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협상-65화 (65/68)

65화.

3주가 지난 날, 아침.

-다음 뉴스입니다. 회사 비자금을 빼돌려 불구속 수사 중인 우상그룹 강태규 회장이 이번엔 회사 기술 자료를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며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부업체 직원이었던 스물여덟 살 이 모 씨에게 살인 교사 및 폭행을 지시한 것으로 밝혀져…….

우상그룹 사옥 근처 순두부 전문점이었다.

벽 위쪽에 달린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고, 그 충격적인 내용에 고요하던 가게는 순식간에 테이블마다 속닥대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저거 뭐야?”

“살해 사주라니. 대박 무섭다 진짜.”

“가까이서 일했던 부장님이 사이코 같다고 하더니 진짜였네.”

한 달. 짧고도 긴 그 시간 동안 세상엔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톱스타 커플이 탄생했고, 환율이 요동쳤고, 다가오는 국회 의원 선거에 시끄럽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우상그룹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2주 전, 우상전자 전경우 이사가 검사를 통해 세상에 공개한 비밀 장부를 시작으로, 우상전자를 비롯해 각 계열사 내의 비자금 문제를 포함한 비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관된 인물들은 강 회장과 그 최측근들.

당연히 우상의 주가는 크게 흔들렸고, 위기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내부에선 크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나무도 가지치기해야 더 잘 자라나듯, 썩은 부분을 꺾어 내고 새순을 틔우면 오히려 점진적으로 회사가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강 회장의 최측근들부터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마지막은 강 회장이 될 것이었다.

시기는 강 회장의 재판 결과가 있기 전. 또 곧 열릴 정기 주주 총회 전.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상 타인에게 끌어내려지는 건 원치 않을 테니, 아마도 강 회장이 스스로 사표를 낼 거라고 다들 예상하는 중이었다.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많았다.

돌아가신 우상그룹 창립자의 지지를 받고 이사 자리까지 오른 전경우 이사, 오래도록 강 회장 곁에 있었으면서도 비자금 조성을 하거나 비리 문제에 가담하지 않은 강 회장의 사촌 동생 강성규 부회장, 그리고 강 회장의 외아들 강지한 전무.

그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건 당연 지한이었다.

최근 우상 비리 사건이 터진 뒤 갑작스럽게 열린 비정기 주주 총회에서 주주로 참여한 지한의 외조부, 권호재의 말 때문이었다.

그는 몇 개월 남지 않았을 제 삶의 시간을 알리며, 우상그룹에 관련된 모든 재산 상속을 외손자인 지한에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우상 최대 주주가 강태규 회장에서 그의 외아들, 강지한 전무가 된다는 뜻이었다.

폭풍우 몰아치는 것처럼 정신없던 회사가 그래도 조금씩 방법을 찾아가며 안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도 태풍의 눈이었던 듯, 강 회장이 저지른 살인 교사라는 더 거대한 사건이 휘몰아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우상그룹에 관련된 보도가 끝나자마자 해주는 텔레비전을 껐다.

“아빠 억울함 이제 정말 풀어질 수 있겠다. 경찰 출석 내일이라고 했나, 모레라고 했었나?”

해주의 물음에 현관 앞에 놓아둔 화분에 물을 주던 진섭이 대답했다.

“내일이야. 그것보다…… 지금은 좀 어때? 아침 약은 먹었어?”

“응, 먹었지. 이놈의 소화 장애 지겹다. 괜찮아질 만하면 다시 나빠져. 그래도 지금 상태 좋고, 약 먹었으니까 오늘은 음식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걱정이네. 다른 병원 가 볼까?”

“됐어. 내일 경찰서 몇 시야? 같이 가.”

진섭은 고민했다. 내일, 강 회장 사건으로 경찰서로 가 진술을 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힘겨운데, 그렇다고 해주의 부축을 받으며 가기엔 해주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지한이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해결해 가고 있는 동안, 해주는 하루하루 말라 가고 있었다.

소화 불량으로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할뿐더러 자주 체해 한 달 새 응급실만 두 번을 찾았다.

심지어 두 번 모두 진섭에게 아픈 걸 티 내지 않으려 꾸역꾸역 참다가 진섭이 알아채서 가게 된 것이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소화제는 왜 잘 듣질 않는 건지. 몇 번이나 병원을 바꿨고, 최근에는 대학 병원에서 약을 받아 왔음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

“택시 불러서 가도 되니까 오늘 푹 쉬고 내일 결정하자.”

“무조건 같이 갈 거야. 내가 따라가야 안심돼서 그래.”

“아빠 혼자 잘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넌 네 몸 관리나 잘해.”

그때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진섭이 다리를 절뚝이며 문을 여니 오영선 여사가 서 있었다.

“아, 오셨어요.”

진섭이 어색하지만 익숙하게 오 여사를 반겼다.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3주째. 벌써 세 번이나 오 여사를 만났으니까.

“해주 안에 있어요?”

오 여사가 묻는데 마침 진섭의 뒤로 해주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여사님. 또 반찬 해 주신 거예요?”

해주가 미안한 얼굴로 오 여사를 바라봤다. 오 여사가 매주 반찬을 해 주었고, 덕분에 잘 먹고 있었지만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 여사는 해주를 구석구석 살피고는 혀를 쯧쯧 찼다.

“영란이가 해주 너 좀 챙기라고 해서 왔어. 얼굴이 아주 반쪽이네, 반쪽이야.”

해주가 민망한 표정을 짓고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더워서 그런지 밥이 잘 안 넘어가요.”

“그래도 먹어야지. 전무님도 요즘 밥을 통 못 드셔서 보양식으로 삼계탕 했어. 억지로라도 먹어 봐.”

오 여사가 보자기에 싼 냄비를 건네자 해주는 받아 들며 은근하게 물었다.

“감사해요. ……지한 씨 밥 잘 못 먹어요?”

“그렇지 뭐. 많은 일이 있었잖아. 아침도 평소보다 반 공기만 먹고. 아주 사람이 반쪽이 됐어.”

오 여사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작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요즘 회사에 사건이 많긴 하죠.”

“뭐, 회사 일뿐인가.”

오 여사는 흘끗 해주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사람 잃는 게 가장 괴로운 거지. 그러니까 밤마다 못하는 술도 마시고 하는 거겠지.”

지한의 집안 문제 때문에 이혼한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 여사가 보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었다.

그러니 안타까운 마음에 괜한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여기까지였다. 오 여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은 말을 재빠르게 마친 오 여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럼 난 갈게. 볼일 있어서.”

오 여사가 해주 옆에 서 있던 진섭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혔는데도 해주는 그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머릿속이 온통 지한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밥을 잘 못 먹고 있구나. 잘 먹어야 하는데. 그래야 힘내서 하려는 일을 잘 해낼 텐데.

걱정됐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왜 감정은 무뎌지지 않고 더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건지.

속이 더 꽉 얹히는 것 같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듯한 두통은 더 심해졌다. 마음은 답답해 울고 싶었지만, 진섭이 옆에 있기에 해주는 꾹 참고 말했다.

“저녁으로 삼계탕 먹으면 되겠다.”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주방에 가져다 놓을게. 그리고 나 속이 좀 안 좋아서 잠시만 잘게.”

“응, 응. 그렇게 해.”

진섭은 주방으로 향하는 해주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꾹 참는 듯하지만 차마 아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해주가 안쓰러웠다. 지한의 얘기를 듣자마자 무너져 내릴 것같이 보이는 해주를 보니 그의 마음도 참 많이 아팠다.

***

죄를 지으면 언젠가 반드시 벌을 받는다.

조금 식상하지만 언제나 확실히 와닿는 명언이라며, 주로 재벌가를 다루는 유명 유튜버가 우상그룹 강 회장 사건을 상세하게 정리하며 클로징 멘트로 한 말이었다.

올리자마자 조회 수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영상에서는 고소당하기 쉬운 강 회장 측보단 강 회장의 사주를 받고 일을 직접 실행한 이학규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 후원금을 뒤로 빼돌리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바른길로 인도해 줄 어른이 없어서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뒤엔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되는 대부업체에 취직해서 채무자들 협박하며 수금하는 일을 맡았으며, 강 회장을 만난 뒤로 돈맛을 제대로 알아 사채업에서 손을 떼고 큰돈이 되는 일만 도맡아 했다는 내용까지.

불우한 어린 시절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잘못된 판단을 했다며 이학규는 선처를 원하고 있었다. 유튜버는 그 내용을 말하며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표정이 전혀 없기에 사이코패스 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특유의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정은 유튜브를 정지시키며 해주에게 말했다.

“진짜 뻔뻔하다. 선처는 무슨 선처! 아주 무기 징역으로 감옥에서 평생 썩어야지.”

“그러게. 근데 신기하네. 유튜버는 그 내용을 어떻게 아는 거지?”

해주가 피해 당사자인 자신보다 자세하게 아는 유튜버를 신기해하자 아정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보통이 있으니까 이런 유튜브를 하는 거 아니겠어?”

“같이 화를 내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일을 너무 크게 만들어서 곤란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언니. 이 자식 나쁜 놈인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지. 그래야 처벌도 크게 받지.”

아정이 아주 무기 징역을 받았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이고는 말했다.

“근데 언니 괜찮아?”

“뭐가?”

“얼굴 좀 창백한데? 아픈데 내가 괜히 불러낸 거 아니야?”

걱정스럽게 묻는 아정을 보며 해주는 손등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그래? 나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러고 보니 음식도 거의 안 먹었어. 나 혼자 다 먹었어.”

“별로 배가 안 고파서.”

해주는 속이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괜히 웃음 지었다.

아정은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해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언니, 미안해.”

“갑자기 뭐가?”

“내가 요즘 전화로 내 연애 얘기만 줄줄이 했잖아. 언니 힘든 줄도 모르고.”

“아니야, 너 연애하면서 행복한 얘기 들으니까 기분 좋았어.”

해주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럼에도 아정은 미안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내일이지?”

“응.”

해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꼭 이혼해야 해? 계약 결혼이었던 건 알겠는데, 내가 보기엔 둘 다 서로 좋아해. 오빠한테 들어 보니 전무님도 거의 매일 술 마신다던데.”

“술……. 그래도 해야지. 서로 마음이 어떻든 아빠가 힘들어하니까.”

“그래. 언니 아버지 당하신 일이 보통 일은 아니지. 내가 너무 가볍게 말한 것 같다.”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해서 불러 준 것도 고맙고. 기분 이상했는데 좀 나아졌어.”

해주는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얼마 뒤 아정과 통화하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가까운 사이인 아정은 지한과의 이혼 사실을 알게 될 테고, 6개월도 채 못 살고 이혼하는 데에 언젠가 아정이 먼저 궁금해하며 물어볼 테니까.

아니, 실은 누구에게라도 말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말했다.

지한의 얘기를 누군가와 나눠야만 그의 생각을 하느라 터질 것 같은 머리가 좀 가벼워질 것 같았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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