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학규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건 알 거 없어. 쓸데없는 대화는 여기까지다. 이만 돌아가.”
“이학규가 착한 대부에 있을 때 무슨 일을 시키셨던 겁니까.”
강 회장이 더 듣기 싫다는 듯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지한은 잠시 그를 보다가 이내 좀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하나 죽이라고 하셨었죠. 대부업체 측에. 그 일을 이학규가 했던 거고요.”
예상치 못한 말에 다시 강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금세 표정을 지우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 없다.”
“2년 전, 신규 제품 기술 자료 빼 간 것, 그 일 시킨 사람이 아버지인 걸 들킬까 봐 진실을 아는 입을 하나 줄이고 싶으셨겠고요. 사실은 기술 자료를 빼 간 사람이 아닌, 이학규 죽이고 싶어서 트럭에 손쓰셨는데 급브레이크 밟은 이학규가 멀쩡하니 실패하셨네요.”
“…….”
“죄를 왜 이렇게 많이 지셨습니까. 이학규처럼 사람 한 번 죽인 놈이 두 번은 못 죽일까요. 이학규가 아버지를 해하기 전에 제가 우상전자, 아니, 그룹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시게 하려고요. 죽음보다 권력 잃는 걸 두려워하시는 분이시니.”
강 회장이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학규 그 새끼가 날 죽여? 할 줄 아는 거라곤 주먹질뿐인 새끼가 무슨. 돈만 쥐여 주면 다 하는 멍청한 놈들은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지.”
“멍청한 놈일수록 두려움이 없죠.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놈은 아버지 권력도 안 무서울 테고요.”
지한의 말에 강 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은혜도 모르는 자식. 여태 너 하는 짓거리 다 넘어가 줬더니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 게지? 네가 그래서 아직 멀었다는 거다. 고작 작은 계열사에서 썩어 나고 있는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어!”
“글쎄요.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을지 몰라도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이혼하면 주식 상속은 물 건너가겠죠.”
강 회장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지한은 그럴 수 없을 것이라며 비웃듯 말했다.
“그럼 네가 우상전자로 돌아오는 길도 영영 막히는 거다. 그건 또 싫겠지.”
“글쎄요.”
지한은 입매를 가볍게 올리곤 뒤를 돌아섰다.
아들인 자신이 본인처럼 우상에 목을 맬 거라고 확신하시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직접 보여 드리는 수밖에.
방금, 강 회장과의 대화에서 지한은 확신했다. 아버지는 2년 전, 그가 이용한 지한의 주변 사람이 해주인 건 모르는 모양이라고.
그러니 그는 안심하고 아버지를 무너뜨리겠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만 더 성큼 내밀면 쉬운 일이었지만 늘 망설였었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하지만 이젠 아버지이기에 아들인 제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해주에게 사죄할 길은 그뿐이기에.
***
거실 소파에 앉은 해주가 시계를 바라봤다.
새벽 1시. 지한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회사 일이 많이 바쁘신가?”
혼잣말을 나직이 뱉는 해주의 얼굴에 서운함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연락 한 통은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일할 땐 ……그렇게 내 생각이 안 나시나?”
해주는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제 유치함에 놀랐다.
언제는 지한의 일을 다 이해하는 것처럼 굴어 놓고.
아니, 아니다. 연애가 처음이라도 지한의 행동이 너무한 것쯤은 안다.
바쁜 사정을 이해하는 건 이해하는 거고, 오래도록 집에 안 들어와 걱정할 사람한테 연락 한 통 안 하는 게 서운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들어오시면 한마디 해야지.”
해주는 혼잣말로 으름장을 놓곤 이번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언제쯤 오시냐고 먼저 전화를 해 볼까. 설마 이런 새벽 시간에 회의를 하고 있진 않겠지.
그때였다.
띠띠띠-
현관문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태 잠자지 않고 기다린 걸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좋아해 주길 바라며 해주는 현관으로 향했다.
해주가 현관에 도착하던 그때 문이 열렸고, 이내 지한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오셨……!”
해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한이 혼자가 아니었기에.
“해주 씨, 전무님이 좀 취하셨어요.”
지한을 어깨에 메다시피 부축하며 윤이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당황한 해주는 윤을 도와 지한을 부축했다. 윤이 들어올 수 있게 침실 문을 열어 주고, 지한을 침대에 눕힌 뒤 해주는 물었다.
“지한 씨 무슨 일 있어요?”
“모르겠어요. 아침에 회장님 뵙고 오셨고, 그 뒤로 쭉 생각이 많아 보이긴 하셨는데…….”
윤은 고개를 저었다.
“퇴근까지 별말씀 없으셨었는데 집에 있다가 전화 받아서 나가 보니 이미 만취한 상태셨어요.”
“그래요…….”
해주가 고개를 돌려 지한을 바라봤다.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린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데, 왜 만취할 때까지 마신 건지.
강 회장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기에 괴로워하는 건지.
토요일부터 좀 이상하긴 했었다. 데이트를 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고, 일요일엔 즐거운 가운데 문득문득 표정이 어두웠고, 오늘 아침에도 그의 행동은 평소와 달랐다.
걱정스럽게 지한을 바라보던 해주에게 윤이 말했다.
“해주 씨, 저 집에서 할 일이 있어서…… 전무님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럼요. 제가 챙길게요.”
해주의 말에 윤은 그럼 잘 부탁드린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고, 윤을 배웅한 뒤에 해주는 다시 지한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지한의 재킷을 벗겼다. 답답할까 봐 셔츠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어 주었고, 양말도 벗겨 주었다.
술 냄새가 짙었다. 지한의 향수 향과 뒤엉킨 그 냄새가 해주는 안쓰럽게 느껴졌다.
“힘든 일 있으면 나눠 주세요. 혼자 이렇게 힘들어하지 말고요.”
혹시라도 지한이 깰까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 해주가 손을 뻗어 지한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다 서서히 아래로 손을 내렸다.
이마, 눈썹, 눈. 속눈썹까지 조심스럽게 만져 보고선 다시 코와, 인중과 입술을 훑었다.
하나씩 지한을 느껴 본 해주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다. 이렇게 좋아선 어떻게 이혼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지한과 마음을 나누고 몸을 섞을수록 마음의 크기가 배로 뛰는 기분이었다.
이혼은 해야 한다는 지한의 말에 호기롭게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지한과 헤어진 뒤에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어떤 일에도 꺾이지 않는 나름 강한 성격이라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으니 지한과의 이별에선 한없이 약해질 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
“……미안.”
그때였다. 희미하게 들려온 말에 해주가 지한을 바라봤다.
분명 지한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잠꼬대였나 보네.”
해주가 중얼거리는데, 이번엔 지한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무슨 불편한 꿈이라도 꾸는 건가. 해주는 괴로워 보이는 지한의 표정을 풀어 주고자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러 주고, 지한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부드럽게 그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니 다시 조금씩 지한의 표정이 편해지는 게 보였다.
웃지는 않아도 적어도 인상은 찌푸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해주는 생각했다.
같이 지내는 동안은 지한에게 이런 존재가 돼 주어야겠다고.
가진 게 없으니 그의 걱정을 다 덜어 주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가장 편안해야 할 침대에선 그의 미간을 펴 주어야겠다고.
해주는 이만 지한의 침대에서 일어섰다. 마음 같아선 함께 자고 싶었지만, 편안하게 혼자 뒤척이면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었다.
침대로 돌아가기 전, 해주는 지한의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왜 이렇게 술을 마셨는지 물어보면 답해 주셔야 해요.”
내일 아침엔 커피 대신 꿀물 한 잔을 진하게 타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만 그녀도 잘 준비를 시작했다.
***
밤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원에 나무들이 지나치게 물기를 머금었고, 바닥에도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다.
아침 일기 예보에선 비가 내일까지 이어질 것이고, 그치면 초여름 날씨를 예상한다고 했다.
“전무님이 웬일로 못 일어나시네. 술 마신 데다 비가 하도 내리니 몸이 축축 처지시나.”
오늘은 아침 식사를 차리지 않으셔도 된다는 해주의 말에 오 여사가 집 안 정리를 시작하며 말했다.
오 여사의 말대로 지한의 기상이 늦어지고 있었다. 진작 출근할 시간을 넘겼지만, 도무지 일어나질 못했다.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해주가 몇 번 깨우러 들어갔었지만, 불러도 대답이 없을 만큼 그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해주는 오 여사가 아침 대신 먹으라고 갈아 준 사과 당근 주스를 마시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물었다.
“여사님, 숙취에 꿀물 어때요?”
“숙취에? 꿀물 괜찮지. 말 나온 김에 전무님 일어나시면 한 잔 타 드려야겠다.”
“아니에요. 제가 타고 싶어서요. 꿀 얼마나 넣어야 할까요?”
“그래? 뭐, 아내가 타 주는 게 제일 맛있긴 하겠지. 따뜻한 물 한 컵에 꿀 두 숟가락 정도 넣으면 돼.”
“두 숟가락…… 감사합니다.”
“꿀물 한 잔 마시고 끓여 놓은 북엇국도 시원하게 먹으면 전무님 속 다 풀릴 거야.”
그때, 침실 안쪽 화장실에서 쏴, 하고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무님 일어나셨나 보네.”
오 여사의 말에 해주는 침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칠게 물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어느덧 기상한 지한이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물소리가 꺼진 건 15분쯤 뒤.
해주가 주스를 다 마시고 컵을 헹군 뒤, 한약까지 챙겨 먹었을 때였다.
오 여사는 내일 반찬으로 내놓을 고구마순무침을 만들고 있던 때.
검정색 반팔 티셔츠와 검정색 트레이닝 바지. 편안한 옷을 입고서 지한이 나왔다.
“일어났어요?”
어제 만취해 들어왔던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지한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지한에게 다가갔다.
어제 얼마나 취했었는지 눈으로 본 데다가,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회사에 늦게 출근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무엇보다도, 그렇게까지 술을 마셔야만 했던 이유가 뭔지 모르니 걱정됐다.
“괜찮아요?”
해주의 걱정 어린 물음에 지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속 좀 쓰린 것 빼곤 좋아요.”
그리고 곧장 지한은 주방의 오 여사를 돌아봤다.
“여사님, 오늘은 이만 퇴근하세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