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진섭은 지한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2년 전 일이 진섭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얘기인가?
하지만 2년 전 기술 유출 사건은 분명 사채업자가 시킨 일이었다. 게다가 그 일로 이득을 본 것도 우상이 아닌 다른 기업이었다.
한데 왜, 우상 회장이 자기 아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기술 자료를 해주에게 훔치라고 했다는 걸까.
지한은 진섭에게 천천히, 2년 전 사건의 전말을 처음부터 전하기 시작했다.
지한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아 우상전자 주식 보유량이 상당했던 2년 전. 그가 좋은 성과를 보이며 회사에서 차기 우상전자 대표로 많은 지지를 얻자, 계속되는 적자와 구설수로 회사 내 입지가 좁았던 아버지가 그를 아들임에도 질투했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아들까지 라이벌로 생각할 만큼 우상전자에 집착한 아버지의 불행했던 젊은 시절 얘기.
주변 사람을 이용하려는데 하필 해주가 걸려들었다는 얘기.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됐으니 진섭과 해주를 힘들게 만든 아버지를 마땅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게 할 거라는 말까지, 지한은 진섭에게 전했다.
“진실은 최근에 알았습니다. 저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해주 씨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고, 저 때문에 해주 씨는 억울하게 결혼해야 했습니다.”
“지한 씨, 그건……!”
지한의 말에 해주가 반박하려 했다. 억울하게 또는 강제로 한 결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한 결혼이라고.
하지만 지한이 미소 지으며 해주를 보았기에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주친 눈빛이 그에게 면죄부를 주지 말라고 하고 있기에.
마음 같아서는 면죄부를 주고 싶었다. 당신은 아무 잘못 없다고, 그냥 나쁜 아버지를 만났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 일로 크게 괴로워진 피해자가 아빠였으니,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아빠의 앞에서 지한의 편은 차마 더 들 수가 없었다.
“이제 모든 걸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해주 씨와 이혼하고, 아버지를 처벌받게 하겠습니다.”
지한의 말이 끝났다. 진섭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지한의 얘기를 전부 들은 그의 머릿속엔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갔다. 억울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진섭의 감정이 겪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격해졌다. 살짝 가빠진 숨을 섞어 그는 말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픈 몸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어요, 내가. 나 때문에 나쁜 짓 한 내 딸 해주에게도, 우리 때문에 곤란했을 강지한 씨한테도.”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시킨 일이라니, 어쩌면 강지한 씨는 잘못이 없을 수 있겠죠. 애초에 사채를 이용한 내 잘못도 있을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진섭이 목메는 목소리를 애써 차분히 가라앉히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억울하네요. 참 많이.”
“억울하신 마음 당연합니다.”
결국 울컥 올라온 감정에 진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억지로 감정을 삭여 보고자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던 진섭이 다시 지한을 보고는 조금 더 격해진 말투로 말했다.
“우리 딸하고 하루빨리 이혼해 주세요. 내 딸 이제부터 자유롭게 살아야 하니까.”
지한은 티 나지 않게 주먹을 천천히, 꽉 쥐었다.
해주를 떠나보내야 하는 감정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고 있음에도 아프지 않게 느낄 만큼 괴로웠다.
“네. 하루빨리 이혼하겠습니다.”
지한은 대답했다. 시선에 슬픔 가득한 해주의 표정이 들어왔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진섭의 말이 맞다. 해주는 자유로워져야 했다.
무엇보다도 해주가 제 곁에 있으면 앞으로 벌어질 아버지와의 싸움에 휘말려 들며 또다시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하루빨리 이혼해야지. 많이 힘들겠지만, 해주의 인생과 그녀의 안전이 지한에겐 더 중요했다.
“해주야. 짐 거실에 내놓은 게 다지? 바로 나가자.”
진섭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한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면 됩니다. 지금은 강지한 씨 더 보고 있기 힘드네요.”
“그럼 택시만 불러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것도 됐습니다.”
지한은 괴로운 진섭의 마음이 느껴져 더 권하지 못했다.
진섭이 해주가 한쪽에 세워 둔 캐리어와 가방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해주는 잠시 아빠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지한에게 말했다.
“연락드릴게요.”
“조심히 가요. 그리고 미안해요.”
지한의 사과에 해주는 아니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잠시 그의 곁에 더 머물다가 무거운 걸음을 돌렸다.
지한은 해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녀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현관을 나선 뒤에야 지한은 하아, 큰 한숨을 내쉬었다.
힘을 내야지. 무너지지 말아야지. 속으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마음이 힘들어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때,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전화 벨 소리를 울렸다.
아버지였다.
-너!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강 회장의 호통이 들려왔다.
지한은 슬프고, 괴롭고, 아픈, 복합적인 감정들을 꾹 누르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화내셔 봤자 이미 늦으셨어요, 아버지. 늦게나마 지난 잘못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셔야죠.”
-감히 네가! 미친 게지? 기어코 우상을 포기하려는 게야?
“몇 번이나 말씀드렸죠. 전 우상에 큰 욕심 없습니다. 아버지랑 달라요. 아직도 못 믿으시겠다면 제가 아버지와 다르단 걸 증명시켜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여 드릴게요.”
-못난 놈. 내가 호락호락 당해 줄 것 같아?
“호락호락 당해 주시진 않겠지만, 아시잖아요. 제게 유리한 싸움이란 거.”
지한이 잠시 울컥 올라온 버거운 감정을 꾹 누르곤 말을 덧붙였다.
“통화 길게 하기엔 제가 많이 바쁘네요. 이만 끊겠습니다.”
지한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강 회장이 무어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더는 들어 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아버지다. 핏줄이고, 한때는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러니 제 손으로 아버지에게 지난날들의 대가를 안겨 주는 건 지한으로서도 참 괴로운 일이었다.
지한은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압구정, 외조부인 권호재의 아파트였다.
***
침묵이 길었다. 요즘 지한이 가는 곳마다 그랬다.
진섭이 그랬고, 지금은 호재가 할 말 잃은 표정을 짓고서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그제야 아주 조금 현실을 받아들인 호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쩐지 너무 빨리 결혼했다 했어.”
“죄송해요, 할아버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결혼하라고 하자마자 선도 안 보고 해주를 데려왔으니.”
지한은 우려했었다. 해주와의 결혼에 대한 비밀을 권호재에게 말한다면 그가 얼마나 노여워할지에 대해.
역정을 내다가 혈압이 높아져 건강이 더 나빠지시면 어떡하나.
마음 같아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편하시도록 외조부에게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우상전자 주식 상속 문제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건강한 날, 되도록 빠르게 호재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니 다행이었다. 지한의 말을 전부 전해 들은 호재가 생각보다 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건.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해주가 참 마음에 들어서 모른 체했어. 둘이 백년해로하며 잘 살기를 바랐어.”
호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내게서 시작된 일이다. 지한이 네가 그렇게 결혼하기 싫어했던 것도, 그래서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도, 해주가 그렇게 고통받은 것도 다 내 욕심이었어.”
호재는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애원하는 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싫어요. 싫다고요! 나 만나는 사람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러세요?’
단호한 호재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깟 월급쟁이랑 결혼하면 뭐 얼마나 행복할 것 같아? 그것도 노후 책임져야 하는 홀어머니 딸린 놈이면. 1년! 그때면 분명 후회할 거다. 혹시라도 내 돈 믿고 그딴 놈 데려온 거라면 꿈 깨. 내 마음에 안 차는 놈 데려오면 내 재산은 전부 우영이 줄 생각이니!’
희영을 달달 볶아 태규와 결혼하게 하지 않았다면, 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다 괜찮았을 일이었다. 돈 욕심을 적당히 부렸다면 사랑하는 딸과 손자가 이토록 고통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계약이 수반된 결혼이라. 그렇다 할지라도 안타까웠다.
단순히 해주가 예뻐서만은 아니고, 강 회장이 느끼기에 지한과 해주는 서로를 마음에 품었으니까.
마주 보며 웃는 모습, 상대방을 배려하고 아껴 주는 모습은 거짓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두기엔 해주가 겪은 일이 너무 가혹했다. 그리 큰 사고를 당하고 가족에게 큰 후유증을 남겼으니, 그저 내 손주 옆에 남아 주길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었다.
지한도 해주도 전부 안쓰러웠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든 일은 아버지 잘못이죠. 그러니 반드시 죗값 치르게 할 거고요.”
“해주와 이혼하는 대로 주식 상속 없던 일로 하고, 다른 일로 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내가 힘닿는 대로 도우마.”
호재의 말에 지한은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편한 소식 들려드려서 죄송해요.”
“내 걱정은 말고. 지한이 넌 좀 어때. 괜찮냐?”
“……네.”
지한은 마지못해 웃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괜찮아야죠.”
***
이틀 후, 지한과 해주가 다시 만났다.
이혼 서류를 접수하기로 약속한 수요일 11시에 지한이 먼저 도착해 가정 법원 앞에서 해주를 기다렸고, 잠시 뒤 해주도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일찍 왔네요.”
해주의 물음에 지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해주 씨가 기다릴까 봐요.”
안 오고 싶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해주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고작 이틀 만에 만나는 건데도 두 달은 못 본 것처럼 그리웠다.
다시 이 법원에서 나서는 순간, 족히 한 달간은 보지 못할 텐데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지 지한은 궁금해졌다.
“들어가죠.”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가요.”
각자의 마음을 견디며 두 사람은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