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지한이 해주를 일으켰고, 여전히 힘이 빠져 있는 해주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잠시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입을 먼저 연 사람은 지한이었다.
“오늘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법원은 쉬고 내일 가는 게 어때요?”
“아, 그거요, 내일 말고 모레로 미룰 수 있을까요? 저 아빠한테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남해에 다녀온다는 말이에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아빠 찾아갈 것 같아요. 만나서 좋을 게 없거든요. 못 만나게 막아야 해요.”
“병원 측과 경호원한테 말해 놓을게요. 어머니 병원 출입 막으라고. 남해까진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엄마 막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평일인데 일하셔야죠. 혼자 다녀올게요.”
해주의 거절에 지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같이 가면 불편할 수도 있겠네요. 알겠어요. 다녀와요. 법원 가는 건 편한 날로 다시 잡도록 해요.”
지한은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해주의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있게 된 것이기에.
그러니 걱정되고 답답해도 해주가 하는 대로 두고 볼 수밖에.
“짐은 오늘 뺄게요. 오늘 이사하기로 했으니 계약해 주신 아파트로 옮길게요. 캐리어 두 개라 금방 옮겨요.”
문득 해주가 말했고,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며칠 더 있어요. 내일 남해 갈 거면 새벽같이 움직여야 하잖아요. 흑석동까지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사하려면 몸 피곤해요.”
“하지만 언제까지 호텔에 계실 수도 없잖아요.”
“호텔 편해요. 그러니 마음 편히 있다가 아버지한테 다녀와요. 이사 날짜는 그 후에 다시 잡고요.”
지한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대신 다녀오고 연락 한 번 해 줄 수 있어요? 먼 길이라 걱정될 것 같은데.”
“그럴게요. 연락드릴게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지한은 그제야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 볼게요. 쉬어요.”
“네. ……조심히 가세요.”
지한이 현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해주는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로를 많이 그리워했지만, 두 사람은 끝끝내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서글픈 운명이었다.
***
새벽녘. 햇빛요양병원 정문.
보혜가 흰색 소형 세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정문을 지키고 있는 보안 요원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병원은 구린데 뭔 경비들이 있어?”
오랜 도망자 생활을 했다. 그 속에서 기른 촉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박진오’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사랑’이라고 저장이 돼 있던 이름이었지만, 돈 때문에 짜증 나게 굴어서 보혜는 최근, 전라북도를 뜨면서 바꿔 버렸다.
그렇다고 헤어진 건 아니기에 보혜는 눈으론 경비를 쳐다보며 전화를 받았다.
“왜.”
-썅! 최 사장 만난다더니 어디로 토꼈냐?
“내가 최 사장 만난 지가 언젠데 이제 지랄이니?”
-작업 치고 있는 줄 알았지! 근데 통장하고 보석 다 싸 들고 갔더라? 어디야?
“내가 왜 그걸 들고 나왔겠어? 근데 어딨는지 말해 주겠니?”
-아, 보혜야. 나랑 백년가약 맺어 놓고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내가 언제 너랑 백년가약을 맺었니? 결혼을 하길 했어, 혼인 신고 하기를 했어.”
-누나아. 나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누나는 무슨. 내가 아니라 도박할 자금줄 없으면 안 되는 거겠지.”
-무슨 소리야. 나 도박 끊었어.
“차라리 도박하는 그 손을 잘랐다고 말하지 그랬어. 그럼 구라 까는 정성 봐서라도 받아 줬을 텐데.”
-야! 좋은 말 할 때 돌아와라.
“내가 말했지. 너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으니까 돈 벌겠다고 깝치면서 도박하고 사업만 하지 말라고. 근데 도박에 몇 번째 꼬라박았어? 난 진창에서 같이 뒹굴긴 싫으니까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전화를 끊어 버린 보혜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박진오. 보혜의 첫사랑이었다. 돈을 사랑하던 보혜가 유일하게 돈보다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요즘에 와 깨달은 건 역시 돈보다 사랑스러운 건 없다는 사실이었다.
보혜는 다시 병원 정문을 바라봤다.
“못 들어가면 나오게 하면 되지.”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그녀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 병원 정문이야. 해주 일로 할 얘기가 있어. 걱정스러운 일이라 꼭 얘기해야 해.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싶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메시지를 전송한 보혜는 이번엔 정문 너머 건물을 바라봤다. 이제 다시 돈줄이 되어 줄 남자, 진섭이 있을 곳을 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진짜 쫄딱 망했구나. 미안하네. 나 때문에 요양도 볼품없는 곳에서 하고.”
진섭은 그래도 지나간 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간간이 떠올리던 사람이었다.
보혜의 인생에 있어 가장 순정파였고, 가장 순진한 남자였으니까.
젊은 시절엔 일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냈던 그는 뒤늦은 첫사랑을 하며 보혜에게 모든 걸 내주었다.
회사가 부도날 정도로 돈을 펑펑 써도 화 한 번 내지 않았고, 더 열심히 벌어 오겠다며 웃었다.
보혜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와 결혼해서 사는 동안에도 진오를 사랑했다.
밖에서 따로 진오를 만나는 걸 그도 아마 알고 있던 것 같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참 순진했고, 바보같이 착했었다.
“망가진 모습 보기 좀 마음 아플 것 같은데, 그래도 곧 다시 부자 될 거야, 진섭 씨.”
보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진섭을 기다리기 위해 의자 시트에 기대 누웠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니까. 돈이 딱 떨어졌을 때 이런 기회가 찾아오다니.”
그녀는 진섭이 여전히 순진하길 바랐다.
그래야 이용하기 쉬울 테니까.
***
해주는 해남을 찾았다.
해남 종합 버스 터미널에서 내린 그녀는 마을버스로 갈아타 햇빛요양병원 앞에서 내렸다.
정오에 가까워진 시간이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달려왔으니 보혜보다 일찍 도착했을 거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해주가 요양병원 정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불현듯 핸드폰에 전화벨이 울려서 확인하니 지한이었다. 해주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네, 지한 씨.”
-해주 씨 어디예요?
“저 이제 막 아빠 병원에 도착했어요.”
-방금 병원 경호원한테 보고받았는데, 방금 해주 씨 아버님이 정문 앞에 대기해 있던 차 타고 병원 나갔다고 하는데요. 운전자가 여자라고 했으니 아마 해주 씨 어머니일 것 같아요.
“네? 잠시만요. 다시, 다시 전화할게요.”
전화를 끊은 해주가 걸음을 서둘렀다.
정문을 지나, 본관으로 들어가 3층으로 향했다. 금세 병실로 도착한 그녀는 문을 열었다.
……분명 출발할 때 오늘 병원에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 놨는데.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라던 그 메시지를 아빠가 읽기도 했었는데.
해주는 망연자실했다.
병원에 간다고 연락하면 얼굴은 안 보여 줘도 늘 침대에 앉아 해주를 기다리던 진섭이 없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을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해주는 진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만 길어질 뿐, 진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 좀 받아. 이번엔 좀 받아 줘, 제발!”
보혜가 진섭에게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웠다. 혹시라도 험한 말을 한다면…….
여전히 잊지 못하는 첫사랑이 몸을 못 쓰게 된 그를 비웃고 비난한다면, 아빠의 마음이 약해져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무서웠다.
해주가 초조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를 때였다.
핸드폰이 짧게 울렸고, 메시지가 연달아 두 개 도착했다.
[하얀색 소형 세단. CCTV로 번호판 확인해 보라고 얘기해 놨어요. 번호 확인되는 대로 쫓을 테니 너무 걱정 말아요.]
하나는 지한의 메시지. 그리고 또 하나는…….
[해주야 미안.]
어딘가 끝맺음을 하지 못한 듯한, 해남에 내려와 처음으로 아빠가 보낸 메시지였다.
***
10분 전.
목발을 짚고 보혜의 차까지 온 진섭은 조수석에 올랐다. 담담한 마음으로 왔지만 단번에, 그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보혜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이 꼭 꿈같았다. 그리운 그녀를 보았던 곳은 늘 꿈이었으니까.
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만 뻐끔대다가 무기력하게 다시 입을 닫았다.
보혜는 말 못 하는 진섭을 훑었다. 세월을 맞고, 아파서 핼쑥해진 탓에 좀 늙었지만, 그때 그 얼굴이 많이 남아 있었다.
보혜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보자마자 그리웠다는 얼굴이 아니라 원망스러운 얼굴을 해야지.”
“…….”
“꼴은 이게 뭐야? 보란 듯이 잘살고 있을 것이지 왜 만신창이가 됐어?”
그녀는 눈썹을 그러모았다.
“여기 90년대 병원 같아. 한때 번듯했던 기업 사장님이 이런 후진 병원에 있는 게 말이 돼?”
진섭은 으, 으. 하고 입 소리를 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보혜는 무시하고 말했다.
“서울 쪽에 나 아는 요양원 있어. 좀 비싸긴 한데 시설 정말 좋고 쾌적해서 병도 금방 나을 거야.”
진섭은 보혜의 말에 고개를 젓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메모장에 무어라 쓰기 시작했다.
[해주 일은 뭔데? 걱정스러운 일이라며.]
보혜는 진섭이 내민 핸드폰 속 글자를 읽고는 아아, 하고 말했다.
“아, 그거. 그래, 그걸 말해야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보혜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얼마 전에 내가 해주 결혼했냐고 물었잖아. 당신, 그 기지배 가짜 결혼인 거 알아? 계약 결혼, 그런 걸 했다네. 10억 받고. 진짜야. 집에 찾아갔다가 내 두 눈으로 계약서 똑똑히 봤거든.”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