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해주가 멈칫하자 보혜는 말을 덧붙였다.
“여전히 같이 살고 있을 것 같은데. 너 그 사람 진짜 아빠처럼 따랐잖아. 그렇지?”
아빠 얘기에 해주의 신경이 곤두섰다.
약해져 있는 아빠에게 혹시라도 엄마가 지금 절 찾아왔듯 접근할까 봐.
“아빠한텐 찾아가지 마.”
“흐응, 왜?”
“아빠, 엄마 증오해. 괜히 찾아가서 아빠 감정 상하게 하지 마.”
“그래? 증오한다고?”
보혜가 고개를 기울였다.
“반가워하지 않을까? 다리 못 써, 말도 못 해. 그런 사람 찾아가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보혜의 말에 해주는 놀랐다. 엄마가 그 사실까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해주의 표정을 읽은 보혜가 픽 웃음 지었다.
“김주경, 그 애. 걔가 붙어먹은 늙은이가 정보력이 좋더라고. 암튼 보고 싶네. 사람 참 순하고 바보 같았는데. 여전하니?”
“경고했어. 찾아가기만 해.”
“뭘 경고까지. 네 협박만 들으면 내가 새엄마고 그 사람이 네 친아빠 같다.”
가볍게 웃은 보혜는 말했다.
“그래, 좋아. 너 하는 거 봐서. 그때 찾아갈지 말지 결정할게.”
보혜는 웃는 낯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도 유유한 몸짓에 해주는 보혜가 테이블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녀를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보혜가 허리를 굽혀 커피 테이블 위, 화면이 켜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방금 해주가 합의 이혼 과정을 검색하고 있었던.
“네 핸드폰 번호 저장부터…… 합의 이혼 과정? 뭐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걸 검색하니?”
“내놔!”
해주가 거칠게 뺏어 들자 보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남편 바람피웠니? 그래서 그런 거 검색했어?”
“그만하고 나가! 좋은 말 할 때.”
보혜는 혀를 쯧쯧 찼다.
“재벌 집에 시집왔으면 네 남편이 새살림 차려도 버텨야지. 검색 기록 삭제해. 네 남편이 보고 너 내쫓기 전에.”
“대체 여긴 무슨 낯으로 온 거야?”
“얘가. 내가 못 올 데 온 것처럼. 딸 집에 무슨 낯으로 왔겠니? 낳아 준 값 받으러 왔지.”
“뭐? 낳아 준 값?”
해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보혜는 뻔뻔하게 말했다.
“생각해 봐. 나 아니었음 네가 그 얼굴로 태어날 수 있었겠어? 내가 너 백화점 VVIP라운지 데리고 다녔었지? 나 아니었음 네가 그런 경험은 했겠니? 촌스러워서 재벌 집 문턱은 밟았겠어?”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염치없을 수가 있는 건지, 해주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엄마처럼 속물인 줄 알아? 나 그 사람 재벌이라서 좋아한 거 아니고, 그 사람도 내 외모 본 거 아니야. 더 심한 소리 나오기 전에 가.”
“뭐, 그럼 넌 속물 같은 나랑 달리 사랑해서 결혼했니? 사랑해서 결혼한 결과가 이혼이고? 웃겨. 그리고 외모를 안 보긴. 남자는 다 똑같단다.”
그때 문득, 보혜의 눈에 다른 종이 한 장이 더 들어왔다.
핸드폰 아래에 깔려 있던.
‘계약서’ 그 글자에 흥미를 느끼며 보혜가 재빨리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또 뭐야. 결혼 계약서. 갑과 을은 계약일로부터 반드시 결혼…….”
“왜 함부로 봐!”
해주가 뒤늦게 계약서를 낚아챘지만 이미 늦었다.
“결혼 계약? ……뭐야? 이 이상한 서류는.”
“아무것도 아니야.”
“갑, 을. 가족 부양, 10억 원. 뭐 그런 얘기가 있던데?”
“그런 얘기 없었어.”
“아니라면서 눈은 왜 피해?”
보혜는 계약서를 등 뒤로 숨기는 해주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참나. 무슨 드라마 찍니? 그러니까, 진짜 결혼한 거 아니고 재벌들 유치한 장단에 맞춰 주고 있던 거야? 돈 받고서?”
보혜는 쯧, 혀를 찼다.
“어릴 땐 고고한 척 다 하더니 피는 못 속이네. 아니지, 넌 나보다 더한다. 난 돈 받고 가짜 결혼은 안 했어.”
“아니라고. 엄마야말로 소설 쓰지 마. 당장 안 나가면 무단 침입죄로 신고할 거야!”
그런 게 무섭겠냐는 듯, 보혜는 비웃듯 웃으며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서류가 떡하니 있는데 발뺌은. 번호 찍어. 문자로 계좌 보낼 테니까 일단 천만 원만 보내.”
“뭐?”
“10억 원이나 받는데 당연히 나눠 써야지. 너 버리고 간 미안함도 있으니까 열아홉까지 키워 준 비용은 안 받을게. 딱 3분의 1만 나눠.”
“나 신고한다는 거 말로만 하는 협박 아니야.”
“신고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고. 뭐 하니? 번호 찍으라니까.”
엄마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뻔뻔했다. 끝끝내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기에 해주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정말 경찰서에 신고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을 때였다.
“진섭 씨는 아니? 너 결혼 가짜인 거.”
해주가 멈칫했다. 그러다 잠깐의 갈등 끝에 그녀는 거짓말을 택했다.
“알아…….”
모른다고 하면 사실을 알린다고 협박할 것 같아서.
“모르네. 또 눈 피했어, 너. 거짓말할 때 그렇게 포커페이스 하라고 가르쳤는데 이 나이 먹고도 여전해.”
보혜는 눈썹을 그러모았다.
“그 순한 남자가 돈 밝히는 네 행실 알면 얼마나 충격받을까. 네 아빠 충격받아도 되겠어?”
“아빠 찾아가기만 해!”
해주가 소리를 지르자 보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다 파탄 내기 싫으면 입금해. 오늘은 갑작스러우니 천만 원만 가져가지만, 다음에 올 때는 3억 준비해 놓으렴. 아니면 네 아빠뿐 아니라 그 발칙한 계약 결혼인지 뭔지 신문사에도 도보할 테니까.”
해주는 어쩔 줄 몰랐다. 왜 계약서를 꺼내 봐 가지곤.
어차피 끝날 관계, 뭐 좋을 게 있다고 지한과의 시간을 떠올리며 계약서를 꺼냈을까.
그때였다.
띠. 띠. 띠. 불현듯 현관에서 도어 록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을 돌아본 해주는 직감적으로 지한임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만 서두를걸.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 왜 쓸데없이 언쟁을 한 건지.
그런 해주를 보며 보혜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신랑 왔나 보네.”
해주가 대답하지 않고 보혜를 노려보는데, 이내 현관문이 열리며 구둣발 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한은 구두를 벗고 거실로 올라왔다.
그의 시선에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해주와 낯선 중년 여자가 들어왔다.
미묘하게 닮은 두 사람의 얼굴. 해주와 중년 여자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하는데, 보혜가 그를 향해 성큼 다가와 손을 뻗었다.
“나 해주 엄마. 반가워요.”
지한은 보혜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해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해주 씨, 괜찮아요?”
“안 괜찮을걸?”
지한의 걱정에 대답한 건 해주가 아니었다. 지한은 곤란한 일이 생긴 듯 입술을 깨무는 해주 대신 당당하게 웃고 있는 보혜를 쳐다봤다.
“나한테 들켰어요. 가짜 결혼. 계약서가 떡하니 있지 뭐야.”
보혜가 우아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들키면 곤란하죠? 우리 딸 난감하게 만들긴 나도 싫어. 많은 거 안 바라요. 해주 계약금 일부 나한테 송금해 주면 이 비밀 죽을 때까지 가져갈게.”
지한은 해주를 보았다. 자책감 가득한 그녀의 표정에 지한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사람 하나 끌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경비분들 올려 보내 주세요.”
해주와 대화를 하기 위해선 우선 불청객을 치워야 할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지한이 보혜에게 말했다.
“주택 단지 내 경비업체, 도보로 5분 이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객을 제외하곤 좀 거칠게 다루는 편인데. 직접 걸어 나가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나 이런 취급당하고 가만있는 성격 아닌데. 내가 둘 비밀 불면 어쩌려고?”
보혜가 당당하게 말했지만, 지한은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비밀 밝혀진다고 뭐 큰일이라도 나려고요. 큰 비밀도 아닙니다. 계약 결혼이었어도 지금은 진짜 사랑하니까요.”
지한이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지금도 기회 드리며 정중하게 대해 드리는 이유, 해주 씨 어머니라서입니다. 단순히 계약 관계면 제가 참을 이유가 없겠죠.”
말은 맺은 그가 눈썹을 까딱였다.
“어쩌시겠습니까. 2분쯤 남았으려나요. 경비원 도착하면 그땐 늦을 텐데요.”
끌려가는 꼴은 절대 당하고 싶지 않았는지, 보혜는 씩씩댔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더니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펜과 은행과 계좌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다시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윤해주. 이틀 내로 입금해. 윤진섭 찾아간다는 거 빈말 아니야. 돈 입금 안 되면 후회할 일 생길 거야.”
보혜는 협박을 남기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곧장 조용해진 거실. 해주는 다리가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지한이 재빨리 부축했다.
“괜찮아요?”
“네…… 죄송해요. 갑자기 찾아와서 들이닥치는 바람에……. 막았어야 했는데 계약서까지 읽게 했어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
지한은 사죄하는 그녀를 바라봤다. 계약서를 무방비하게 들켰다는 노여움은 전혀 없이,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해주 씨한테 했던 짓을 알게 된 후로 계약서는 이미 효력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 괜찮아요.”
“그래도…… 지한 씨 하는 일에 해가 되면 어떡해요.”
“그럴 리 없어요. 둘러댈 말은 많아요. 연애 시절 장난으로 썼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에요.”
지한은 안심하라는 듯 입술을 가볍게 말아 올리곤 말했다.
“일단 앉죠. 앉아서 얘기해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