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두 부부는 자연히 정보를 물었고, 보혜와 진오는 난감해하다가 예전에도 말했듯 지인에겐 함부로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은근하게 다시 투자 얘기를 꺼냈다고 했다.
‘좋아하는 형님이니 좋은 정보 알려 드릴 수는 있어요.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얘기해 줘요. 확실한 투자처이긴 한데 만에 하나, 그런 확률 있잖아요. 그럼 갑니다!’
다음 날, 피해자는 5백만 원을 들고 갔었다. 하지만 박진오는 이왕 결정했다면 있는 자본 다 끌어모으길 추천한다고 했다.
말끝에 모든 결정은 형님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붙여 놓고 또 한참 후엔 다시, 자신처럼 돈 벌 줄 아는 사람들은 좀 화끈하게 투자한다는 말을 은근하게 흘렸다.
피해자는 고민 끝에 3천만 원을 넣었다.
급하게 쓸 데가 있다는 피해자의 말에 딸이 빌려주었던 돈이었는데, 두 달 후 결혼 예정인 딸의 시집 자금이었던 돈을 바보처럼 전부 박진오에게 맡겼다.
‘어쩌죠, 형님. 이번 투자 실패예요. 아니, 내가 왜 책임을 져요? 투자하고 싶다고 한 것도 형님, 투자 금액 결정한 것도 형님. 대체 내가 뭔 잘못이 있다고? 그러니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넣으라고 했잖습니까.’
원금을 모두 날렸다는 말에 따질 수도 없었다. 박진오 말대로 모든 결정은 피해자가 했고, 결국 욕심을 부린 탓이니.
딸은 결혼을 앞두고 연락을 두절했다. 3천만 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결혼식에도 초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속병을 얻길 한 달째. 확 죽어 버릴까 생각하던 찰나에 피해자는 웬 남자한테 전화를 받았다.
남자는 물었다. 박진오에게 사기를 당했느냐고. 피해 금액, 아마 투자금으로 쓰지 않고 개인적으로 카지노에서 전부 날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고소를 진행하겠느냐고.
이로써 보혜와 진오는 납치, 폭행죄 외에 사기죄가 더해졌다. 카지노에서 돈을 썼다는 게 확실해지면 처벌은 피할 수 없었다.
지한과 해주가 경찰서 건물을 나섰다. 한쪽에 놓인 등나무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며 지한은 말했다.
“일 크게 만들 수도 있어요. 기자 불러서 언론에 도보하게 하면 쉬워요. 아무리 간 큰 사람도 처음부터 이렇게 큰 사기를 치진 못할 테니, 아마 사기가 처음이 아닐 거예요. 이번에 이슈화시키면 분명 다른 피해자가 더 나타날 거고, 그럼 몇 년, 징역 살다 나오게 할 수 있어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떡할래요. 어머니가 확실하게 처벌받으시길 원하는지, 아니면 박진오만 처벌받게 하고 해주 씨 어머니는 이쯤에서 경고로 끝낼지, 해주 씨가 결정해요.”
해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엄마에게 정은 없다. 돈 뜯을 생각을 하면서 저를 낳은 순간부터 애정 없이 키우다가 결국 버린 것까지 아주 소름 끼쳤다.
아빠에게 한 짓은 또 어떻고. 행복하게 잘 지내던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엄마가 처벌받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핏줄이 뭔지, 남이나 다름없이 살아왔는데 그래도 엄마라고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처벌받길 원해요. 이슈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도 해주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빠와 자신만이 희생양이었다면 모를까, 죄 없는 사람들까지 기만했으니 엄마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다.
***
보혜와 진오는 사기 건까지 더해지며 계속 경찰서에 남아 조사를 받았고, 지한과 해주, 진섭은 지한이 고용한 대형 로펌 변호사를 통해 사건을 보고받기로 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밤늦은 시간, 지한의 차가 한남동 집 앞에 섰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지한은 뒷좌석에서 내린 해주와 진섭에게 말했다.
“그럼 쉬세요.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가 보겠다는 지한의 말에 해주는 아쉬움을 애써 숨겼고, 진섭은 당황했다.
“아니, 왜 같이 안 들어가시고…….”
지한과 해주의 신혼집이라는 으리으리한 한남동 저택은 분명 지한의 집일 터였다. 한데 그가 나가서 따로 잔다니.
손님이 불편하게 지낼까 봐 배려해 주는 걸로만 생각한 진섭은 미안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지한은 아직 아무런 진실을 몰라 자신을 이토록 어렵게 대하는 진섭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 시간만 제게 내 주세요.”
지한은 내일 진섭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이었다. 이미 해주와는 이야기를 끝냈다.
하루라도 빨리 진섭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사과하기로. 그리고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제 아버지에게 세상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다고 그는 해주에게 말했다.
“어…… 시간이야 많아요. 근데 무슨 일 때문인지…….”
“그건,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틀 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푹 쉬세요.”
지한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해주는 아버지 잘못을 다 짊어지고 가려는 지한이 안쓰러웠지만, 아빠를 옆에 두고서 할 생각이 아니라고 여기며 마음을 꾹꾹 눌렀다.
“들어가요. 푹 쉬고요.”
이번엔 지한이 해주를 보며 말했고, 해주도 애틋함을 애써 감추며 지한에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러곤 그녀는 걸음이 불안정한 진섭을 부축해 대문으로 들어갔다.
지한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한숨을 푹 내쉴 수 있었다.
오늘 밤이 그에게 참 길 예정이었다.
***
같은 시각.
윤과 아정은 예약한 레스토랑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나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 처음 와 봐. 금요일 밤에 오니까 너무 좋다.”
“진짜? 전 남자 친구랑 안 와 봤어?”
윤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아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이 두고 간 메뉴판을 펼쳤다.
“내가 말 안 했나? 밥 한 끼에 만 원 넘는 데 절대 안 갔다고.”
“만 원? 4년 만났다며. 기념일엔?”
“9천 원짜리 파스타 먹으러 다녔어. 뭐 맛은 있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윤도 메뉴판을 펼쳤다.
“맛은 있었겠지. 하지만 기념일은 분위기인데.”
“내가 참 구닥다리 연애를 했었지. 후회해, 엄청. 그래도 헤어진 덕분에 파인 다이닝에 와 보네.”
“온 김에 엄청 맛있는 거 먹자. 여기 코스 B가 좋아.”
윤의 말에 아정은 코스 B를 찾아 눈을 굴렸다.
“비싼데?”
“처음 와 볼수록 실망하지 않게 비싼 거 먹어 봐야지. 내가 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오, 멋진데? 월급 좀 많이 받나 봐?”
“왜 이래, 나 전무님 비서야.”
장난스러운 윤의 자부심에 아정은 픽 웃고는 말했다.
“그럼 잘 먹을게.”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얼마 뒤, 코스 첫 번째 요리인 캐비아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처음 먹어 보는 요리에 아정이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 나서야 본격적인 식사를 시작했다.
“안 부장님 웃겨. 한동안 커피 심부름 안 시켰었잖아. 근데 해주 언니 때문에 나한테 함부로 못 한 게 자존심 상했었나 봐. 오늘 오랜만에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진짜? 못 한다고 하지.”
“그러고 싶었지. 근데 취업시켜 준 사람이니까 거절을 못 하겠더라고. 아무튼 그렇게 커피 심부름을 해도 제일 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안 사던 사람이 오늘은 무려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라더라.”
윤이 혀를 쯧쯧 찼다.
속에선 좋아하는 여자를 부려 먹는 안 부장을 향해 피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아직 고백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티 낼 수 없어 참고 말했다.
“그 와중에 살길을 열어 두셨네.”
“언니한테 이를까 봐 무섭긴 했나 봐.”
아정은 안 부장을 비웃듯 웃다가 말했다.
“근데 우리 언니 잘 사는 것 같아서 너무 보기 좋아. 같이 남해 간 거면 전무님 일 따라간 거겠지? 신혼여행 두 번 간 기분이겠다. 얼마나 떨어져 있기 싫으면 출장을 같이 가? 깨가 쏟아져, 아주.”
“그러게. 아무래도 신혼이니까.”
윤은 맞장구쳤다. 지한과 해주가 좋은 일로 남해에 내려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윤도 지한이 남해에 갔다는 사실만 알지, 왜 갔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업무차 전화할 때 듣는 지한의 목소리와, 낮에 심부름업체에 지시한 내용으로 무슨 일이 있구나, 추측할 순 있었다.
게다가 우상그룹의 판도를 바꿔 놓을 중요한 일을 앞둔 이때 자리를 비우다니, 보통 일은 아니겠구나, 또 추측할 뿐이었다.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지한의 비서이기에 모시는 상사의 일을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윤은 지한의 부재가 출장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정은 해주와 따로 연락하며, 해주가 남해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해주가 그저 출장에 따라갔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언니 그동안 고생했던 게 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나 봐. 예전에 가사 도우미 일 한다기에 많이 힘들까 봐 걱정했었는데, 언니가 전무님 집에서 일한 덕분에 연결된 거잖아. 아, 이제 형부라고 불러야 하는데 입에 안 붙네.”
아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윤은 지한과 해주가 계약 결혼을 한 거란 사실도 말하지 못하기에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공감해 주고는 애써 말을 돌렸다.
“해주 씨랑은 언제부터 친했어?”
“6년쯤 전에 레스토랑 아르바이트했거든. 그때부터.”
“전 남친도 레스토랑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같이 일했지. 나 고백받은 장면도 봤어. 아주 공개적으로 고백했었거든.”
“그래? 공개적인 고백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아정에게 고백하려던 윤은 과거 아정이 받았다는 고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선물은 소박하지 않아도 장소는 소박한 곳에서 받는 걸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작은 걱정은 말투 속에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그런 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아정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전 싫어하지. 소름 돋아서 죽는 줄 알았어.”
“근데 왜 사귀었어?”
“그날은 거절했는데 그 뒤로 꾸준히 나 챙기잖아. 결정적으로 아픈 날 죽을 직접 만들어서 갖다주더라고. 우리 엄마도 안 해 준 죽을.”
생각해 보면 너무 소박한 것에 넘어갔다. 아무래도 이십 대 초반이었던 게 문제였다.
“근데 말이야. 왜 나랑 이렇게 좋은 식당에 온 거야?”
어느덧 메인 요리까지 나왔을 때였다.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아정이 물었고, 눈빛엔 은근한 기대감이 서렸다.
윤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답답하니까 빨리 고백하라는 신호겠지.
‘조금만 기다려. 네 로망대로 고백할 거니까.’
속으로 아정에게 말한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 좋은 식당에 친한 사람들이랑 다니는 거 좋아해.”
“아, 뭐야. 식사 메이트가 필요했구나?”
아정이 애써 실망한 표정을 숨겼다. 윤은 아정을 실망시킨 게 미안하면서도, 잠시 뒤 그녀를 다시 환하게 웃게 해 줄 생각에 설렜다.
점심시간에 미리 사 둔 커플링이랑 꽃다발도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집 앞에서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