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윤의 차가 아정이 사는 빌라 단지로 들어왔다.
몇 번 와 봤고, 그렇기에 이젠 익숙해진 곳. 다시 한번 고백 장소를 확인하고 그는 차를 주차했다.
윤이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매너가 좋아 늘 자신이 3층까지 올라가는 걸 지켜본 뒤에야 집에 돌아갔던 윤이기에, 아정은 같이 내리는 윤을 의심 없이 따라 내렸다.
“오늘 밤은 진짜 여름 같다.”
윤이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나 둘러보기 위해 괜히 꺼낸 말이었지만, 정말로 공기가 부쩍 후덥지근해졌기에 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 금방 오겠지. 이번 여름은 많이 안 더웠음 좋겠네. 데려다줘서 고마워.”
아정이 집으로 들어갈 것처럼 인사하자, 아직 할 일이 남은 윤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오늘 저녁 어땠어?”
“응? 근사했지.”
“이렇게 마무리하기엔 아쉬울 만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눈치 빠른 아정이 한순간 기대감에 눈을 키웠지만, 혹시나 파인 다이닝에서 그랬던 것처럼 김칫국을 마시게 될까 봐 그 이상 티를 내진 않았다.
“어, 뭐…… 조금?”
“잠깐만.”
윤이 트렁크로 향했다. 기뻐할 아정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가 트렁크를 열려고 하던 그때였다.
“야!”
한순간이었다. 전봇대에서 재형이 튀어나온 것이.
윤은 속수무책으로 멱살을 잡혔고, 재형은 윤을 벽에 몰아세우며 분노했다.
“너 이 새끼 뭐야!”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윤은 저항할 새 없이 목을 붙잡혀 캑캑댔다.
“어떤 새낀데 아정이한테 찝쩍거려? 어!”
재형이 죽일 듯한 눈빛으로 소리를 지르자 당황스러움에 잠시 굳어 있던 아정이 재빨리 재형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놔! 빨리 놓으라고!”
재형의 시선이 아정을 향했다.
“너 지금 이 새끼 편드는 거야?”
“뭐라는 거야. 빨리 놔!”
“연락 안 받고 잠수 타면서 이 새끼 만난 거였어?”
“왜 이래, 진짜!”
“왜 이래? 왜 이래?”
재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뒤집어 깠다.
“넌 씹! 남자 친구가 딴 년이랑 있으면 가만히 있겠어? 어! 몸 함부로 굴리는 주제에 입 다물고 있…… 으악!”
재형의 더러운 말에 수치심으로 아정의 표정이 굳으려던 때였다. 한순간, 아정의 앞에서 재형은 형편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멱살을 잡혔던 윤이, 제 옷깃을 쥔 재형의 손을 뒤로 비틀어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기에.
“이 스토커 새끼가 뭐라는 거야.”
무섭게 내리깔린 윤의 목소리에 재형은 조금 주춤했다. 하지만 자존심상 물러설 수는 없어 벌떡 일어서며 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뭐? 스토커?”
재형이 달려들 기세로 윤을 향해 상체를 내밀었지만, 윤은 아정을 등 뒤로 숨기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재형을 보았다.
“헤어진 주제에 남의 집 앞에 찾아와서 행패나 부리는 게 그럼 스토커지 뭐야?”
“씹! 너 뭐야?”
“나?”
윤이 흘끗 아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재형의 말에 충격받은 듯 굳은 아정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남자 친구.”
“뭐?”
“귓구멍이 막혔나. 아정이 남자 친구라고.”
재형은 기막힌 표정을 했다. 그는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아정을 노려봤다.
“진짜야? 이 새끼가 너 남자 친구야?”
“어?”
아정은 윤을 슬쩍 보다가 입 맞춰 달라는 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그의 얼굴을 보곤 당당하게 말했다.
“맞아. 남자 친구.”
“하. 나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게 중요해? 헤어진 게 중요하지. 헤어진 주제에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남자 친구처럼 굴고 지랄이야?”
“뭐? 지랄?”
아정의 욕설에 재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동안 봐줬더니 이게 아주 기어오르지!”
“뭘 봐주고, 뭘 기어올라? 지는 더러운 말도 아주 잘만 지껄였으면서 지랄 한 마디가 그렇게 빡치세요? 찌질한 새끼. 널 4년이나 만난 내 시간이 아깝다!”
“뭐? 찌질?”
재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몸을 내밀며 아정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손이 아정에게로 닿을 리 없었다. 윤이 그녀를 더욱 제 뒤에 숨겼기에. 그리고 동시에 그는 뻗쳐 온 재형의 손목을 확 붙잡았다.
“아악!”
한순간, 재형의 팔이 꺾였다. 아정이 놀라 쳐다보니 윤이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로 재형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제압하고 있었다.
윤은 좀 더 세게 팔을 쥐어틀며 말했다.
“감히 누구한테 손대려고 해?”
“아아! 아파! 놔!”
“진짜 최악인 놈이네. 여자한테, 그것도 아정이한테 손을 올려?”
“아, 놓으라고! 놔아! 내가 잘못했어. 놔주세요! 그만. 팔 빠지겠어!”
“사과해.”
“잘못했어! 아! 진짜 나 팔 부러지면 어떡해!”
울부짖는 재형을 보며 윤은 더욱 표정을 굳혔다.
“누가 나한테 하래? 아정이한테 사과하라고.”
재형이 냉큼 아정을 쳐다봤다.
“아정아, 미안해.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난 아직 너 못 잊어서 그랬어. 용서해 줘.”
처절하게 비는 재형을 향해 윤은 물었다.
“또 나타날 거야?”
“아니. 아니!”
“나타나면 넌 진짜 스토커야. 스토커 법 개정된 거 알지? 다음엔 우리 팔 꺾인 채로 경찰서까지 가는 거야. 내 백 좋거든? 한번 해 보자.”
이 순간, 든든한 백이 되어 줄 지한의 비서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윤은 말을 덧붙였다.
“셋 센다. 조금이라도 뭉그적대면 이번엔 바로 팔 부러지는 거야.”
윤은 재형의 손을 놔주며 동시에 말했다.
“하나.”
고작 하나밖에 안 셌는데, 재형은 생존 본능으로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안전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멈춰 서서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용기를 보이곤 다시 꽁지 빠지게 멀어졌다.
윤이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데 아정이 말했다.
“고마워.”
윤은 그제야 아정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물음에 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내내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근데 아무리 도와주려고 한 말이라도 여자 친구라니. 나 좀 설렜다?”
“정말 설렜어?”
“응. 힘도 장난 아니던데? 운동했어?”
“어릴 때 좀.”
멋있다는 듯 바라보는 아정의 눈빛에 윤은 좀 쑥스러운 표정을 짓곤 물었다.
“근데 얼마나 설렜어? 내가 고백해도 받아 줄 만큼 설렜어?”
윤의 말이 머리에 늦게 입력됐는지 아정은 잠시 눈만 끔뻑였다. 그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뭐?”
“상황이 이렇게 돼서 네가 원한다던 조용한 고백은 못 해 주는 게 아쉬운데…….”
윤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차로 다가가 트렁크를 열었다.
이내 그는 손에 꽃과 벨벳 상자 하나를 들고서 아정에게로 다가갔다.
“나랑 사귀자.”
“이걸 다…… 언제 준비했어?”
윤이 꽃다발을 먼저 내밀었고, 아정은 얼떨떨하고도 행복한 표정으로 받아 들며 물었다. 그러자 윤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그건 천천히 말해 줄게. 지금 구구절절 말하기에 너무 멋없어. 받아 줄 거면 왼손 내밀어 줘.”
키 크고, 몸매 좋고, 힘도 세고.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가 고백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아정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윤은 천천히 아정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걸리는 데 하나 없이, 헐렁한 느낌 하나 없이 반지가 아정의 손가락에 딱 맞자 아정은 또 한 번 물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지난번에 우리 호텔 갔을 때. 너 자고 있는 동안 쟀어.”
“센스 있네.”
아정의 말에 윤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센스 있는 모습 자주 볼 거야. 좋은 데 함께 다니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자.”
아정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숨겨지지 않았다.
“응, 그러자. 오늘 고마워. 밥도, 고백도 그리고 그 새끼 혼내 준 것도.”
“앞으로도 지켜 줄게. 고백 받아 줘서 고마워.”
가로등 아래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
아침이 밝았다.
지한이 슈트를 갖춰 입고 한남동 저택으로 찾아왔다.
이내 지한과 해주, 진섭. 세 사람은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차 한 잔 커피 테이블에 놓지 않은 거실은 분위기가 아주 서늘했다.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지한은 차마 얘기를 시작하지 못했고, 결국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진섭이었다.
“편하게 말해요. 할 말이 뭔가요.”
이미 그가 할 말을 알고 있는 해주는 지한의 말에 충격을 받을지 모를 진섭의 손을 꼭 잡았다.
진섭이 그런 해주를 쳐다보는데, 지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2년 전, 해주 씨가 제 서재에서 회사 기술 자료를 빼돌린 일이 있습니다.”
“아, 그건 나 때문이에요. 해주 잘못 없어요. 정말입니다.”
지섭은 지한이 그때 일을 꺼내며 탓을 하려는 줄 알고 변명했다. 그가 더 오해하기 전에 지한이 먼저 말했다.
“해주 씨도, 아버님도 잘못 없습니다. 그 일은 저희 아버지 죄입니다.”
“……네?”
지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진섭이 미간을 좁혔다.
“절 끌어내리고 싶어서 아버지가 시키신 일입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