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병원이 없는 섬마을이었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보혜를 마주치게 하지 않기 위해 지한과 해주는 진섭을 마을 회관으로 옮겼다.
근처 교회의 도움을 받았고, 덕분에 해주는 진섭의 곁에 있으며 젖은 수건으로 피를 닦아 주고, 연고를 발라 주고, 이불을 덮어 줄 수 있었다.
진섭은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입술이 터지고 광대뼈에 피멍이 크게 들었지만, 먹지 못해 기력을 잃었을 뿐 쓰러졌던 건 아니었다고 진섭은 메시지로 말을 전했다.
지한은 납치 사건 신고를 받고서 신속히 섬까지 온 두 명의 해양 경찰을 상대했다.
납치범은 안보혜. 10년 전 집을 나간 피해자의 서류상 아내로, 4억 원을 요구한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를 폭행한 범인은 아마도 박진오. 안보혜의 동거남으로, 집을 나간 안보혜를 찾아 섬까지 쫓아왔다.
경찰은 그 사실을 쉽게 믿었다. 지한이 모든 통화 내용이 녹음되어 있는 해주의 핸드폰을 증거물로 내밀었기에.
경찰들은 우선 날이 밝는 걸 기다리자고 했다.
내일 아침까지 선착장에 그들이 나타나지 않거나, 그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추가 인력을 투입해 찾을 것이라고 경찰들은 말했다.
납치됐던 사람도 찾았고, 또 고작 폭행 사건으로 이 저녁에 사람을 둘이나 찾아야 한다고 하니 좀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해주는 안심했다.
이제 뒷일은 경찰에게 맡기고, 해주는 이틀간 굶었을 아빠를 챙겨야 했다.
그녀는 갑자기 얻게 된 것치고 꽤 소담하게 차려진 밥상을 들고 진섭이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아빠 밥 먹어.”
“…….”
해주는 아빠가 안 먹겠다고 거부하면 억지로라도 먹이려고 했는데 다행히 진섭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안 먹으면 억지로 먹이려고 했는데 잘 생각했어. 내 기운 더 빼지 마.”
진섭은 숟가락을 들어 밥을 펐다. 숟가락 삼분의 일도 차지 않은 양에 해주는 그에게서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팍팍 퍼먹어.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진섭은 순순히 해주가 밥을 퍼서 쥐여 준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빈속에 갑자기 먹으면 체하니까 꼭꼭 씹어 먹고.”
해주는 제 말대로 밥을 천천히 씹는 진섭을 보다가 울컥 참았던 화를 냈다.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엄마를 따라가면 어떡해? 아빠가 제대로 못 걷는 거지 팔을 못 써? 충분히 제지하려면 제지할 수 있었잖아.”
“…….”
“아직도 엄마 못 잊어서 그랬어? 아니면 내 소식 듣고 충격받아서 그랬어? ……엄마한테 얘기 들었지? 내 결혼 얘기…….”
잔소리를 잇던 해주는 한층 수그러진 목소리로 진섭에게 물었다.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해주를 볼 낯이 없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빠가 왜 고개를 숙여? 결혼한 거 말 안 한 건 내 탓인데.”
“…….”
진섭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진섭의 모습에 해주는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자신이 지한과 결혼한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걸.
엄마가 계약서를 보았으니 말했겠지. 해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아빠 때문에 결혼한 거 아니야. 나 몰라? 싫은 건 절대 안 해. 내가 원해서 한 결혼이야. 그러니 아빠는 잘못한 거 없어.”
그리고 해주는 잠시 망설였다. 아빠에게 말을 하기엔 너무 개인적인 감정이라서.
하지만 제 얘기로 아빠가 죄책감을 덜기 바라며, 해주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뱉었다.
“좋아해서. 잠깐이라도 같이 살아 보고 싶어서 한 거니까 2년 전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죄책감 느끼지 마.”
“…….”
해주가 말하는 동안 진섭은 천천히 멈추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갔다.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진 않았지만, 해주를 걱정시킨 게 미안해 더 열심히 밥그릇을 비워 나갔다.
실은 살고 싶지 않았다. 해주에게 짐덩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났으니, 만약 그녀가 위험한 짓을 하려 한다면 미련 없이 그녀 손에 죽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보혜가 만난다는 남자가 방으로 들이닥쳐 다짜고짜 폭행할 때도 맞아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보혜가 그 남자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밖으로 나갔을 땐 이대로 보혜가 돌아오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해 아사하더라도 그냥,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해주가 놀란 얼굴로 방 안에 뛰어 들어온 순간, 그 생각들은 다 부질없어졌다.
언제 죽으려 했냐는 듯 한순간 안심이 됐다. 꾹꾹 눌러뒀던 서러움이 울컥 솟았고, 안도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근데 결혼하니까 아빠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더라. 웨딩드레스 보러 간 날, 결혼식 날. 아빠가 같이 봐 주면 좋았을 텐데. 아빠 손잡고 들어갔으면 많이 떨리지 않았을 텐데. 혼주석에 아빠가 있어야 든든했을 텐데. 그런 생각 나서 진짜 외로웠어.”
진섭은 해주를 바라봤다.
이렇게 볼품없고 지질한 아빠가 뭐가 좋다고 여기까지 찾으러 와.
해 준 것도 없는 아빠가 뭐가 예쁘다고 결혼식 내내 아빠 생각을 해.
고마워.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 한 날 아빠로 여겨 줘서 고맙다, 해주야.
처음 만났던 열일곱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보혜의 딸이라 더 예뻐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보다 귀하게 여기고 키웠다.
비록 몇 년 못 가 사업이 망하고, 빚까지 지며 해주에게 면목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항상 제가 가진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은 딸이었다.
보혜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커 그 상처를 애써 감추고자 과거만 좇았는데, 그러는 사이 현재의 행복을 잊고 있었다.
진섭이 빤히 해주를 바라보자, 해주도 그를 보았다.
2년 새 푹 늙은 아빠의 얼굴. 해주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얼굴 보는 거 엄청 오랜만인 거 알지? 아빠 동안 얼굴 하나 봐 줄 만했는데 이제 정말 중년 아저씨야.”
“…….”
“다시는 그러지 마. 오늘처럼 없어지면 나 진짜 속 터져 죽어.”
진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말했다.
“미아내…….”
“……뭐?”
해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들려온 말은 부정확한 발음이었다. 하지만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흥분감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해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아빠…… 말한 거야?”
“……미안하다, 해주야.”
이번엔 조금 더 정확한 발음으로 진섭이 사과했다. 그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해주는 벅찬 마음에 진섭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빠 나한테 정말 미안했구나? 꼭 말로 사과하고 싶었구나?”
진섭도 해주를 꼭 껴안았다. 그는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노릇도 못 했는데 걱정까지 끼치고, 마음고생시켜서 미안해. 가까이서 보니 정말 많이 컸네, 우리 딸.”
“그래. 내가 얼마나 많이 컸는데. 나 크는 모습도 못 보고 이게 뭐야!”
해주가 다시 진섭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원망을 담아 말하자, 진섭은 미안함을 담아 해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고맙다, 잘 자라 줘서. 아빠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때, 미닫이 방문이 열렸다. 얼추 일을 해결한 지한이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두 사람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에게 해주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지한 씨, 아빠 말해요! 방금 저랑 대화도 했어요.”
지한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해주의 말에 대꾸하기에 앞서, 그는 진섭을 향해 허리를 조금 굽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지한입니다.”
“아…….”
진섭은 아직 어눌한 발음으로 대답하는 대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2년 전 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지한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는 듯이.
그 마음을 느낀 지한은 진섭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한 걸음,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해주를 보며 말했다.
“내일 경찰 인력 추가 투입된다고 하네요. 선착장에서 밤새 잠복근무한다고 하시니 오래지 않아 해주 씨 어머니와 그 남자 찾을 것 같아요.”
“선착장에서 잠복근무해 주시면 섬 밖으로 도망치긴 힘들겠네요.”
지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리고 해주 씨는 내일 첫 배로 아버님이랑 병원부터 다녀와요. 여기 일은 나한테 맡기고요.”
“아, 그럴게요.”
“또 정보 있으면 전하러 올 테니 아버님이랑 푹 쉬어요.”
“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해주가 지한을 향해 애틋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전하자, 지한도 그녀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짧은 눈 맞춤을 먼저 끝낸 사람은 지한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진섭의 앞에서 해주를 아끼는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지한은 해주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진섭에게 인사했다.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
고개를 정중히 숙인 지한은 두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방문을 닫고 그들에게서 멀어져 주었다.
***
아침이 밝았다. 하늘이 유독 파랗게 예쁜 아침, 방축도의 선착장은 소란스러웠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샅샅이 찾아봤는데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를 않네요. 그래도 주민들이 같이 찾아 주고 계시니 금방 찾을 겁니다.”
대기하고 있던 두 경찰이 새벽에 선착장에 나타나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박진오를 잡았다.
선착장 기둥에 박진오가 차고 있는 수갑 한 쪽을 묶어 두었고, 그 뒤 추가 투입된 경찰들까지 합세해 보혜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 작은 섬에 대체 숨을 곳이 어디에 있는 건지. 외지인은 모를 만한 은밀한 장소를 주민들에게 물어 찾아다녀 봤지만, 방축도로 오는 11시 배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보혜를 찾지 못했다.
주민들은 그런 경찰들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늘 심심할 만큼 조용한 섬마을에 소란스러운 일이 생기자 흥미롭게 구경에 나섰던 주민들은 나중엔 보혜를 찾는 일을 도왔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넵, 저희만 믿으십쇼.”
어젯밤, 혹시라도 보혜를 찾으면 연락을 달라고 지한은 명함을 건넸다. 귀찮아하던 경찰은 명함 속 우상호텔 전무, 직함을 보고 난 뒤로 명함을 한 번, 지한을 한 번 번갈아 확인했다.
슬쩍, 아버지가 혹시…… 하고 묻던 경찰에게 지한은 일부러 우상그룹 회장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찰은 전자에서 호텔로 좌천됐다가, 호텔을 국내 1위 기업으로 키웠다는 내용을 기사에서 봤다며 아는 체하더니 그 후로 훨씬 적극적으로 섬 속에 숨은 두 사람을 찾아다녔었다.
우상 일가, 우상호텔 전무. 노력 없이 가진 걸 웬만하면 권력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가 가진 것들이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해주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니까. 그녀에게 힘이 돼 줄 수 있어서 지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해주 씨.”
-식사 나왔어요. 어디 계세요?
“바로 앞이에요. 금방 들어갈게요.”
다시 전화를 끊은 지한은 같이 옆에 있던 경찰에게 말했다.
“식사하고 오겠습니다. 찾으시면 전화 부탁드립니다.”
“아, 예! 식사 맛있게 하십쇼.”
경찰이 흔쾌히 대답했다. 어젯밤부터 방축도에 함께 있던 경찰 두 명은 이미 지한의 대접으로 이르게 식사를 마친 후였기에.
지한은 걸음을 돌렸다. 그러곤 바로 등 뒤에 있던 식당으로 향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