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해주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섬 이름에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단서 생각나는 건요?”
“다른 단서는…… 아! 엄마 어린 시절에 학교가 하나 있었다고 했어요. 지금은 폐교했다고 들었던 것 같고요.”
“학교 있었으면 아주 작은 섬은 아니겠네요. 폐교 있는 섬을 먼저 추려 달라고 할게요.”
지한은 핸드폰을 들었다. 또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건 그는 해주가 말한 내용들을 전달하고는 서둘러 달라고 말했다.
이내 지한이 전화를 끊자, 해주가 말했다.
“왠지 그 섬에 있을 것 같아요. 숨으려 해도 지리적으로 잘 알아야 하잖아요. 섬이고, 사람이 잘 안 다니고, 엄마 고향이니까 맞을 것 같아요.”
“촉이 설 땐 따라가 보는 편이 좋죠. 그럼 일단 군산 쪽으로 출발합시다.”
***
폭풍 같은 하루의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수놓아진 오후 6시. 지한과 해주는 어느덧 군산에 도착했다.
아직 심부름업체에서 폐교가 있는 섬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진 못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선 섬들로 가는 배가 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착장을 코앞에 두었을 때,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장 실장님’이라는 이름이 액정 화면에 떴고, 지한은 통화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말씀하신 곳 해진도인 것 같습니다. 한데 알아보니 오늘 그쪽으로 배는 안 떴다고 하네요.
“그렇습니까.”
-아직 다른 정보 들어온 건 없어서, 신속히 찾아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지한이 전화를 끊었다.
“일단 식사하는 게 어때요.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아빠 걱정돼서 아무것도 안 넘어갈 것 같아요.”
“죽이라도 먹어요. 오늘 못 찾으면 내일, 모레까지도 찾아야 할 수 있을 텐데 체력 부족하면 힘들어져요.”
지한의 말이 맞다. 당장 아무런 단서가 없어 찾을 수도 없는데 체력만 축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한 씨는요. 서울 올라가 봐야 하잖아요.”
“며칠 자리 비우는 것쯤은 상관없어요. 같이 있어 줄게요.”
“하지만…….”
해주가 미안한 얼굴로 지한을 쳐다봤다. 그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 일보다 해주 씨 일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 지금은 내 걱정 말고 해주 씨만 생각해요. 단서 찾을 때까지 인근 호텔에서 기다리다가 연락 오면 찾으러 가죠.”
지한에게 회사 따위 후순위로 밀린 지 오래였다.
회사보다 해주가 중요했고, 아버지의 추악함을 알게 된 뒤로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대한 미련보단 아버지를 모든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더 중요해졌다.
이번에 알게 된 진실들로 그는 깨달았으니까.
어릴 땐 자상했던 아버지가 변한 이유를. 아버지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우상전자 대표 자리를 가져 본다고 해도 자신은 아버지를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걸.
아버지는 원래 악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 옛날엔 어린 지한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기에 겉으로만 자상한 아버지인 척했던 것일 테지.
그러니 이제 회사 따위 미련이 없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훨씬 중요했다.
“고마워요.”
해주는 지한의 말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아빠가 걱정돼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잘 수도 없겠지만 또렷한 정신이어야 어떤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한과 해주는 바닷가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로 향했다.
오래전 유행했던 꽃무늬 벽지가 누렇게 바래 있었고, 싸구려 침대는 매트리스 스프링이 느껴질 만큼 주저앉아서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아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춘 곳이었다.
텔레비전이 있고, 창가엔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2인용 테이블이 있었으며 공짜 물과 음료가 들어 있는 냉장고도 있었다.
해주는 지한과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오는 길에 있던 횟집에서 포장해 온 전복죽 뚜껑을 열어 주는 지한을 보며 말했다.
“내 일 때문에 지한 씨도 힘드네요. 이런 모텔에서 지내 본 적 없을 텐데요.”
“WS호텔 키울 때 국내 해외 할 것 없이 호텔 참 많이 다녔어요. 그때 가끔 일정이 꼬여서 12명이 자는 숙소에서도 자 본 적 있으니 걱정 말고 먹어요.”
지한은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제가 먼저 먹어야 해주도 몇 숟가락이나마 뜰 것 같아서.
그를 따라 해주도 죽을 떠먹기 시작했고, 조용한 식사가 시작됐다.
죽 그릇을 비우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지한은 해주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섣불리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해주를 혼자 두지 않고,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조금은 안심된다고 생각할 때였다.
“오늘, 같이 자도 돼요? 아, 그…… 자자는 건 아니고요.”
해주가 물었다. 불안함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틈틈이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빠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영영 다신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인정한 진짜 가족. 그래서 더 애틋한 아빠이기에 해주는 진섭을 잃는 게 너무 두려웠다.
지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오늘 밤, 잠을 이룰 수 없을 게 분명했다.
2년 전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며 관계가 애매해졌지만, 지금은 오직 그만이 지금 해주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었다.
해주는 잠을 자야 했다. 그래야 아빠를 찾는 데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그래요. 같이 자요. 내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고마워요.”
죽 그릇을 정리한 뒤엔 가볍게 씻고 한 침대에 누웠다.
해주는 지한의 품에 숨었고, 지한은 그녀를 지켜 주듯 감싸 안았다.
얼마간 허름한 모텔방 안에 고요가 흘렀다.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 서로의 체온만 느끼고 있던 때였다.
누런 벽지의 꽃무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해주가 말했다.
“가끔 궁금해요.”
혼잣말인 듯 아닌 듯 고요한 목소리에 지한은 그녀를 품에서 살짝 놓아주며 물었다.
“뭐가 궁금해요?”
해주가 고개를 들었고, 지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아니면 잔악무도하게 사람을 죽인 살인마인가? 그래서 이렇게 불행한 일만 줄줄이 생기는 건가, 하고요.”
“해주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잘못된 일에 우연히 말려든 것뿐이에요. 하필 내 집에서 일해서.”
지한이 죄책감 짙은 목소리로 말하자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을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태어날 때부터요. 저희 엄마, 저 가진 게 너무 싫었었대요. 외모 망쳐, 몸매 망쳐. 지우고 싶었는데 얼굴 모르는 제 친아빠한테 돈 뜯어내려고 꾸역꾸역 낳았었대요.”
거기부터였다. 해주가 불행한 운명이었던 건.
“아빠가 현금 부자? 뭐 그런 거였나 봐요. 그래서 낳은 애 책임지면 정착하려고 했는데, 딱 한 번 목돈 쥐여 주고는 조건 맞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깽판 치고 싶었는데 집요한 엄마 성격 알고 영국까지 날아가서 못 했대요.”
해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돈벌이 수단이 됐고, 친아빠의 외면을 받았다. 이미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 없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차라리 버리지. 낳아 보니 본인 얼굴 닮았다고 또 꾸역꾸역 키웠어요. 고아원에서 컸으면 더 잘 컸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해주 씨는 워낙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니까.”
지한의 공감에 해주는 옅게 미소 지었다.
“지금 곁에 지한 씨가 있어 줘서 다행이에요. 혼자였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울기만 했을 거예요. 나약하게 우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말이에요.”
“아버지 찾을 때까지 끝까지 같이할게요. 아버지 찾으면 서울로 같이 올라가요. 서울에서 행복해지면 돼요. 아무 걱정 없이, 무탈하게.”
“제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요. 힘들었던 것 다 보상해서 행복하게 해 줄게요.”
해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보상해 줄 필요 없고, 부담 가질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강 회장이 저지른 짓으로 저보단 아빠가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아무리 지한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잘못한 것일지라도, 그녀가 아빠를 대신해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해주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가장 큰 불행은 사랑하는 남자를 눈앞에 두고도 멀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란 것 역시 표현하지 못한 채, 마음 깊숙한 곳으로 꾹 눌러 담았다.
“이혼하면 할아버님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해요? 충격받으실 것 같은데……. 할아버님께만은 비밀로 하는 건, 안 되겠죠?”
“그래도 말씀드려야죠. 해주 씨와 이혼해야 아버지가 상속받으려 했던 것들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어서 자요. 내일 잘 버티려면.”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지한 씨도 잘 자요.”
해주는 눈을 감았다. 잠에 빠지려 무던히 노력했다. 혼자였다면 뒤척이다가 결국 날이 새는 광경을 봤을 것 같지만, 따뜻한 지한의 품이라 그런가.
잠이 들 듯 말 듯 하다가 결국 편안하게 느껴지는 지한의 향기를 맡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