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뭐?”
드디어 당황하는 이학규를 보며 지한은 말했다.
“너 그림자라고 불리지? 너한테만 그렇게 부를 것 같아? 내가 본 것만도 셋이고, 지금도 너 말고 많은 그림자들이 그 사람 돈에 움직이고 있을걸?”
“지금 하는 말들 진짜야?”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 똑같은 별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뭐겠어? 필요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갈아 치우기 위해서야. 너와 네 다음, 또 그다음이 누군지 모르게 하려고.”
이학규를 그냥 협박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런 잔혹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을 함부로 쓰고, 버리고, 이용하고, 배신하고.
우상을 손에 꽉 쥐고자 하는 그 욕심은 나이가 들수록 강해져 가고 있었고, 이제는 누구라도 브레이크를 걸어 줘야 했다.
“너 오는 동안 고민 참 많이 했어. 감히 내 아내한테 장난질한 새끼를 어떻게 처리할까. 근데 너보단 그 위를 잡아야겠더라고.”
이학규는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한지태, 김규성. 어쩐지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잠수를 탄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돈 생겼다고 누구보다 좋아하던 두 사람이 돈을 가지고 도망간 것도 아니니 더 의아했다.
하지만 굳이 두 사람을 찾지 않은 건 그 돈을 혼자 펑펑 쓸 수 있으니까.
한데, 죽었다니. 하긴, 그 둘뿐인가. 또 한 사람, 장태림은 두 사람이 사라진 그 비슷한 시기에 식물인간이 돼 2년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저 하늘이 날 불쌍하게 여겨 돈 펑펑 쓸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2년 전 그 사고, 그리고 이번 일. 누군지 말해. 그럼 나머지 1억도 주고, 내가 너 보호해 줄 테니까.”
지한의 말에 이학규가 비딱하게 반박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너 강태규 회장 아들이잖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넌 이번 일에 실패했고, 돈 아까워하는 아버지가 헛돈 들인 걸 알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실패?”
“네가 준비한 한약 내가 빼돌렸거든. 내 아내가 먹는 건 다른 한약이야. 그러니 넌 실패한 거지.”
지한은 오 여사가 빼돌린 한약을 자신이 한 짓이라고 말했다. 이학규가 오 여사에게 앙심을 품을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름만 말하면 되지? ……강태규 회장.”
“확실해? 내 아내한테 몸에 해로운 한약 먹이고, 2년 전 트럭 사고 지시한 사람 강태규 회장인 거?”
지한은 보다 정확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한 짓들이 정확히 녹음기에 담길 수 있도록.
“그래. 한약도, 트럭 사고도 다 강태규 회장 짓이야.”
“그 한약,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애 못 배게 만든다고 했어.”
지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버지다. 아이를 갖지 못하면 재혼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더 실망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시들어 가는 어머니를 내버려 둔 것보다 더 바닥을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대체 아버지의 바닥은 어디까지일까.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질문을 이어 갔다.
“너 얼마 전 내 결혼식장에 왔었지?”
“그래.”
“그날 온 이유는 뭐야?”
“한약방 주소 적힌 쪽지 받으러 갔었어. 사람 많은 곳이니 만나도 의심 안 살 것 같아서 거기서 보자고 했고.”
결혼식 날, 하객을 맞이하다가 아버지가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잠시 자리를 뜬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이학규가 만났던 걸까.
“그럼 DF전자와 아버지 관계도 알아?”
“뭐? DF?”
이학규가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저었다.
“알긴 하는데, 새로운 질문은 1억 더 받아.”
“그러지.”
이학규는 지한을 관찰했다. 혹시 정보만 빼 가고 내빼는 게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지한의 표정은 진지했고, 이런 샌님은 재수 없는 타입이긴 하지만 믿을 수 있기도 했다.
“DF, 착한 대부 사장이 만든 회사야. 내가 듣기로 강 회장한테 투자 받는다고 하던데. 우리끼리 웃긴다는 말 진짜 많이 했지. 전자 회사 회장이 왜 기본도 모르고 만든 DF 따위에 투자를 하냐고.”
이만하면 됐다. 모든 정보는 충분히 들었고, 이학규의 모든 말은 준비해 온 녹음기에 녹음됐을 것이다.
이학규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한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틀 뒤에 통장으로 입금 들어갈 거야.”
DF전자. 해주가 빼돌린 기술 정보를 베껴 그대로 전자 기기를 만든 회사. 그리고 그곳에 투자를 한 아버지.
누군가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짓누르는 것 같았다.
두통을 느끼며 지한은 차로 향했다. 그리고 걸어가는 동안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장부 공개 시일 앞당기려고 합니다. 곧 찾아뵐 테니 비서 통해서 시간 되시는 날 말씀해 주세요.”
이내 전화를 끊은 지한이 차 문을 열었다.
이제 아버지에게 확인 사살을 할 차례였다.
***
검은 세단이 우상그룹 본사 주차장에서 멈춰 섰다.
거칠게 차에서 내린 지한이 곧장 임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꼭대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적당한 속도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우상의 패션과 증권, 투자 그리고 전자 본사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사옥이었다.
그리고 34층.
회장실과 임원 회의실이 있는 곳.
아버지가 있을 건물 꼭대기로 향하는 동안 지한은 몇 번이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확인하지 말까.
2년 전 일까지 아버지가 사주한 걸 밝히는 순간 해주와의 관계는 끝인데.
지금 심정으론 아버지가 발뺌한다면 그냥 그대로 믿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증오하는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
이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지한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회장실로 향했다.
연락하고 오진 않았지만, 오늘은 본사로 출근하는 날이니 강 회장은 급작스럽게 잡힌 회의가 있지 않는 한 회장실에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출근하기로 한 날이 아니더라도 회사에 와 있는 날이 많았다.
강 회장은 누구보다 우상그룹에 집착하고 소유하고자 하니까.
“전무님 오셨습니까.”
회장실 앞 데스크에 앉아 있던 강 회장의 비서 박찬희가 지한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안에 계신가요.”
“예, 한데 방금 중요한 통화를 한다고 하셔서 지금 통화 중…… 전무님!”
박 비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지한이 회장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기에.
강 회장은 워낙 죄를 짓고 살았다. 그래서 문 앞에 경호원 둘을 세워 놨지만, 회장의 아들이기에 지한은 쉽게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박 비서의 말대로 강 회장은 통화 중이었다.
귀에 핸드폰을 대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상대방의 얘기를 듣던 강 회장이 거칠게 전화를 끊은 뒤 지한을 쳐다봤다.
“연락도 없이 여긴 왜 왔어.”
“보아하니 이학규하고 통화하셨나 봐요. 아버지 일 조용히 처리해 주는 그림자 말입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아버진.”
지한의 표정에서 아버지에게 갖는 실망감은 볼 수 없었다. 기대감을 가진 적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
그런 아들을 빤하게 보던 강 회장은 말했다.
“공과 사는 구별해. 아무리 아들이라도 연락 없이 회장실에 방문하는 건 용납 못 해.”
지한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회장실이 뭐 그리 대단한 곳이라고요.”
지한은 넓은 회장실을 바라봤다.
이 큰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오로지 회장실과 임원 회의실뿐이다.
회장실이 처음부터 이렇게 넓었던 건 아니었다. 선대 회장이었던 돌아가신 지한의 할아버지가 이 방의 주인이었을 땐 지금의 4분의 1 정도였으니까.
강태규 회장이 우상 회장이 되고, 이 방을 차지하면서 공간을 넓혔다.
회의 때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건 권위를 잃는 행동이라며 임원 회의실만 두고, 권위를 상징하는 꼭대기 층을 전부 제 공간으로 만들었다.
“궁금하네요. 아버지 욕심이 어디까지인지.”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어.”
“분수에 맞게 욕심을 내셔야죠.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처럼 모든 걸 욕심내지 않아요.”
“그러니 대부분 그리 하찮게 사는 거지.”
강 회장은 혀를 쯧쯧 찼다.
“그림자 그놈이 그러더군. 너하고 한 얘기가 궁금하면 돈 보내라고. 뻔하지. 한약 얘기 나눴겠지. 계집 하나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시간 낭비를 하는지 모르겠다.”
강 회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꼭 결혼 아니더라도 옆에 두는 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다 죽어 가는 노인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고 봤다만, 그 하찮은 애를 내 집안에 들여서 얼마나 창피한 줄 알아?”
강 회장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듯 표정을 굳히며 말을 덧붙였다.
“잘 선택해라. 내가 가진 걸 네가 고스란히 물려받으려면. 내 아버지가 결국 내게 모든 걸 넘겼듯 난 싫어도 아들이라는 이유로 내가 가진 모든 걸 네게 주겠지. 하지만 네가 네 마음대로 인생을 산다면 어림도 없어!”
지한은 강 회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참 많이 늙었다. 주름이 참 많이도 졌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인성이 얼굴에 보인다고 했던가?
강 회장의 얼굴 곳곳에 욕심이 그득그득했다. 처진 눈가에도, 입술을 짓누르듯 내려온 팔자 주름에도.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고 있으니 어릴 때 다정했던 아버지는, 지한이 끝에선 늘 강 회장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던 찰나의 좋은 아버지는 이제 자신이 만든 상상 속 인물 같았다.
강태규는 세상을 떠난 우상 선대 회장이었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발버둥 쳐 왔다.
하지만 그 긴 세월 태규를 하찮은 취급만 하던 아버지는 며느리인 희영에겐 늘 머리가 좋고 현명하다고 치켜세워 주었다.
손자인 지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한이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우상그룹은 네가 이끌어 가야겠다고 틈만 나면 이야기했다.
태규의 앞에서, 태규를 짓밟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을 치켜세웠다.
늘 친부의 인정을 받으려 했던 강태규. 그런 아버지를 알기에 지한은 어느 순간부터 아내와 아들을 질투하기 시작한 아버지를 이해했었다.
어머니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보란 듯이 외면한 걸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우상그룹 회장 자리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왜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그토록 목을 매는 건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 낸 우상전자가 대체 태규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해 보고자 지한은 악착같이 우상전자에 돌아가 대표 자리에 앉아 보려고 했었다.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태규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알게 된 오늘에서야, 지한은 아버지와 자신은 너무도 다른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뉘우칠 사람이 아니다. 제 죄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할 만큼 찌질한 인간이니까.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