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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50화 (50/68)

50화.

지한이 해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완성된 고구마순무침을 반찬 통에 담고 있던 오 여사에게 말했다.

“지금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오 여사는 당황한 얼굴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퇴근 시간까지 3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반찬 두어 가지 더 만들고, 좀 전에 돌린 건조기가 다 돌아가면 빨래를 갤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고용인이 가라면 가야 했다.

어쩐지 해주에게 할 얘기가 있어 보이는 지한의 표정에 오 여사는 얼른 대답했다.

“반찬만 넣어 놓고 퇴근할게요.”

오 여사는 서둘러 반찬 통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뒷정리도 내일 하기로 하며 퇴근을 준비했다.

이내 오 여사가 퇴근하고, 집 안에 잠시 정적이 돌았다.

“앉을래요?”

지한이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무슨 할 얘기가 있기에 오 여사를 퇴근시킨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한의 눈치를 보던 해주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할 얘기가 뭐예요?”

해주의 물음에 지한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정말 슬픔에 괴로운 표정인지, 아니면 숙취로 피곤해서 짓는 표정인지 해주로선 알 수 없었다.

“지금 내가 정신이 없어서 말에 두서가 없을 수 있어요.”

“네.”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안하고 듣겠다는 듯.

그럼에도 지한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지한은 말을 망설이듯 입술을 혀로 몇 번 쓸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해주 씨가 결혼식장에서 봤다던 사람 찾았어요.”

“정말요? 남자였어요?”

해주는 반색하며 물었다. 머리가 길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긴가민가했었으니까.

“남자였고, 예전에 착한 대부에서 일하던 거 확인했어요.”

“역시 맞았네요. ……일했던 거면 지금은 그만둔 건가요? 직접, 만나 보신 거예요?”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만나고 왔어요. 대부업체는 그만뒀고, 지금은 개인 밑에서 일하고 있어요.”

“개인 밑에서요? 그럼…… 결혼식장엔 왜 왔을까요? 사채업 하는 게 아니면 이제 저 찾아다닐 일 없을 텐데.”

해주가 찝찝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지한은 그녀에게 티 나지 않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날, 해주 씨 찾으러 온 건 아니었어요. 만날 사람이 있었더라고요.”

“……그래요? 아니, 왜 하필 제 결혼식장에서 누굴 만났을까요. 악연도 인연이라고 그렇게도 마주치네요.”

해주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말했다.

“근데 지한 씨는 그 사람을 어떻게 찾으셨어요?”

“심부름업체, 해주 씨 행방 찾아 준 업체 통해서 금방 위치 파악했어요.”

“그렇구나. 거기 진짜 대단한 곳이네요.”

지한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 해주를 바라봤다.

호의적인 눈빛은 여기까지겠지.

그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을 되짚어 봤다.

처음 가사 도우미로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해맑은 모습, 커피 한 잔과 설탕을 내밀며 피곤한 모습을 걱정해 주던 표정, 어머니 기일에 밤새 간호해 주며 오랜만에 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던 시간.

그리고 다시, 오랜만의 재회에 놀란 표정을 짓던 해주와 그 이후, 다시금 자신을 반하게 만들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떠올린 뒤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그 남자 통해 2년 전 사고, 진짜 배후 찾았어요.”

“네? 2년 전 사고…… 트럭 사고 말하는 거예요?”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해주 씨와 해주 씨 아버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트럭 사고요.”

“배후라니, 착한 대부, 그 사채업자들이 한 짓이잖아요.”

“그들은 명령에 따른 직접적인 가해자고, 지시자는 따로 있어요. 본인이 이용한 사람들 한순간에 다 없애려 했던 인간.”

이용한 사람들이라니. 누가 뭘 이용을 하고, 왜 없애려 했다는 걸까.

사채업자들이 원금 회수를 하기 위해 위험한 협박을 했던 게 아니었나?

해주가 이해하지 못하고 지한을 바라보자 지한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는 욕심이 참 많았어요. 능력이 안 되면서 우상, 그 큰 회사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어 가시는 동안에도 재산 상속을 받아 회사를 키울 생각뿐이었고, 아들인 내게조차 회사 경영권을 넘기는 걸 끔찍이 싫어하셨어요. 특히 우상의 시작이었던 우상전자는 꽉 쥐고 싶어 하셨었죠.”

해주가 눈을 깜빡이며 지한을 쳐다봤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

두 사람은 방금까지 사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버지 얘기라니.

“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좀 안쓰럽게 생각했어요. 우상 선대 회장이셨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참 많이 인색하게 구셨거든요. 그땐 어렸던 내가 보기에도 아버지가 참 안쓰러울 만큼요.”

“지한 씨……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해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한을 보았다.

실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지한은 그런 그녀를 향해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2년 전, 그즈음. 우상전자 내에서 내 영향력이 커졌어요. 능력 없는 아버지를 밀어내기 위해 날 그 자리에 앉히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주주 총회에서도 그 안건이 투표될 예정이었었죠.”

지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번에 알았어요. 아버지가 그 때문에 뒤에서 일을 벌였다는 거. 날 우상전자 상무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려고 사람을 시켜 기술 자료 빼돌리게 했다는 걸.”

지한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이 한 일이 세상에서 영영 묻히도록 해주 부녀와 직접 가담한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고 한 사실. 대부업체 직원 넷 중 둘은 죽고 하나는 아버지의 실수로 살아난 사실.

“트럭 사고 낸 그 남자도, 그날 해주 씨와 아버님하고 같이 죽여서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브레이크를 고장 냈어요. 그런데 그 브레이크가 고장이 잘 안 났었나 봐요.”

그리고 지한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전했다.

“아버지는 해주 씨와 아버님, 그러니까 그 기술 자료 유출 사건의 가담자가 살아 있는 줄 몰라요. 그 남자가 돈을 받지 못할까 봐 가까운 응급실에서 막 사망한 중년 남성 신상 정보를 캐내서 아버지한테 넘긴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그랬구나…….”

해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강 회장이 그 피해자 중 하나가 자신이고, 제가 지한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하필 그 사고를 사주한 게 지한의 아버지라는 걸 불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내가 전부 책임질게요. 아버지 벌받게 하고, 해주 씨 힘들었던 거 어떻게든 보상할게요.”

지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차마 꺼내고 싶지 않은 그 말을 뱉었다.

“이혼하는 게 좋겠죠. 진실을 안 이상 나와의 결혼 생활은 해주 씨에게 힘들 테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해주는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에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 정리할 시간을 좀 주세요.”

***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해주는 멍하니 정원을 바라봤다.

지난번 내린 비가 그친 뒤 날씨는 부쩍 더워졌고, 그만큼 하늘은 아주 쾌청해졌다.

보고 있으면 참 예쁘지만, 해주는 차라리 비가 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맑고 싱그러운 세상이 제 기분과 너무 상반돼 더 억울한 기분이었으니까.

어느덧 닷새째.

아침마다 오 여사는 변함없이 출근했다. 그리고 해주의 눈치를 보면서 집안일을 마치고 퇴근을 했다.

다행히 해주는 오 여사의 방문이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잘 걸지 않았고, 지한의 부재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으니까.

처음엔 출장을 간 거냐고 묻긴 했지만, 생기 없는 표정으로 웃기만 하는 해주를 보며 오 여사는 두 사람의 사이가 어긋난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지한은 집을 비웠다.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던 해주에게 집을 내어 주고 호텔로 갔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혼란함만 커질 뿐이라는 그의 판단이었고, 해주는 멋대로 짐을 싸고 나간 지한을 대부분 이해했고, 이따금 비난했다.

머리로는 안다. 같이 있으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할 거라는 걸. 그러니 지한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걸.

하지만 집을 비워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왜 무작정 사라져 버려선 텅 빈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건지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원망스럽다가도 보고 싶고, 보고 싶다가도 또 원망스럽고.

하루에 수백 번도 바뀌던 마음을 해주는 닷새 만에 한쪽으로 기울였다.

“정리해야지. 할 수 있어. 아빠만 생각하자.”

제게만 일어난 불행이었다면 눈 딱 감고 지한을 선택했겠지만, 해주는 아빠의 두 다리를, 외로운 아빠의 처지를 생각했다.

엄마가 있어도 가족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던 제게 가족의 정을 알려 준 고마운 아빠를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해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 정리를 해야지.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미련도 다 가져가야지.

행복한 순간이 너무 찰나였다. 주었다 도로 뺏어 간 하늘이 원망스럽지만, 안 보면 언젠가는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2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해주는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미르마을에서부터 들고 온 캐리어가 있었다.

고급스러운 저택과 거리가 먼 낡은 캐리어. 그걸 가지고서 옷방 문을 연 해주는 고민했다.

어떤 물건을 어떻게 챙겨야 할까.

지한이 사 준 것들은 그대로 두어야 할지, 이 집에 와서 사게 된 물건들은 챙길지, 아니면 이 집에서 지한과 잠시나마 부부로 살았다는 기억을 떠올리지 않도록 애초에 해남에서 가져온 것들만 도로 가져갈지.

한편으론 제 옷들을 그대로 두면 지한이 저를 떠올리며 괴롭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나보단 덜 힘들어하지 않을까. 내가 더 좋아하니까…….”

어쩌면 금방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일에 몰두하다 보면 지한은 자신이 결혼했었다는 사실도 때때로 잊어버릴지도.

해주는 그렇게 바라며 처음 가져온 짐들 위주로, 소박하게 캐리어를 채웠다.

천천히 하나씩, 그렇게 정리가 얼추 끝나 갈 때였다.

문득 해주는 손으로 목을 매만졌다.

“목걸이는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해주는 목걸이만은 챙기기로 했다.

결혼 예물이 아닌 지한에게 받은 선물. 그가 자신을 생각해서 고른 목걸이 하나만큼은 갖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해주는 옷장에서 발견한 계약서를 손에 들었다.

이대로 버리기엔 마음이 아파 내일 지한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거실 소파로 향했다.

테이블에 계약서를 올려놓고 그녀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지한에게 제 결심을 전하기 위해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이혼하는 걸로 해요. 혹시 내일 볼 수 있어요?]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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