸까요?”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뭘 안 해도 막살겠죠. 10대 때 성격 여전히 못 버렸으면 앞으로도 버릴 가능성은 적잖아요.”
해주는 주경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이제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도 되나, 하는 불안감은 없었다. 고생한 만큼 행복해야지. 그런 생각뿐.
그러니 쓸데없는 감정 소비로 이 행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도망치듯 멀어진 주경 대신 다른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친절한 응대에 해주는 물었다. 메뉴판을 펼치는 대신 요리를 추천받았다.
이내 직원이 요리 몇 가지를 추천해 주었고, 해주가 세 가지를 골라 주문하자 직원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자리를 떴다.
“무슨 생각 하면서 웃어요?”
주문받은 직원이 멀어진 뒤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해주를 보며 지한이 귀엽다는 듯 물었다.
해주는 테이블에 두 팔을 올리고 꽃받침 하듯 턱을 괬다.
“행복해서요. 지한 씨랑 있는 것도 그렇고, 다시 결혼식 할 거라고 생각하니 또 행복해요.”
“나도 그래요. 행복해요. 말 나온 김에 결혼식 언제 하고 싶어요?”
지한은 한쪽 팔로 턱을 괴고 해주를 사랑스럽게 보며 물었다.
“지금보단 가을쯤이 좋을 것 같고, 내년 봄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아요.”
“그럼 난 봄이 더 나을 것 같은데. 포근한 날씨가 해주 씨 드레스 입기 좋지 않겠어요?”
“음,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요.”
지한의 대답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봄이 더 괜찮을 것 같았다. 햇빛도 포근하고, 꽃도 다채롭고.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는 계절이면 새로 시작하는 마음도 들 것 같으니까.
실은 어느 계절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가 절 생각하며 말하니.
그래, 봄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