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식당 출입문을 여니 4인용 식탁 위에 주문한 백반 세 개가 푸짐하게 놓여 있었다. 해주와 진섭이 맞은편 자리를 비워 놓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왔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한을 발견한 해주가 테이블이 세팅된 맞은편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한은 식탁 가까이로 다가갔다.
빈자리 의자 중 하나를 빼냈고, 자리에 앉으려던 그는 생각난 게 있는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 지갑을 꺼냈다.
이내 명함 한 장을 빼 든 지한은 정중히 진섭에게 명함을 건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지한입니다.”
“아, 나는 명함이 없어서……. 식사하세요.”
진섭이 지한을 대하는 게 어려운 듯 눈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2년 전 그 사건 때문일 거라 짐작하며 지한은 의자를 빼내 자리에 앉았다.
먼저 숟가락을 들고, 그 뒤로 조용한 식사가 시작됐다.
진섭과 지한은 각자의 이유로 서로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 해주는 애써 분위기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어제, 지한은 진섭과 간단한 인사만 나눴다.
지한은 진섭을 보자마자 고민했다. 아버지의 일을 언급하고 대신 죄송하다는 사과를 드려야할까.
하지만 직전에 큰일을 겪었고, 분위기도 어수선하니 사과는 서울에 올라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아무런 대화 없이 밥공기를 반쯤 비웠을 때였다. 문득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한이 전화를 받으니, 조금 전 함께 있었던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보혜 씨 찾았습니다! 바닷가 바위 뒤 폐가에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선착장으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나가죠.”
지한이 전화를 끊었다. 해주와 진섭은 그를 보고 있었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지한은 해주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 찾았다고 하네요. 선착장으로 모시고 온대요.”
***
3일째. 윤은 지한의 부재로 아주 여유로운 근무 중이었다.
호텔도 리조트도 특이 사항이 없어 비서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부리던 그는 히죽, 설레는 웃음을 지었다.
어제도 아정과 시간을 보냈던 그는 오늘도 아정과 함께할 예정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해남에 내려간 건지는 몰라도, 아정과 썸을 타고 있는 이 시점에 지한의 부재는 아주 적절했다.
“전무님이 참 연애에 도움을 주시네.”
그는 오늘 퇴근 후, 아정을 위한 풀코스를 준비했다. 아정이 가 보고 싶다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마시고, 집까지 대리를 불러 간 뒤에 그녀의 집 앞 가로등 아래서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며칠 전, 함께 곱창전골을 먹으며 아정과 말을 놨다. 덕분에 좀 더 살갑게 대화하던 중, 아정이 은근히 원하는 고백 방식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난 거창한 것 싫어. 화려한 이벤트보다는 둘이서만 감동할 수 있는 게 좋아. 예를 들면 근사한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거야. 그리고 집 앞 가로등 밑에서 진지하게 고백하는 거지. 물론 근데 선물까지 소소하면 절대 안 되겠지?’
이렇게까지 정확한 고백 가이드라인을 줬는데 못 알아들으면 바보였다.
이제 시간은 11시 30분.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라 미리 나갈 준비를 했다.
점심은 가볍게 샌드위치로 때우고, 점심시간을 활용해 백화점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고백 장소는 평범해도 선물까지 소소하면 안 되는 그녀를 위해 커플링과 꽃다발을 살 생각이었으니까.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던 윤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헐, 지금 올라오시나? 안 되는데. 나 고백해야 하는데! 아, 어제 고백할 걸 그랬나. 미루지 말걸.”
‘강지한 전무님’ 이름을 보자마자 윤은 망했다는 생각을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전화를 받았다.
“네, 전무님.”
망연자실한 목소리 뒤로 지한의 말이 이어졌다.
-심부름센터 장 실장 연락이 안 돼. 내가 길게 통화할 상황이 아니라 계속 연락해 볼 수 없으니 정 비서가 장 실장 연락되는 대로 내 말만 전해 줘.
그리고 지한은 지시 사항을 전했다.
하나라도 놓칠까, 꼼꼼하게 듣던 윤은 지한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보혜, 박진오. 그 정보만 찾아보면 되는 거죠? 장 실장님 전화 연결되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출근하시는 건 맞나요?”
-그래. 오늘 밤에나 서울 도착할 것 같으니까 내일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오늘 오시진 않는구나.
한순간 윤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오시고요, 장 실장님껜 정보 찾는 대로 전무님께 바로 연락드리라고 하겠습니다.”
***
보혜가 숨어 있던 곳은 어린 시절 놀이터처럼 다녔던 동굴 같은 바위 뒤였다.
지금은 섬에 아이가 없어 섬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장소를 마을 이장이 기억해 냈다.
보혜와 진오는 장자도에서 가장 가까운 파출소로 이송됐다.
가는 동안 진오는 짜증 섞인 욕설을 뱉어 댔고, 보혜는 진오도, 진섭도, 해주도 외면하며 고집스럽게 바다가 보이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장자도에서 파출소까지 차로 10분 남짓이었다.
그사이, 지한과 해주는 진섭을 데리고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해주는 지쳤을 진섭은 병원에서 수액을 맞게 하고, 타박상에 대해 전치 3주 진단서를 발급받아 지한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해주가 진단서를 가져올 때까지 잠시 중단됐던 조사가 다시 시작됐다.
보혜와 나란히 수사관 앞에 앉아 조사를 받고 있던 박진오가 벙찐 얼굴을 했다.
“3주? 3주우?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두 대 때렸는데 무슨 3줍니까? 와, 나 진짜 어이없네.”
진오는 말 그대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형사님. 나 진짜 억울합니다. 내 딴엔 이유가 있다니까요? 이 여자, 안보혜가 내 돈 가지고 튀었어요.”
그는 보혜를 향해 손가락질해 대며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근데 찾아가니까 남자랑 단둘이 있잖아. 내 돈 쓴 것 같아서 열받은 겁니다. 이거 정당방위 뭐 그런 거 참작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지 않았다. 정당방위라는 말을 듣고 싶은 진오는 ‘네?’ 하고 한 번 더 물었지만 역시나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진오가 형사님, 하고 다시 말하려던 때였다.
“지랄.”
어제 밑바닥을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박진오 옆에서 내내 차분함을 유지하던 보혜가 욕설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녀는 경멸의 눈빛으로 박진오를 보며 말했다.
“니 돈? 웃기네. 내 돈이지 그게 어떻게 네 돈이야? 한 푼도 안 번 주제에.”
“내 용돈이었잖아! 당연히 내 돈이지. 그리고 한 푼도 안 벌어? 내가 제주도랑 강원도에서 따 온 게 얼마냐?”
“아, 불법 도박이랑 위장 여권으로 들어간 카지노? 그대로, 아니. 세 배는 날려 먹었지.”
보혜의 말에 진오가 얼른 형사의 눈치를 봤다.
“야, 내가 무슨 불법…… 위장…… 거짓말도 정도껏 해라.”
“왜. 더 말해 줘? 대마초 만들어서 피웠지, 사기…….”
“야!”
진오가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 너는 몸이나 파는 게 뭐가 당당한데?”
보혜가 무섭게 표정을 굳히며 진오를 따라 일어섰다.
“하, 몸을 팔아?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지난번부터 개소리하는데, 나 연애한 거야. 남자 친구한테 돈 받은 게 뭐가 잘못됐어?”
“그럼 여태 바람피운 거네? 이혼 안 하고 나랑 살아, 연애도 따로 해. 남자에 미쳤네, 이거!”
“남자 많아서 더 좋다고 한 변태 새끼가 누군데!”
아비규환이었다.
해주는 진섭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사랑이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내가 이렇게까지 형편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을 할까.
아니, 진섭은 실망이 아니라 가슴 아파할지도 몰랐다. 워낙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아빠를 병원에 두고 오길 잘했다고 해주는 생각했다.
“그만! 여기가 무슨 댁들 안방이에요? 여기가 어디라고 시끄럽게 굽니까? 업무 방해죄 추가받기 싫으면 당장 자리에 앉고 조용히들 하세요!”
상황은 한순간 종료됐다. 시끄럽던 형사과가 다시 조용해졌다.
때마침,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언제나 일 처리가 빠른 심부름업체 장 실장의 번호가 액정 화면 위에 떠 있었다.
***
“피해자 오늘 중으로 고소장 접수하러 오시겠답니다. 직접 돈을 준 거라 신고해도 처벌 안 된다는 말만 믿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고 하네요. 두 분께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방금까지 보혜와 진오를 조사하던 형사가 지한과 해주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그렇습니까. 피해자분 억울함이 풀렸으면 좋겠네요.”
방축도를 떠나기 전, 지한은 윤에게 전화해 심부름업체 장 실장과 통화가 되면 얘기 하나를 전하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지한은 정보 하나가 필요했다. 보혜와 진오가 살던 곳 주변으로 두 사람과 안 좋게 엮인 사람이 있는지, 하는.
언제나 일 처리가 빨랐던 심부름업체 장 실장은 반나절도 안 돼 전화를 해 왔다.
보혜를 찾기 위해 군산 쪽에 내려갔던 직원이 아직 그 근처에 있어 곧장 지한의 의뢰를 알아봤는데, 마을에 귀농하러 온 60대 부부가 보혜와 진오에게 3천만 원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평범한 수법이었다.
처음엔 같은 이방인이니 친하게 지내자며 접근했고, 서로의 집에 드나들 정도의 사이가 됐을 땐 솔깃한 정보를 하나씩 오픈했다.
보혜는 명문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진오는 고졸이지만, 작은 투자 사업을 하며 돈을 쏠쏠하게 벌었다고 했단다.
둘 다 거짓이었지만 보혜의 고급스러운 느낌과 진오의 세 치 혀에 피해자는 점점 그들을 신뢰하게 됐다고 했다.
특히 술자리에서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
‘민수가 한번 만나재. 밥 산다고.’
‘민수가 누구지?’
‘내가 윈바이오 추천했던.’
‘아, 그래. 만나야지. 자기 덕분에 3천만 원으로 3억 만들었는데. 기분 좋을 테니 참치회는 사 달라고 해.’
진오의 추천으로 작은 바이오 회사에 투자한 지인이 투자 비용을 10배로 불렸다는 내용의 대화.
그 대화를 보혜와 진오는 뜬금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했다고 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