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네? 이제 2시잖아요. 저…… 오늘 꼭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방금 2시 되자마자 문 닫았거든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도와드릴 방법이 없네요.”
해주가 허망한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뒤이어 지한도 차에서 내렸다. 해주가 그의 팔을 붙잡고 울먹였다.
“배 떠났대요. 어떡해요? 내일까지 기다리기엔 아빠 너무 걱정돼요.”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지한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무언가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말했다.
“해주 씨, 일단 차로 가요.”
지한이 핸드폰 화면을 끄며 덧붙여 말했다.
“바로 근처 장자도 선착장 쪽으로 가서 배 빌릴 수 있나 확인해 보죠.”
“아. 아, 네!”
해주는 서둘러 지한을 따랐고, 두 사람은 다시 차에 올랐다.
장자도 선착장까지는 차로 5분 거리. 헛걸음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
“뭐 방축도 가깝긴 한데, 우리도 지금부터 작업해야 하는데.”
장자도 선착장.
지한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선 출항 작업을 하던 어부에게 가 방축도까지 배를 빌려 탈 수 있겠냐는 부탁을 했지만, 어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한이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어 수표 세 장을 꺼내 건넸다.
3백만 원. 기대한 것보다 훨씬 큰 금액에 어부의 표정이 상기됐고, 옆에 있던 어부도 덩달아 눈이 커져서는 말했다.
“간 보는 놈 말고 우리 배 타. 내가 한 장 깎아 줄게.”
“뭔 소리야. 내가 돈 받았는데. 자자, 손님들. 바로 배 띄울 수 있으니까 타요. 장 씨, 나 오늘 작업 안 하고 택시 뛰니까 고생하라고.”
3백만 원을 손에 쥔 어부가 먼저 어선에 올라타고는 지한과 해주를 배에 쉽게 오를 수 있도록 호의도 베풀어 주었다.
이내 밧줄이 풀렸고, 작은 어선은 잔잔한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방축도로 향했다.
“방축도까지 15분이면 가니까 바닷바람 시원하게들 맞으며 가요. 배 멀미는 책임 못 지고.”
어부의 가벼운 농담을 흘려들으며 해주는 배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 어딘가 방축도가 있겠지. 그녀는 그곳에 아빠가 있길 간절히 바랐다.
***
“진섭 씨.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당신 꼴이 이러면 해주 마음은 편하겠냐고.”
“…….”
보혜는 답답함에 조금 전 따끈따끈하게 들여온 상을 뒤집어엎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진섭과 방축도에 온 것은 어제 오후였다.
장자도까지 납치하듯 데려왔고, 방축도로 들어올 때 애먹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진섭은 온순하게 보혜를 따라 배를 탔다.
마을 회관과 교회에서 운영하는 펜션 대신, 식당 위층 집에서 방 한 칸으로 운영하는 민박을 빌렸다. 2층 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좋았는데.
4시쯤 늦은 첫 끼를 먹고자 주인집에 요청해 밥상을 받은 뒤부터 보혜는 본격적으로 속이 터지기 시작했다.
해산물 잔치긴 했지만, 꽤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었는데 진섭이 단 한 숟가락도 밥을 먹지 않는 것이다.
밥만 안 먹었으면 말을 안 하지. 어떤 소통도 전혀 하지 않았다. 보혜가 묻는 말에 짧은 으으, 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필담으로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냥 입에 접착제라도 바른 사람처럼 입 자체를 뻥긋하지 않았다.
보혜는 진섭이 하는 꼴이 짜증스러웠다. 분명 여기까지 순순히 따라왔으면서 왜 이제 와 납치당한 사람처럼 구는지.
“물은 마셔야 할 거 아니야. 당신 입술 완전 가뭄 맞은 밭처럼 쩍쩍 갈라졌다고.”
“…….”
“아, 진짜!”
보혜는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위하는 거야, 아니면 죽고 싶어서 이래?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근데 나 괜한 오해 받게 만들지 말고, 돌아가서 죽으라고.”
진섭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려는 건 그가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보혜가 알던 딸 해주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장기전이 될 수도 있었다. 돈을 받기까지 어쩌면 일주일이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 그때까지 지금처럼 밥 한 숟가락 안 먹다가 큰일이라도 나게 된다면 곤란해진다.
보혜는 해주에게 돈을 받은 후에 베트남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물가 차이가 있으니 해주에게서 받는 돈이면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고, 그곳의 중년 사업가들을 꼬셔 다시 부를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번엔 박진오 그 거머리 없이 혼자 잘 먹고 잘살아 볼 생각이었는데.
윤진섭이 이렇게 협조를 안 하면 안 됐다.
“어떡하면 먹을래? 입으로 먹여 줘? 그럼 먹을래? 아님 잠이라도 자 줄까?”
그때였다. 여태 벽에 기대 축 처져 있던 진섭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것이. 그는 보혜가 뺏어 간 핸드폰 대신 쥐여 주었던 종이와 펜을 들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널 함부로 하지 마.>
그 선한 말에 보혜의 미간이 급격히 좁혀졌다.
“뭘 하지 마. 선비 같은 말 그만해. 당신이 그러니까 망한 거야.”
다시 느릿느릿, 진섭이 글씨를 썼다.
<당신은. 그렇게 악하게 살아서 성공했어? 아니잖아. 돈을 쥐는 건 잠깐이잖아. 결국 제자리걸음이잖아. 전이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아니, 도망자 신세였으니 더 나빠졌지.>
진섭의 말이 맞았다. 지금 보혜에게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박진오. 보혜가 사랑했던 그 남자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젠 그마저 지긋지긋해졌으니까.
나이도 먹었고, 늘 자신만만했던 외모도 한철 피는 꽃 지듯 져 버렸다.
보혜에게 남은 건 이제 악뿐. 그녀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래서 다시 새로 시작하려는 거야. 당신, 사업해 봐서 알잖아. 뭐든 기본 자금이 있어야 하는 거. 나 지금 아무것도 없어서 해주 돈 필요해. 내 목숨 걸어서 낳아 줬는데, 능력 있는 자식 도움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진섭은 바닥에 종이와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제 보혜를 설득하길 포기하며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으로 보혜를 바라봤다.
세월은 참 야속하구나.
아무리 욕심 많고 못됐어도 참 반짝반짝하던 여자였는데.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인품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했다.
웃어도 예쁘지만, 화를 내도 가슴 설레게 하던 보혜는 이제 얼굴에 악독함만이 남았다.
물론 여전히 아름답지만, 전처럼 빛은 나지 않는다. 안쓰럽고, 불쌍할 뿐.
“아, 몰라! 처먹든지 말든지! 협조 따위 필요 없어. 돈 받을 때까지 죽지만 마.”
보혜는 짜증스럽게 소리치며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
배에서 볼 땐 작아 보이던 섬은 도착하니 어디부터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생각보다 넓었다.
우선 사람이 많이 사는 곳부터 가 보기로 했다.
지한이 선착장 한구석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민가 밀집 구역을 묻자, 방축도 어촌계 회관을 따라 왼쪽으로 길을 걸어가면 집들이 쭉 나온다고 했다.
덧붙여 해주의 엄마 행방도 물었다. 50대 초중반 정도에 피부가 하얀 외지인을 보았냐고 물었는데 특별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펜션부터 가 보는 게 좋겠어요. 거기 없으면 한 집씩 문 두들겨 보는 수밖에 없겠고요.”
“네.”
지한과 해주는 걸음을 서둘러 방축도를 돌았다.
가장 처음으로 가 본 펜션에서는 등산객 단체 말고는 손님이 없다고 했다. 한참을 동네를 헤매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봐도 손님을 받은 집은 없다고 했다.
이따금 50대 안보혜를 찾는 두 사람에게 어린 시절 보혜를 기억하며 반갑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모두 최근에 그녀를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애꿎게 산을 타 보기도 하고, 바닷가를 따라 쭉 걷기도 하고, 식당도 한 곳씩 들어가 봤다가 또 왔던 길을 다시 둘러보고.
어느덧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새 체력은 바닥이 났고, 쨍한 파란색이었던 하늘엔 이제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찾았는데 없는 거면 섬에 없나 봐요.”
해주가 허탈해하며 말했다. 아침밥 이후로 밥 한 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터라 그녀의 기운은 눈에 띄게 빠졌다.
지한은 그녀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일단 물 마시면서 숨 좀 돌려요. 잠깐만 기다려요.”
지한이 가까이 보이는 슈퍼로 들어갔다.
물 두 병과, 해주를 위해 초콜릿도 하나 샀다. 계산을 마치고 지한은 슈퍼를 나섰다. 그러다 문득, 그는 다시 걸음을 돌려 슈퍼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여기 마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장소가 있나요?”
“응? 전망대 말이에요? 폐교 하나 있는데 거기 가 봐요. 폐교 옆에 길 하나 있는데 쭉 따라 올라가면 정자 있어요. 그쪽이 마을 둘러보긴 좋아요.”
“감사합니다.”
해주와 지한은 더 어두워지기 전, 서둘러 폐교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악! 이 미친놈아!”
문득 사방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주가 지한을 쳐다봤다.
“엄마 목소리 같아요.”
“이거 안 놔? 놔!”
해주의 말끝에 다시 보혜의 목소리가 딸려 왔다. 그리고 들려온 또 하나의 목소리.
“멀쩡하지도 않은 새끼 데리고 여행까지 온 거 보면 엄청 부잔가 봐? 그런 거물 잡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해주는 미간을 좁혔다.
“이건…… 아빠 목소리는 아니에요. 어, 아침에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 같아요. 엄마랑 같이 사는 남자…….”
해주가 박진오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악! 이 미친 새끼야!”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