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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64화 (64/68)

64화.

합의 이혼 서류를 제출하는 건 생각보다 더 간단했다.

한 달의 조정 기간을 가진 뒤 다시 출석하라는 안내를 받고서 지한과 해주는 가정 법원을 나섰다.

정문 계단을 내려오는데, 문득 해주는 해남에서 지한과 다시 재회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옛 모습 그대로 찾아와 결혼 계약서를 내밀며 시한부 판정을 받은 외조부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결혼 생활을 하자던 지한.

도망자 생활이 피곤했고, 아빠의 다리를 위한 신약 처방 비용도 간절했기에 지한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실은 그냥 지한을 다시 만났던 게 참 좋았다.

그래서 지금 해주는 허전했다. 여전히 등본에 지한과 부부로 나온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그가 이제 제 배우자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게.

그래도 계약 내용대로 1년은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짧은 결혼 생활은 미련이 참 많이 남을 것 같았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고, 해주가 말했다.

“한 달 뒤에 만나겠네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지한은 대답 대신 말했다.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버스 타고 가면 한 번에 가요. 바쁜데 얼른 가 보세요.”

해주는 물론 지한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보내야 할 때 보내지 못한다면 그를 자꾸만 붙잡고 싶을까 봐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데려다주고 싶어요.”

실은 밥 한 끼 마지막으로 같이 먹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고 있었다. 마음을 누르고 눌러 그녀를 데려다주는 것, 그것 하나만 바라고 있으니 지한은 해주가 제 말을 거절하지 않도록 말을 덧붙였다.

“할 얘기도 있고요.”

해주는 차마 두 번이나 거절할 수 없었다. 지한을 향한 마음이 거절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까. 결국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데려다주세요.”

“고마워요.”

법원 주차장 가장 가까운 곳에 지한의 검정 세단이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지한은 시동을 켠 뒤에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법원 주차장을 빠져나와 얼마간 도로를 달렸을 때였다.

“내일부터 좀 시끄러워질 거예요.”

해주가 지한을 쳐다봤다. 다시 지한이 말했다.

“아버지 사건 뉴스 보도 크게 나갈 예정이에요. 착한 대부 그 남자 중심으로 사건을 파 보니 몰랐던 일들이 많았더라고요.”

“제 일 말고도 더 있는 거예요?”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해 사주는 그때뿐이지만, 해주 씨 일 전에 두 건. 입맛대로 일을 움직이려고 감금, 폭행했던 일 있었어요. 한 분은…….”

그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죄송스럽다는 듯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그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요. 처벌은 직접 폭력 행사했던 놈들만 받았고, 아버지는 거액의 돈 주고 뒤로 빠졌어요.”

“그런…….”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강 회장이 나쁜 짓을 한 번만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참 잔인한 사람이었다.

“착한 대부 그 남자는요?”

해주가 긴장하며 물었다. 강태규 회장의 일을 알려 주는 조건으로 그 남자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거래를 하진 않았을까.

지한이 그럴 리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증거를 잡기 위해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버지 사건 보도될 때 같이 다룰 거예요. 아버지 밑에서만 일한 것뿐 아니라, 돈 되는 일엔 다 가담했으니 크게 처벌받을 수 있을 거예요. 증거도 다 확보해 놨으니 빠져나갈 수 없을 테고요.”

해주는 가슴속에 남겨 둔 마지막 응어리마저 풀어진 느낌이었다.

해주의 마음에 걸리는 일은 이제 한 가지뿐이었다. 그녀는 조금 머뭇대다가 물었다.

“저희 이혼, 할아버님께 말씀드렸어요?”

“네, 말씀드렸어요.”

“그렇구나…… 혹시 충격 많이 받으셨나요?”

“괜찮아요. 생각보다 덤덤하게 넘기셨어요. 해주 씨 많이 힘들었겠다고 마음 아파하셨고요.”

“다행이네요. 걱정했어요. 건강 안 좋으시니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지한은 미소 짓고는 말했다.

“병원에서 전화 받았어요. 해주 씨 아버님 신약 효과 좋아서 용량 좀 더 늘려 보기로 했다고. 할아버지는 강한 분이니 걱정하지 말고, 아버님 옆에서 잘 챙겨 드려요.”

“네, 그럴게요. 나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보혜와 진오가 각각 징역 1년 6개월과 징역 8개월 법정 구속을 받았다는 얘기까지 나눴을 때, 어느덧 해주가 지내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주차장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지한은 도착했다고 말하지 못했고, 해주는 차에서 내리질 못했다.

그저 묵묵히 차 앞창을 바라만 보았을 뿐.

그러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해주였다.

“이상해요. 결혼 생활 정말 짧았고, 우리는 진짜 결혼도 아니었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해요.”

해주의 먹먹한 목소리에 지한은 서글픔을 감추며 말했다.

“미안해요. 겪지 않아도 될 감정 겪게 해서. 해주 씨 옆에 두고 싶은 마음에 계약 결혼 제안했고, 힘들게 했어요.”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에요. 억지로 떠밀려서 하게 된 거 아니고, 지한 씨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그래도 내가 10억으로 협박했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걸요.”

지한의 가벼운 농담에 해주가 웃음 지었다.

“그건 그렇네요.”

그러곤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우린 정말 인연은 아닌가 봐요. 마음이 통할 때면 꼭 멀어지네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두 번이나 그랬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씁쓸한 감정이 차 안에 차올랐다.

그때, 편의점에 다녀오는지 진섭이 바깥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지한의 차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고, 해주는 그제야 안전벨트를 풀었다.

“가 볼게요.”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요.”

“지한 씨도요. 건강하게 지내다가 한 달 뒤에 만나요.”

해주가 조수석 문을 열었고, 다시 한번 그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지한은 두 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고개를 숙여 팔 한쪽에 이마를 기댔다.

겨우 다잡은 마음이 해주를 보자마자 무너졌다.

또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겨우 단단하게 세워 놓은 마음이 한 달 뒤, 다시 해주를 만나게 된 날 지금처럼 무너지면 어떡하나.

한 달 뒤, 그녀를 보는 게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

도어 록을 풀고, 해주가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진섭이 주방에서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진섭은 인기척에 해주 쪽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잘하고 왔어?”

“응, 잘하고 왔지.”

“아빠도 방금 편의점 갔다 왔는데. 좀 더 천천히 들어왔으면 만나서 들어왔을 수도 있었겠다.”

“그랬어?”

해주는 굳이 진섭을 봤다는 얘긴 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왜 봤음에도 아는 체하지 않았는지 말해야 하고, 지한과 같이 있었다는 것도 얘기해야 하니까.

그제, 지한이 진실을 고백한 이후로 본인이 잘못한 건 없었다고 홀가분하게 생각한 아빠는 한편으론 더 괴로워했다.

잘못 하나 없는데도 그 일에 엮여 타격을 입었고, 억울하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한스러워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진섭의 앞에서 지한의 얘길 꺼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왜 밥 안 먹고 컵라면 먹어?”

“우리 딸 오는 데 시간 좀 걸릴 줄 알았지. 밥 안 먹었으면 해 줄까?”

진섭의 물음에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 없어서 안 먹을래.”

“아침도 안 먹었잖아.”

“저녁 든든하게 먹지 뭐. 나 일단 씻고 올게.”

해주는 애써 웃음 지으며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다시 거실로 나온 해주는 컵라면을 먹고 있는 진섭에게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안에서 한참 동안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조금씩 흐느끼는 소리도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 듣지 못하던 진섭은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에 긴가민가하며 욕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좀 더 선명해진 소리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이혼 신청을 하고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워낙 정 많은 아이니 계약으로 한 결혼이었는데도 마음이 아픈 걸까.

그러다 진섭은 지한과 해주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사랑 없이 결혼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두 사람의 모습.

남해에서까지만 해도 해주는 미안해서, 지한은 그저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라서 서로를 배려하며 잘 지내는가 보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그 반대로 생각을 했었다.

그게 아니었나. ……설마 우상 회장 아들을 좋아했던 건가.

그때, 다시 물소리가 그쳤다. 동시에 울음소리도 그쳤다.

진섭은 티 내지 않고 운 해주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참 고통스러운 지난 일도 함께 떠올라 억울했다.

결국 진섭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엮일 수 없는 집안이다.

극악무도한 아버지를 둔 남자와 결혼한다면 해주만 힘들 테니, 그러니 해주가 그를 좋아한다면 하루빨리 잊기를 진섭은 바랐다.

욕실 세면대 물을 잠근 해주는 눈물을 닦았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형편없었다. 눈가는 빨갛고, 표정은 처량하고.

다시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속 시원히 울지 못했어도 해주는 더 울 수 없었다.

다시 물을 틀고 울었다가 이번엔 아빠가 눈치챌지도 모르고, 눈이 팅팅 부을 때까지 울었다간 아빠가 틀림없이 운 걸 알게 될 테니까.

해주는 샤워를 시작했다. 벽에 샤워기를 걸어 두고 쏟아지는 물로 얼굴을 여러 번 씻었다.

평소보다 샤워 시간이 두 배는 걸렸고, 그동안 눈가의 열기는 진정됐다.

해주는 옷을 갈아입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돌돌 감싼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새 컵라면을 다 먹은 진섭은 소파에 기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씻고 나니까 개운하다. 아빠, 나 좀 잘게. 자고 일어나면 같이 밥 먹자.”

진섭은 그제야 다시 해주를 돌아봤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해주를 보며 그는 대답했다.

“그래, 푹 자고 일어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눈가가 벌게진 것도 모르고 애써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해주를 보며 진섭은 생각이 많아졌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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