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맞아, 나 미친 새끼야. 오늘 너 미친 새끼한테 맞아 죽는 거야. 알겠어? 인적 드문 섬이라 너 하나 죽어도 찾을 사람 없어. 알아?”
“내가 네 손에 맞아 죽을 정도로 하찮아 보여? 죽어도 내가 곱게 죽겠니? 너 지옥까지 끌고 가지. 너 죽어도 찾을 사람 없…… 악!”
또 한 번 들려온 악 소리에 해주가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지한이 그녀를 막았다. 해주의 앞으로 팔을 뻗고서 지한은 말했다.
“여기 있어요. 내가 가 볼 테니.”
“하지만…….”
“위험해요. 있어요.”
지한이 먼저 걸음을 움직였고, 해주는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그가 향한 방향으로 조금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무릎까지 자라나 있는 풀숲에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얼굴을 향해 손톱을 세우고 손을 뻗치고 있는 여자.
해주는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봤던 걸까.
가진 게 없어도 늘 우아하고 고고했던 엄마. 그렇기에 다른 엄마들처럼 살갑지 않아도 이해했었다. 엄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으니까. 그런 사람은 평범한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물론 머리가 크고 나선 깨달았다. 엄마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고,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란 걸. 그래서 엄마 노릇도 아내 노릇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는 걸.
하지만 생각만 하고 있던 것과, 평범한 엄마를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 있는 건 느낌이 너무 달랐다.
엄마의 바닥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이지 끝까지 엄마로서 좋은 모습은 하나도 보여 주지 않는 보혜였다.
“근데…… 사람이 둘인데 엄마랑 그 남자면 아빠는?”
거기까지 생각한 해주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빠는 근처에 있나? 아니면 저 남자에게 먼저 맞고 쓰러져 있는 걸까? 풀숲이 우거져 바닥은 보이지 않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통화할 때 아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엄마는 영상 통화로 아빠를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엄마와 같이 있던 건 맞을까?
결국 해주는 엄마에게 물어야 했다.
지한은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도무지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그녀는 지한이 앞서간 곳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해주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정리돼 있었다.
지한이 박진오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제압했고, 보혜는 낯선 사람의 등장에 당황한 채로 서 있었다.
“썅! 뭐야, 안 놔?”
박진오가 발버둥 쳤지만, 키와 체격 모두 월등히 큰 지한을 이기긴 무리였다.
“야, 안보혜! 이 새낀 뭔데? 이거 놓으라고 해. 존나 아파!”
“너 같으면 놓으라고 하겠어? 미친 새끼. 아, 머리 아파. 왜 쥐어뜯고 난리야?”
듣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욕설이 난무하는 대화였다.
지한은 그런 두 사람을 뒤로하고 해주에게 말했다.
“해주 씨. 경찰에 신고해요.”
“네!”
해주가 재빨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 화면을 켜 112를 눌렀고, 통화 버튼도 눌렀다.
그사이 보혜가 옆을 돌아봤다. 박진오가 시끄럽게 떠들고, 저녁이 돼 주위가 어스름해 알아채지 못했는데 시선이 닿은 곳에 해주가 있었다.
“너, 여긴 어떻게……!”
보혜는 해주에게서 다시 시선을 떼고 박진오를 제압하고 있는 지한을 쳐다봤다.
깨닫고 나니 알겠다. 본 적이 있었다. 해주 신혼집에 찾아갔을 때. 그러니까, 해주가 결혼한 남자…….
거기까지 깨달은 보혜는 슬금슬금 걸음을 뒤로 물렀다. 그리고 좀 멀어졌을 때, 이대로 잡히면 돈을 못 받는다는 생각으로 보혜는 있는 힘껏 달렸다.
이곳은 보혜가 태어나고 자란 섬이었고, 지리를 잘 아니 도망가는 데 유리했다.
진섭을 두고 온 곳은 해주가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묵고 있는 민박은 보통 손님을 받지 않고, 횟집이 민박도 한다는 걸 아는 사람만 받고 있기에.
“여기 방축도인데요. 납치, 폭행 사건 있어서요. 방축도에 폐교 하나 있거든요. 거기로 오시면 돼요.”
해주는 그런 보혜를 뛰어서 쫓아갔다. 귀에는 전화기를 댄 채로, 전화를 받은 순경과 통화하면서.
역시 엄마는 방축도에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다. 일단 엄마를 붙잡기만 한다면 모든 일은 해결되니까.
엄마가 아빠의 행방을 말하지 않는대도 경찰이 온다면 말할 수밖에 없겠지.
보혜가 마을 쪽에 다다랐을 때였다.
“하아, 엄마. 그만하자.”
조금 지친 해주가 속도를 늦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보혜도 잠시 뜀박질을 멈추고 힘든 표정을 지으며 짜증스레 말했다.
“넌 꼭 엄마를 이렇게 몰아세워야겠어?”
“아빠 어디 있는지 말해.”
“돈 보내. 그럼 알려 줄 테니까.”
“그놈의 돈, 돈. 지겹지도 않아?”
그때, 보혜가 다시 달렸다. 해주가 뒤늦게 쫓아 봤지만 보혜는 골목길 구석구석으로 숨으며 해주를 따돌렸다.
결국 해주는 어느 집 담벼락을 붙잡고 토할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 숨을 고르던 와중 문득 서글퍼졌다.
엄마가 평범했으면 나도 평범한 삶을 살았을까.
사랑하는 남자와 계약 결혼 같은 거 말고, 진짜 결혼하면서 걱정 없이 사랑했을까?
오늘이 지나면 지한과 정말 이별인데.
우리는 왜 부모가 엉망일까.
해주는 엄마로 인해 평생을 외롭게 살았고, 지한은 아버지 때문에 하지도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얼마간 글썽거리는 눈으로 어두운 골목을 더 돌아보던 해주는 결국 보혜를 찾지 못한 채 다시 지한이 있는 폐교로 돌아가야 했다.
지한은 폐교 운동장에 있었다.
“어떡해요. 엄마, 놓쳤어요. ……그 남자도 도망쳤어요?”
해주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박진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지한이 말했다.
“놔줬어요.”
“네? 왜…….”
“해주 씨 어머니 찾은 곳 말하는 조건이었어요. 어차피 섬이라 어디 멀리 도망가진 못할 테니 우선 거기로 가 봐요. 아버지 계실 테니.”
“아, 네!”
해주는 그제야 안심하며 앞장서는 지한을 뒤따랐다.
이내 도착한 곳은 폐교에서 걸어서 3분 거리. 이미 몇 번이나 지나왔던 선착장 근처 횟집이었다.
민박을 한다는 종이나 안내판이 없어서 외지인 부부가 식사를 하러 왔었는지만 확인했던 곳이었다.
설마 2층에서 민박을 운영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한과 해주가 횟집 출입문을 열었다. 섬에 손님이 없어 이르게 가게를 정리하고 있던 횟집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장사 끝났는데요.”
“여기 중년 부부 묵고 있습니까.”
“응? 중년 부부요?”
횟집 주인은 지한을 훑듯이 쳐다봤다. 그 사람들은 왜 찾냐는 듯이. 이번엔 해주가 나섰다.
“딸이에요.”
“그래요? ……보혜 딸?”
“네, 안보혜 씨 딸이요.”
안경을 치켜올리며 해주를 빤히 보던 횟집 주인이 이내 반색하며 말했다.
“맞네. 얼굴이 보혜 어릴 때랑 똑 닮았네. 이렇게 다 큰 딸이 있었어? 보혜가 아직 젊어 보여서 딸내미가 이렇게 클지 몰랐어.”
“저희 부모님 지금 계세요?”
“글쎄. 그 방으로 가는 계단은 건물 뒤에 따로 만들어 놔서 나갔는지 있는지 모르겠네.”
“아, 그럼 저희가 찾아가 볼게요.”
“으응. 그래, 그래.”
다시 가게를 나선 두 사람은 건물 뒤쪽에 있는 철제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니 바로 문이었다. 해주가 잠겨 있을지 모를 문을 그냥 당겨 보았는데 문이 쑥 열렸다.
해주는 제발 엄마보다 한발 빨랐길 바라며 문을 더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빠!”
해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멍투성이가 된 진섭이 멍하니 바닥에 누워 있었기에.
***
한편, 서울.
“이거 말고 더 있다고?”
불고기 전골집 가장 끝 방이었다.
우상전자 전경우 이사에게 받은 비밀 장부 복사본을 넘겨 본 박인철 검사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게 전부고, 강 전무가 원본까지 싹 다 가지고 있어.”
“뭐, 자료가 충분하면 쉽지. 근데 대단하네.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고. 암튼 재벌들 자리싸움, 재산 싸움 골 때려.”
박 검사가 쯧쯧 혀를 차자 전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강 전무는 그런 타입 아니야. 보기 드물게 사람이 괜찮아. 강 회장 끌어내리려는 것도 회사를 위한 거고.”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와 얽힌 개인감정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전 이사는 그 말까진 굳이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오직 회사 문제로 세상에 터져야 했다. 지한의 개인사가 섞여 있다고 하면 세상은 우상그룹이 아닌 우상 가의 집안싸움에 더 관심을 가질 테니.
회사 일만 놓고 보자면 온전히 강 회장의 잘못이었지만, 집안싸움이 된다면 매정한 아버지와 불효를 저지르는 아들의 구도가 형성되고, 강 회장에게 동정 여론이 생길지 몰랐다.
강 회장은 야비하지만 그만큼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었다. 절 향한 사람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어떻게든 자리를 지키려 들 것이었다.
어렵고 피곤한 싸움이 될 테고, 이미 그 상황을 짐작한 지한도 그걸 막기 위해 모든 일을 전 이사에게 맡긴 것이다.
“청정 구역 전경우가 감싸 줄 정도면 정말 사람 괜찮나 보네.”
“아주 괜찮아. 능력도 있고, 성격도 그렇고. 강 회장 아들이라는 게 안 믿길 만큼 부자가 참 달라.”
전 이사는, 강 회장이 자리에서 내려오면 지한을 차기 회장으로 밀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창 젊은 나이가 좀 걸리지만, 누구보다 성과가 좋다. 그뿐인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고, 주식 보유량도 월등한 데다가 외가 쪽도 탄탄했다.
그 모든 것들을 종합했을 때, 지한은 강 회장 때와는 달리 안정적인 지지를 받으며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난번 보내 준 자료랑 오늘 자료 다시 싹 훑어보고 연락 줄게. 잘 풀리면 좋겠다. 나 우상전자 주식 많이 사 놨는데 자꾸 악재만 계속 터져서 열받던 참이었어.”
박 검사의 말에 전 이사가 피식 웃었다.
“개인감정으로 사건 처리하지 마시고요, 검사님. 아무쪼록 일 잘 풀리게,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걱정 마세요. 자, 한잔하자.”
박 검사가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소주를 채워 주었다.
전 이사는 잔을 들었고, 두 사람은 건배하며 근황 얘기를 이어 갔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