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협상-66화 (66/68)

66화.

그리고 오늘은 이혼 조정 기간을 하루 앞둔 날.

내일 지한을 보기 전 한 번 더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어 해주는 마침 연락해 온 아정과 만났다.

역시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은 아정을 만나니 조금은 생기가 도는 기분이니까.

내일 지한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데, 조금은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사실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 지한과 마지막이니까. 한 달의 조정 기간이 더는 없었고, 앞으로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이상 그를 볼 수는 없었다.

서로를 좋아하는데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이렇게 힘이 들 줄 몰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슷한 상황을 볼 때면 새로운 사람 만나면 되지 뭘 저렇게 힘들어할까, 공감하지 못했는데 겪어 보니 알겠다.

언젠가 잊을 수 있을 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만큼 또 사랑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장은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사랑만큼이나 소중한 아빠의 상처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빠를 저버리며 지한을 선택하는 건 비슷한 아픔만 가져올 뿐이었다.

“나 다 먹었는데 언니 더 안 먹을 거면 이제 커피 마시러 갈까?”

문득 생각에 빠진 해주가 한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아정이 말했다.

“그러자.”

해주는 대답하곤 의자를 뒤로 뺐다. 역시 아정을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혼자였다면 끝을 모르고 가라앉는 마음에 내일 눈이 퉁퉁 붓는 걸 걱정할 새 없이 결국 울어 버리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해주는 아정이 걱정하지 않게 커피 한 잔은 다 마셔야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해주는 이내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아…….”

분명 괜찮았는데. 아정을 만나 무거웠던 머리가 좀 가벼워졌는데…….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현기증이 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이 쭉 나더니 속이 메스꺼워지고, 몸이 중력을 심하게 받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언니!”

아정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삐- 소리와 함께.

아정이 헐레벌떡 해주에게 달려가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언니, 언니! 여기 구급차 좀 불러 주세요!”

***

“모레 남해 리조트 다녀올 거야.”

회의가 끝나고 전무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을 때였다. 지한이 말했고, 윤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녀오시는 건 좋은데…… 괜찮으세요?”

“뭐, 숙취? 오늘만 세 번째 묻는 거 알아? 아까 정 비서가 사 온 숙취 해소제 마시고 괜찮아졌으니까 그만 물어.”

지한이 지겹다는 듯 말했다.

요즘 매일 밤 술 없이 잠들지 못하는 그는 어젯밤엔 유독 과음을 했다.

이혼 조정 날짜가 가까워져서일까. 늘 자제력이 좋다고 자신했는데, 해주와 연관된 일엔 쉽게 풀어지고, 욕망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윤은 그 때문에 술을 마시는 지한을 걱정했고, 숙취 해소제를 사다 줬으며 벌써 세 번째 숙취는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

“걱정돼요. 이렇게 힘들어하신 적 없으셨잖아요.”

“괜찮아.”

“괜찮긴요. 힘들면 힘들다고 하세요. 술도 혼자 드시지 말고 저 부르시고요. 전무님이 워낙 티를 안 내고 속에 꾹꾹 눌러 담으려 하시니까 이러다 마음이 너무 썩어서 회복하기 힘드실까 봐 걱정돼요.”

지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윤을 바라봤다.

“썩어서 회복하기 힘들어? 악담을 해.”

“전 진심이라구요! 안 되겠다. 내일 오후엔 저하고 계세요. 전무님 술독에 못 빠지시게 지켜 드릴게요.”

“됐어.”

지한이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 위로 ‘내 사랑♡’ 글씨가 뜨고 윤이 반사적으로 입술 끝을 올리자 지한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나 걱정할 시간에 여자 친구랑 즐겁게 시간 보내.”

“아휴, 참. 전무님 걱정되는데……. 저 잠깐 전화하고 갈게요.”

“그렇게 해.”

지한이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윤은 복도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정의 전화를 받았다.

“응, 자기야. ……뭐?”

윤이 지한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휙,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지한이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무슨 일이야?”

지한이 물었고, 윤은 그런 지한을 보며 아정에게 말했다.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윤이 서둘러 지한에게 말했다.

“전무님, 해주 씨 쓰러졌다는데요. 지금 한국대 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대요.”

***

데자뷔 같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보이는 하얀 천장과 링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병원 VIP실이었다.

해주는 기억을 되짚었다.

아정과 함께 있었다. 밥을 먹고 카페로 넘어가려 했던 순간.

……그래. 그때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식은땀이 났다.

한데 왜 VIP실에 있는 걸까.

해주가 의문을 가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낄 때였다.

병실 문이 열렸고, 지한의 모습이 보였다.

“왜 일어나 있어요.”

지한이 다시 병실 문을 닫으며 침대에 앉아 있는 해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지한 씨.”

“좀 어때요? 어지러운 건 괜찮아요?”

걱정 가득한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말했다.

“제가 왜 VIP실에 와 있나 했더니…… 지한 씨 도움받았네요.”

“위궤양이 심하고, 영양실조래요. 요즘 잘 못 챙겨 먹어요?”

“제가 원래 잘 체하잖아요. 요즘 또 이러네요.”

해주가 웃음 지으며 말했지만 지한의 걱정은 지울 수 없었다.

“누워 있어요. 그리고 며칠 병원에서 지내요. 영양제 맞고 기력 회복 충분히 하다가 가요.”

“아니에요.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지금도 아픈 데 없고요.”

“내 말 들어요. 아픈 데 있는지 없는지는 의사가 판단해 줄 거고, 해주 씨 지금도 얼굴 창백해요.”

지한이 부드러운 말투로 타박하며 해주를 다시 침대에 눕혀 주었다.

해주는 그의 관심이 좋으면서도 속상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밝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아정도 만났는데 결국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녀는 괜히 지한에게 말했다.

“지한 씨도 뭐, 잘 안 먹는다던데요. 매일 밤 술도 마신다면서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여러 사람이 알려 주던데요. 다들 지한 씨 걱정하면서요.”

지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적어도 사람 걱정되게 쓰러지진 않았어요.”

“그건……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더 괜찮다는 말 하지 말고, 병원에서 나오는 죽도 웬만하면 다 먹도록 해요. 따로 주문해 둔 죽이니 정성을 봐서라도.”

“따로 주문해 둔 죽이요?”

해주의 물음에 지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오래 있기 싫어도 이틀은 있어요. 기력 회복하면 정밀 검사받게끔 병원 측에 얘기해 뒀으니까.”

“하지만 내일…… 법원 가야 하는 날이잖아요.”

“해주 씨 건강이 우선이에요. 이혼 조정 날짜는 다시 잡아도 돼요.”

“네…….”

이혼, 그 오지 않길 바라던 순간이 좀 미뤄져 좋아해야 하나, 아니면 질질 끄는 만큼 더 힘겨울까.

해주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난 이만 가 볼게요.”

“벌써요?”

해주가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지한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내 제 행동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지한의 옷을 다시 놔주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일하다가 왔겠네요. 다시 출근해야 하죠?”

지한은 그런 해주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해주 씨 아버지께 연락드렸어요. 시간 좀 지났으니 곧 오실 거예요. 링거 다 맞는 거 보고 집에 데려다주고 싶은데 나 보면 언짢아하실 테니 이만 갈게요.”

“아…….”

“이혼 조정 날짜 다시 나오면 연락할게요.”

이대로 지한을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보내야만 했다. 결국 해주는 붙잡고 싶은 마음을 손으로 이불을 꽉 쥐는 것으로 대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쉬어요.”

지한이 병실을 나섰다.

이내 문을 닫은 그는 해주가 있는 병실을 향해 뒤돌아선 채 한참을 가만히 바라봤다.

당장 이 문을 열고 다시 해주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녀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서 간호하고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질 수 없는 관계에 미련을 두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이내 다시 걸음을 돌리던 지한이 멈칫했다.

조금 더 서두를걸. 저 멀리, 진섭이 다리를 절뚝이며 서둘러 병실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진섭도 지한을 발견했다. 진섭이 멈칫했고, 지한은 그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아…… 오랜만에 보네요.”

잠깐의 침묵이 생겼다. 그 고요가 길어지지 않게 지한은 말을 이었다.

“방금 담당 교수님 뵙고 해주 씨도 보고 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기운이 많이 돌아온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VIP실까지 챙겨 주지 않아도 됐는데.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럽네요. 이미 끝난 관계에.”

진섭은 처음엔 고맙다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지한에게 호의적인 말을 뱉고 싶지 않아 부러 뾰족하게 말을 뱉었다.

해주가 쓰러진 원인. 계속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설치게 만든 원인. 아마도 지한일 테니까.

진섭은 원망스러웠다.

제 인생과 몸을 망가뜨린 가해자의 아들이 하필 해주의 마음을 뒤흔드는 남자라니.

“죄송합니다. 오늘 응급실이 복잡해서 해주 씨한테 온전히 신경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부담 느끼실 거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래요. 어쨌든 챙겨 준 건 고맙게 생각할게요. 이만 가 봐요.”

지한은 또다시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진섭은 그 인사를 받지 않고 냉정히 VIP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문을 닫았다.

작은 응접실이 딸린 넓은 VIP실. 침대에서 출입문까지 거리가 있어 침대에 앉아 있던 해주는 문 열리는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진섭이 온 줄도 모르고 그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 너머를 보니 병원 정문 풍경이었다. 진섭은 해주가 병원을 나서는 지한을 보기 위해서 창 너머를 지켜보는 거라고 확신하며 해주에게 다가섰다.

“해주야, 아빠 왔다.”

그제야 해주의 시선이 진섭에게 닿았다.

“안 와도 되는데. 나 괜찮아.”

“괜찮긴! 인석아. 내가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러게 오늘은 집에 있으라니까.”

“그러게. 아빠 말 들을걸. 내 상태가 이 정도인 줄 몰랐어.”

“앉아 있으니 어지럽지는 않아?”

진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주를 샅샅이 살폈다.

“응, 전혀. 말짱해.”

진섭을 안심시키기 위해 둘러대는 말은 아닌 듯, 기력은 없어 보이지만 다행히 아침에 집을 나설 때보다 창백함이 가셨다.

그때, 똑똑, 병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분,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조리실 직원이 밥이 든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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