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직원이 침대에 간이 테이블을 펴 준 뒤 식사를 올려 두고 나갔다. 메뉴는 소고기죽과 김치와 젓갈 종류 몇 가지였고, 진섭은 보조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죽이라 그런가. VIP실도 메뉴가 특별하진 않네. 그래도 꼭꼭 씹어 먹…… 해주야?”
또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 먹으라고 말하려던 진섭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해주를 쳐다봤다.
방금까지도 웃고 있던 해주가 눈에서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기에.
진섭이 볼세라 해주가 얼른 두 손에 얼굴을 묻었지만, 이미 진섭은 해주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왜 그래? 응?”
“아니야. 아니야, 아빠…….”
해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입꼬리를 올려 보았지만, 울음기 젖은 목소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소고기죽. 2년 전, 지한의 어머니 기일에 해주가 그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날, 함께 묵었던 남해 호텔에서 그가 먹었던 것이기도 했다.
한순간 물밀듯 떠올려진 추억은 다른 좋은 기억들까지 줄줄이 끌고 왔다.
지한과 했던 많은 일이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불러왔다.
이렇게 괴로워도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신기할 만큼 마음이 갈가리 찢긴 것처럼 아팠다.
진섭은 그런 해주를 묵묵히 보았다.
외면했는데, 언젠가 괜찮아질 거라며 애써 해주를 내버려 두었는데 쉽게 괜찮아질 마음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해주의 마음이 어떨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진섭도 해주 같던 날이 있었다. 회사가 부도나고, 빚을 떠안았던 순간보다 더 마음 아팠던 날들.
보혜가 그나마 있던 패물들을 들고 밤도망을 가고 며칠 후. 그녀가 영영 떠나갔고,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실감하며 진섭은 무너졌었다.
배신감보다 그리움으로 울었다.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를 잃은 슬픔은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을 만큼 참 고통스러웠었다.
“아니, 나 왜 우는 거야? 위가 아니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죽 보는데 왜 눈물이 나.”
해주가 애써 웃으며 농담했다. 목울대를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아 내려 애썼다.
평소였다면 그러게, 하고 공감해 주거나 울지 마, 하고 달래 줬을 진섭은 해주의 농담을 받아 주지 않았다. 울지 말라고 토닥이지도 않았다.
잠시 깊은 생각을 한 그는 그저 말했다.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끅, 어디 가려고.”
해주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잠깐 바람 좀. 바람 좀 쐬고 올게. 죽 먹고 있어.”
진섭이 조금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 핸드폰을 꾹 쥐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진섭은 해주의 병실과 거리가 꽤 멀어졌을 때가 돼서야 걸음을 멈추었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 들어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 한 통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어 번의 신호음 끝에 들려온 목소리.
-여보세요.
지한의 목소리였다. 누군지 모르는 눈치에 진섭은 말했다.
“나 윤진섭입니다. 해주 아빠. 지난번에 받았던 명함 있어서…… 그거 보고 전화했어요.”
방축도에서 처음 본 날, 지한에게서 받았던 명함을 진섭은 버리지 않고 지갑 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마침 생각이 났다. 다행히도.
-혹시 해주 씨한테 무슨 일 있습니까?
지한은 진섭이 제게 어떻게 전화를 걸었는지는 상관없다는 듯 조금 다급하게 물어 왔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오늘 시간 되면 나 좀 볼 수 있을까요?”
지한은 아, 하고 안심한 듯 짧은 감탄사를 내곤 말했다.
-네, 시간 됩니다. 편하신 시간 말씀해 주세요.
“30분 뒤에 괜찮겠어요? 아시다시피 내가 거동이 불편해서 병원 앞에서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바로 차 돌려서 가겠습니다. 병원 1층 커피숍 괜찮으실까요?
“그래요. 그리로 가죠.”
***
한국대 병원 1층 카페였다.
평일 오후라 로비가 한산했고, 그만큼 카페도 조용했다.
주문한 커피를 가져와 진섭의 앞에 한 잔 놓아 준 지한이 그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물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진섭은 입을 열기에 앞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왜 하필 해주한테 결혼 계약을 제안한 건지 궁금해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하지만 지한은 차분히 대답했다.
“해주 씨를 마음에 두고 있어 그랬습니다. 2년 전, 해주 씨가 갑작스럽게 사라졌을 때 이미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긴 얘기를 해야 했다. 지한이 잠시 숨을 고르곤 말을 이었다.
“전 개인적인 가족사로 결혼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정략결혼은 더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할아버지께서 결혼을 원하셨고, 또 제가 얻고 싶은 걸 위해 결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한은 이어 말했다. 결혼해야 했지만,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외조부에게 남은 시간 1년, 그때까지만 결혼 생활을 해 줄 상대방을 찾고자 했다고.
“가장 먼저 해주 씨를 떠올렸습니다. 아니, 유일하게 떠올린 사람이 해주 씨였습니다.”
“죄진 게 있으니 이용하기 쉬워서 골랐어요?”
진섭의 물음에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해주 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용서하기 힘든 일을 하고 도망갔어도, 결혼을 제안했을 땐 이미 다 용서하고 그리워하고 있었을 만큼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해주 씨가 제 첫사랑입니다.”
지한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한다면 해주 씨와 하고 싶었고, 1년 남짓, 짧은 결혼 생활이면 해주 씨도 부담이 없을 거라고 여겨 2년 전 일을 약점 삼아 결혼해 주길 제안했습니다. 저 또한 해주 씨에 대한 미련 가득한 그 마음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는 차분히 제 마음을 고백했다.
진섭이 갑자기 자신을 부른 이유, 느닷없이 해주와의 계약 결혼을 궁금해하는 이유.
진섭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건 아닐지 좀 희망이 생겼으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진섭은 겉모습만큼이나 투명한 성격이었다. 처음엔 불편함을, 진실을 알게 된 뒤로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듯, 지금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요. 계약이 수반되긴 했어도 결국은 우리 해주 좋아해서 한 결혼이군요.”
“네. 맞습니다.”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의 입에선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면서 생각을 해 봤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떠올려 봐도 강지한 씨가 참 많은 도움을 줬더군요. 트럭 사고 범인 찾아 주고, 해주에게 손 떨리게 많은 계약금과 아파트도 주고, 오늘 병원도 그렇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진실을 알고 난 뒤엔 더더욱요.”
진섭은 지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 잘난 얼굴이 오늘은 많이 푸석푸석했다.
“내 딸처럼 강지한 씨 얼굴도 반쪽이 됐네요. 그동안 내 억울함 풀어 주느라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아버지인데.”
“아버님께서 받은 고통에 비하면 힘든 일도 아닙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지한의 대답에 진섭은 아주 조금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부모의 잘못을 그 자식에게 책임을 지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한 일이 많아 충격적이라 아무리 해주가 좋아한다 한들, 가해자 강태규 회장의 아들인 지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확실하게 강 회장의 죄를 처벌받게 했는데.
“하나 더 묻고 싶은데, 이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해주와 다시 만날 생각 있어요?”
진섭은 물었다. 지한의 예상대로.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항상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다만, 절 보면 괴로우시지 않으실까, 그게 걱정됩니다.”
“……해주가 많이 힘들어하니까요. 내가 괴로운 것보다 내 딸이 괴로워하는 건 차마 못 보겠네요.”
진섭의 표정엔 확신이 없었다. 이미 말을 뱉었으면서도 이게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이.
“해주 엄마와 결혼하기 전부터 봐 왔으니 그 애 아빠가 되기 전, 중학생 때부터 해주를 봐 왔어요. 참 욕심 없는 아이였어요. 꿈 많을 나이에 웃음도 별로 없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말하던, 철이 너무 일찍 든 아이였죠.”
진섭은 해주를 처음 만나던 과거부터 차분히 떠올려 보았다.
“난 부모, 형제 없이 자랐어요. 친척은 있었지만 돈으로 참 서럽게 하더라고요. 다들 따뜻한 쌀밥 먹는데 나 혼자 동떨어진 상에서 쉰밥 먹는 서러움 모르죠?”
진섭이 옛 기억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친척 집에서 나와 미친 듯이 일했어요. 건설 현장도 다녀 보고 오물 처리도 해 보고 공장도 다녀 보고. 그러다가 공장 관리직 맡은 경험 살려서 모은 돈 탈탈 털어서 작은 과자 공장 구매해서 사업 시작했어요.”
품질은 높이고 가격은 낮추고. 진섭은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과자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장을 운영했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소비자들에게 통한 걸까. 공장은 날로 몸집을 불렸고, 과자뿐 아니라 각종 가공식품도 취급하는 단단한 사업체가 되었다.
사업은 커졌지만 외로움은 여전했다. 곁에 진섭의 회사를 내 회사처럼 여겨 주는 좋은 직원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가족은 없었고, 집에 있는 4인용 식탁에서 늘 혼자 밥을 먹었으니까.
“그러다 해주 엄마를 만났어요. 그때 해주가 열네 살이었는데 나한테 그러더라고요.”
‘아저씨. 우리 엄마 만나지 마세요. 우리 엄마 아저씨 돈 보고 만나는 거예요.’
“난 그때 엄마를 뺏기기 싫은 어린아이 투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이었더라고.”
진섭이 늘 까칠한 표정을 하던 열네 살 해주를 떠올리며 웃음 지었다.
보혜와 꼭 닮았지만, 늘 사근사근하던 그녀와는 아주 딴판이던 해주가 얼마나 귀여웠던지.
“해주 엄마랑 3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그때도 해주는 탐탁지 않아 했어요. 엄마한테 사기를 당하는 바보라고 하더라고요.”
진섭은 허허, 하면서 웃음소리를 냈다.
“난 그래도 좋았어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녀를 꼭 닮은 딸이 늘 우리 집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어 주니 얼마나 행복해. 한데 해주는 그 소소한 행복을 모르더라고. 가족은 귀찮고,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외로움은 숙명이라고 여겼어요.”
장황한 과거 이야기를 마친 진섭은 잠시 침묵했다.
지한은 차분히 그의 말이 다시 시작되길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섭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해주가 무언가 이토록 좋아하는 건 처음 봐요. 늘 무덤덤하던 애가 아파하는 것도 처음이고. 빚을 진 후엔…… 어차피 하고 싶은 건 없었다며 일을 시작했는데, 그 도움이 절실하면서도 참 미안했어요.”
진섭이 아직도 남은 미안한 감정을 표정 위로 드러내며 덧붙였다.
“사실 해주가 강지한 씨를 잊길 바랐어요. 언젠가 잊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하지만 나를 돌아보니 그게 참 힘든 일이네요. 나도 해주 엄마를 잊기까지 많이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해주 씨 곁에 남으면 평생 그때 사고 떠올리게 되실 수 있는데요.”
“지워 보도록 노력해야죠. 아니면 지한 씨가 우상 회장 아들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 최면이라도 걸지 뭐. 아빠가 돼서 딸이 원하는 걸 해 주지는 못할망정 뺏어서는 안 되잖아요.”
진섭이 지한을 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해주 마음은 확실한 것 같은데, 내 악감정을 지우려 노력하기엔 강지한 씨 마음에도 확신이 필요했어요. 우리 해주한테 잘해 줄 수 있죠?”
“약속드립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