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진섭의 표정이 구겨졌다.
[당신, 해주 찾아갔었어?]
“어머, 진섭 씨. 나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내가 재벌 집에 시집간 딸 돈 탐내서 갔겠어? 결혼했는데 친엄마인 나한테 결혼 소식도 안 알린 게 서운해서 찾아갔어.”
보혜는 진섭의 어이없다는 눈빛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내가 갑자기 잠적했지. 근데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었어. 나 군산에서 지냈어. 내 고향. 당신은 몰랐겠지만 해주는 안다고. 근데 한 번 찾아오기를 했어, 뭘 했어? 해주 걘 어릴 때부터 정이 없었어. 엄마가 옆에 있든, 도망을 가든 관심도 없고. 그래서 나도 굳이 돌아가지 않은 거야.”
보혜는 눈썹을 그러모으며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결혼식까지 했으면서 연락 안 한 건 너무했잖아. 평생 한 번뿐인 딸 결혼식에 엄마가 참석 못 했다는 게 말이 돼? 낳아 주고, 거의 스무 살까지 키워 준 은혜도 저버리고.”
“…….”
“처음 들었을 땐 설마 아니겠지, 했었어. 결혼식에 엄마 생각 안 하는 딸이 어디 있겠냐 싶어서. 그래서 당신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그냥 끊어 버리고. 내가 버렸으니까 이제 해주 내 딸 아니라는 소리나 하고.”
보혜의 얘기를 끝까지 들은 진섭은 다시 핸드폰으로 천천히 메시지를 적었다.
[가짜 결혼이라니, 무슨 얘기야?]
보혜는 제 회유가 먹혔다고 생각하며 계약서에서 봤던 내용을 하나씩 떠올렸다.
“갑은 계약 기간 동안 을 가족 부양해야 한다, 위자료 10억 원. 뭐 그런 내용이 있었거든? 아예 밑지는 계약은 아닌가 본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그래 놓고 해주는 이혼 검색하고 있는데, 결혼이 장난이야?”
말하다가 지레 찔린 보혜가 슬쩍 말을 더했다.
“나는 결혼 생활에 충실하진 않았지만 장난으로 하진 않았어. 진섭 씨 파산하고 미안해서 숨은 건 잘못했지만, 언젠가 가정에 돌아오려고 했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어도.”
보혜가 열심히 자기변명을 했지만, 진섭은 그녀의 거짓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을 상기하고 있을 뿐.
병원에 갑자기 경비가 많아졌다. 로비 정문을 빼곤 전부 작동하지 않던 CCTV도 최신형으로 바뀌었고, 심지어 곳곳에 더 추가로 달아 놨다.
그 시기가 해주가 서울에 다녀왔다고 했을 때였다.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집주인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했던 때와 시기가 겹쳤다.
갑과 을. 갑은 그 집주인이었겠지. 제안을 한 것도 그쪽일 테고.
우상 회장 아들이 무슨 연유로 해주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해주가 수락한 이유는 안다.
그 회사 기술 자료를 훔쳤던 일에 대한 죗값을 갚고 싶었겠지. 그러니 결국 해주가 그 계약을 수락한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더 잘 들고 있는 신약. 투약을 받을 때마다 근육에 힘이 생기며, 재활을 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던 걸음걸이가 안정되게 해 주는 그 약도 그 무렵부터 투약했다.
몰래 결혼했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다.
늘 어른스러운 해주는 이번에도 진섭을 미안하게 만들었다.
[해주 인생이야. 해주가 원하는 대로 살게 두자. 우리는 간섭할 자격 없어.]
“뭐? 그냥 두자고? 당신, 아빠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 10년 넘게 아빠 노릇 했으면 자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야?”
“…….”
“괘씸해서 안 되겠어. 재벌이면 다야? 요즘 이혼은 흠 아니라고 해도 아직은 여자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는데, 근데 겨우 10억이 뭐야? 돈이라도 뜯어내자. 해주 인생 편안하게 해 줘야지.”
보혜다운 결론에 진섭은 미간을 좁혔다.
“진섭 씨가 해주 설득해 줘. 그 남자한테서 벗어나고 위자료는 더 받아 내라고. 내 말은 안 들을 것 같아.”
“…….”
“표정 뭔데? 돈 많이 받아서 해주 해외에서 살게 해 주면 좋잖아. 그리고 그런 이상한 제안 하는 쓰레기 말고 좋은 남자한테 시집보낼 수도 있어. 돈만 많아 봐. 재혼 쉽게 하지. 당신,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해주 친딸처럼 키웠을 거 아니야. 아빠 없는 애 친자 입양도 해 줬고, 여태 같이 살고. 해주 잘되길 바라잖아.”
진섭은 씁쓸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적었다.
[넌 여전히 돈 욕심뿐이구나.]
“그런 거 아니야. 해주 이혼하고 재혼하려면 흠이 없어야 하지 않겠어? 든든한 가족 있어야 유리하잖아. 그래서 온 거야. 진섭 씨만 괜찮다면 우리 살림 합치자. 아, 그래. 요양병원도 그냥 가지 마. 내가 간호해 줄게. 그동안 당신에게 미안했던 거 그렇게 갚을게.”
진섭은 보혜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렇게 말을 길고 빠르게 하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늘 부드럽고 우아한 말투로 사람을 달래듯 말을 했었다.
가끔 지금처럼 말을 할 때가 있긴 했는데, 목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순간들이었다.
어디에 어떻게 쓸 건지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했는데 진섭은 늘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주며 목돈을 건넸었다.
여전하구나. 네 배 아파 낳은 자식보다도 돈이 중요한 여자인 거.
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거야. 해주가 2년 동안 그 남자에게 얼마나 죄책감을 갖고 살았는데.
해주의 아빠가 된 거, 난 너 때문이었어, 보혜야.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당신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서 해주 아빠가 돼 주었던 거야.
네가 떠나가고서도 계속 해주 아빠 노릇을 해 주었던 것도, 널 다시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컸어.
그런 자격 없는 날 해주는 정말 아빠처럼 생각해 주었고, 희생해 주었지.
보혜야, 넌 몰라. 여태 내가 아빠 노릇을 해 준 게 아니라, 해주가 딸로 곁에 있어 주는 거란 걸.
날 위해 해주가 얼마나 희생을 했고, 그 때문에 내가 갚아야 할 빚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해주 곁엔 네가 있으면 안 돼. 그때나 지금이나.
10억 원이면 충분해. 계약 결혼이든, 진짜 결혼이든 이혼 후 받는 그 돈이면 해주는 여태까지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어.
나약한 아빠와 욕심 많은 엄마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진섭이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다시금 보혜에게 메시지를 썼다.
[그만해. 계속 해주 돈 탐내면 나 당신 신고할 거야.]
“뭐? 신고?”
[그래.]
“뭐로 신고할 건데?”
[혼인 빙자, 사기. 더 찾아볼게. 뭐든 찾아서 당신 해주 곁에 못 가도록 할 거야.]
“하, 웃긴다. 신고를 하겠다고. 당신이 나를?”
보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돌변하며 싹 표정을 굳혔다.
“당신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는 좋게 얘기 못 하지. 협조하기 싫으면 하지 마. 당신이 해주 설득 못 하겠다면 당신 몸값으로 뜯어내면 그만이니까.”
보혜가 시동을 걸었다. 진섭이 다급히 조수석 문을 열었지만, 차가 빠르게 출발하며 문이 잠긴 상태였다.
보혜는 속도를 계속 높이며 말했다.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 나한테서 도망쳐 봐. 아, 안전벨트는 안 풀릴 거야. 내가 손 좀 봐 뒀거든.”
진섭이 서둘러 핸드폰을 만졌다. 메시지 창 위에서 두 번째, 해주의 이름을 눌러 메시지를 급히 보내려는데 보혜가 끽, 차를 세웠다.
“이리 내!”
보혜에게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 노력하던 진섭은 안전벨트가 말을 듣지 않는 통에 결국 핸드폰을 보혜에게 넘기고야 말았다.
[해주야 미안.]
해주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내용을 적으려고 했지만, 채 완성하지 못한 메시지를 겨우 전송한 채로.
***
지한이 햇빛요양병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주가 울먹이며 전화를 해 왔고,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회의를 중단하고 곧장 윤을 통해 광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광주에서부터 해남까지. 과속까지 해 가며 달려온 그는 어디로 가야 아빠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초조하게 병원만 지키고 있던 해주에게 도착했다.
“차량 번호로 찾는 중이니까 금방 찾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몇 번을 전화해 봐도 신호음만 길게 들릴 뿐인 아빠의 핸드폰에 해주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 실수예요. 해주 씨 어머니 출입을 막는 것뿐 아니라 아버지 외출도 잘 살피라고 했어야 했는데.”
“엄마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거고, 아빠가 멋대로 따라간 거예요. 이게 어떻게 지한 씨 잘못이에요.”
해주는 후회 가득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잘못이기도 해요. 어제 출발해야 했어요. 바보처럼 굼뜨게 행동해서 엄마보다 한발 늦었어요. 그냥 엄마 핸드폰 번호 받아 놓을걸. 후회돼요.”
애써 차분하게 말하던 해주의 머릿속에 다시금 의미심장한 아빠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주야. 미안.’
포커페이스는 금세 무너졌다. 한순간 해주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어쩌죠?”
“그럴 일 없어요. 내가 빨리 찾을게요. 아무 일 없게.”
지한은 해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진정할 수 있게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곤 물었다.
“우선 인근 저수지와 그간 해주 씨 어머니 살았던 군산 쪽에 사람 보내 달라고 했으니, 거기 말고 다른 곳. 두 분 갈 만한 곳, 짐작 가는 데 있어요?”
“갈 만한 곳…… 모르겠어요. 서울에 살던 집은 이미 사람 들어와 살고, 공장 건물엔 다른 공장 들어와 있는 걸로 알아요. 거기 갔을까요?”
“주소 알려 줘요. 혹시 모르니 가 보라고 할게요.”
해주는 기억을 되짚어 집 주소와 공장 건물 주소를 차례로 불러 주었다.
지한이 곧장 심부름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그가 해주가 말한 장소들을 토대로 주변을 찾아봐 달라고 말하는 동안, 해주는 또 갈 만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계속해서 생각했다.
어디지, 어딜까. 묘하게 어딘가 생각날 듯 말 듯 했다.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을 동시에 생각하며 장소를 떠올리던 그때였다.
“아. 한 군데 더요!”
번뜩, 해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엄마가 태어난 곳이 섬이거든요. 군산 쪽에 붙어 있는 섬이라고 했어요. 10년도 더 전에 들었던 얘기라 정확한 이름이 기억 안 나네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