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매화 그림이 인상적인 일식집, 복도 가장 끝 방의 출입문이 열렸다.
“대낮부터 뭔 술인가.”
테이블에 화려하게 차려진 회와 술병 세 개를 보며 잠시 멈칫하던 전경우 이사가 룸 안으로 들어서며 잔소리했다.
“아, 전 이사님, 오셨습니까. 앉으세요.”
취기가 잔뜩 묻어난 목소리에 전 이사는 불편한 표정을 짓다가 지한의 앞에 마주 앉았다.
“혼자 많이도 마셨군, 그래.”
“좀 마셨습니다. 이사님도 한잔하시죠.”
지한이 정중하게 사케병을 들었다.
전 이사는 오늘 술을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지한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결국 앞에 놓인 도자기 잔을 들었다.
지한이 잔에 술을 채웠고, 전 이사는 단번에 술을 비우며 말했다.
“듣자 하니 요즘 회사 출근도 멋대로 한다던데. 계획은 포기한 겐가?”
지한도 술잔을 비웠다.
“그럴 리가요. 잠시, 버틸 힘을 기르는 겁니다.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요. 저, 너무 달려왔지 않습니까.”
전 이사는 지한의 얼굴에서 씁쓸한 미소를 보았다.
저런 얼굴, 우상전자를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통해 꽤 많이 보았다.
자신이 쌓아 온 것들이 부질없다는 표정.
줄을 잘못 탔다는 이유로 승진이 밀렸거나, 상사에게 거대 프로젝트 공을 빼앗겼을 때 후배들에게서 주로 봤었다.
한데 왜, 잃을 것 없는 강 전무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지.
그의 계획은 곧 실행될 거고, 증거가 많으니 성공할 확률이 높은데 말이다.
아니면 혹, 틀어진 계획이 있는 건가. 전 이사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일, 잘못될 것 같은 건가?”
“아뇨. 잘못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완벽하게 아버지를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 일을 하는 과정들이 힘들어서 그래?”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힘드네요.”
“이해하네. 아무리 그래도 친부 일인데, 당연히 힘들겠지. 조금만 견디게. 강 전무 고생 많았지. 알아. 하지만 지금 해이해지는 건 아닐세.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 가장 힘들다지 않아.”
“그렇죠,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고요. 조언 감사합니다.”
지한이 피식, 웃음 지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새 시작이 아닌 다 끝이었다. 그러니 전 이사의 조언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 한 번 무너졌던 마음. 그때 면역이 생겼으면 좋았겠지만, 지한은 예상컨대 이번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무너질 것 같았다.
어찌어찌 호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버틸 테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아버지를 끌어내리면 인생의 목표가 사라진다. 해주와의 인연이 완전히 끝나고,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할아버지마저 떠난다면 그 후엔 뭘 의지하고 버틸지, 지한은 자신이 없었다.
그때 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이혼하는 걸로 해요. 혹시 내일 볼 수 있어요?]
지한은 잠시 물끄러미 메시지 내용을 곱씹다가 답장을 미뤄 두고 전 이사를 바라봤다.
“다음 주에 있을 주주 총회에 맞춰 자료를 터뜨리려고 합니다.”
“궁금한데, 왜 갑자기 서두르는 겐가?”
“아버지의 추락을 마지막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누구한테?”
지한은 대답 없이 웃음만 짓고는 말했다.
“준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잠에서 깬 해주는 공허한 기분으로 잠시 침대에 앉아 있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마셨고, 우연히도 오늘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한약을 먹었다.
“여사님 못 뵙는 것도 아쉽네.”
토요일이라 오 여사가 출근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남해에 내려가면 라일락카페 사장을 통해 연락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해주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앞으로 지한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샤워를 한 해주는 젖은 머리를 말리다가 거울을 쳐다봤다.
이혼하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지한과 만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해주는 그와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도 서글펐다.
준비를 마치고 해주는 소파에 앉았다.
지한이 도착하기까진 30분이 남았고, 그녀는 어제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지한과의 결혼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지한은 계약 사항들을 전부 지켜 주었다.
아빠를 지켜 줬고, 진실을 밝히고 집을 나간 날 곧장 10억 원을 입금해 주었다. 그뿐인가. 이혼하기로 결정하면 해주의 이름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 한 채를 계약해 주겠다고 했다.
오늘 법원에 가면 얼굴 보는 건 마지막일까? 해주는 핸드폰을 들어 합의 이혼 과정을 검색했다.
“숙려 기간은 한 달…… 한 달 후엔 한 번 더 볼 수 있겠네.”
해주가 검색 결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읽던 그때였다.
딩동.
문득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고 한 시간까진 아직 멀었는데, 지한이 벌써 온 건가 생각하며 해주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멈칫했다.
그가 초인종을 누를 리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 집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녀는 현관 옆 월 패드로 걸음을 옮겼다. 화면을 보니 호리호리한 체격에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를 가지고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있었다.
“누구세요?”
-…….
해주의 말에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
지한을 찾는 손님일까. 해주가 이 집에 사는 걸 아는 사람은 아정뿐이니까.
해주는 낯선 손님에게 지한의 부재를 알리기 위해 직접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윽고 현관문이 활짝 열린 순간이었다.
“누구…….”
해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머, 안이 더 좋네.”
여자가 집 안을 둘러보는 동시에 해주를 고의적으로 밀치며 현관까지 들어왔기에.
해주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뻗어 여자가 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저기요! 왜 함부로 들어오세요?”
여자가 해주를 쳐다봤다. 입매를 둥글게 올린 여자가 팔을 들어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누구냐고? 오랜만에 본다고 못 알아보니?”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새초롬하게 예쁜 얼굴.
그럴 리 없는데, 엄마가 왜…… 해주는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과 변함없는 얼굴이 분명 그녀를 안보혜라고 말하고 있었다.
“엄마……?”
“많이 컸네. 9년 만인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해주는 잠시 굳은 채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며 화를 냈다.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어디긴? 내 딸 집이지. 넌 어떻게 결혼했으면서 엄마한테 알리지도 않니?”
“……누가 그래. 내가 결혼했다고?”
“너랑 같은 학교 다닌 애. 김주경이던가. 왜, 내가 옛날에 속아서 만났던 남자 딸. 내가 걔한테 너 소식 듣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애가 여전히 이상해.”
김주경. 어릴 때도 창피를 당하면 꼭 갚아 주려던 성격이었다. 그게 먹혀들지 않아도 끝까지 복수하려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잠잠하더라니. 나이가 들어 조금은 철이 든 줄 알았는데 뒤에서 헛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대체 엄마는 어떻게 찾은 걸까.
해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보혜가 말했다.
“나도 좀 당황스러웠어. 누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걔가 같이 있는 거 있지? 처음엔 못 알아봤잖아. 너무 변해서.”
보혜는 다시 생각해도 황당했다. 예전 얼굴이 하나도 없는데 다짜고짜 김철우 딸이라지 않나, 다짜고짜 우상에 시집간 해주의 소식을 전하지 않나.
“근데 뭘 했길래 애가 악에 받쳐 있어? 나 찾으려고 늙은이랑 데이트까지 해 줬단다. 그러니 꼭 너 찾아가래.”
해주는 보혜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궁금하니까 그만 나가. 당장!”
보혜는 그런 해주를 비웃듯 손을 들어 해주의 팔을 밀어 치우더니, 유유히 집 안으로 더 들어가려 들었다.
하지만 해주가 당장 따라가며 그 어깨를 붙잡았고, 다시 걸음이 잡힌 보혜의 얼굴엔 잠시 짜증이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얻을 게 많은 딸에게 애써 웃어 보인 보혜가 손을 뻗어 해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올해 스물아홉이지? 완전히 여물었네, 우리 딸.”
보혜는 해주의 얼굴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어릴 때도 절 닮아 예쁘다는 얘기를 듣던 해주는 스물 후반이 되니 여성스러워졌고, 핏줄 어디 안 간다고 남자 꽤나 꼬셨던 자신처럼 관능미도 생겼다.
“기지배. 진작 이랬어 봐. 내가 널 두고 갔겠니? 그렇게 남자 잘 만나야 한다고 교육해 줘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속 터지게 하더니.”
해주는 그런 보혜의 손을 탁, 쳐 냈다.
“뭐 하는 거야?”
“궁금했어. 어떻게 변했을지.”
“여전하네. 거짓말 뻔뻔하게 잘하는 거.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 없잖아?”
“그럴 리가. 외로울 때마다 너 생각났어. 특히 술 마실 때면 더. 취하면 진심이 나오잖니? 아닌 척해도 속으론 아주 보고 싶었단 거지.”
예전부터 특기였다. 감언이설로 사람 마음 허물어지게 하는 거.
자세히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그 말은, 보혜의 외모에 홀렸던 남자들에게 특히 잘 먹혔다.
하지만 통할 사람에게나 해야지. 해주가 코웃음 치려던 때였다.
“진섭 씨도 잘 있지?”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