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온종일 지한과 해주는 서로를 탐했다.
침실의 두 침대를 오가며 키스하고, 체온을 나눴다.
공간의 열기가 식을 틈 없이 거친 숨소리와 격렬한 몸짓이 이어졌다.
평소보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지한을 버거워하면서도 해주는 꿋꿋이 그를 받아들였다.
지한의 온기와 향기가 좋았으니까. 마주 안고 있으면 느낄 수 있는 그의 모든 것들은 해주에게 완벽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새벽, 지한이 비몽사몽간인 해주를 껴안았다.
“내일은 해주 씨 하고 싶어 했던 데이트해요.”
“네.”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졸린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근데 오늘처럼 집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좋네요. 마음껏 껴안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지한은 더욱 깊숙이 해주를 품에 안았다.
“나도 그래요.”
해주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지한 씨도 얼른 자요. 피곤할 텐데.”
“잘게요. 먼저 자요.”
그새 잠들었는지 해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지한의 품속에서 쌕쌕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해주를 천천히 품에서 놓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준 지한이 침대를 내려갔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후에야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3번 정도 간 뒤 전화가 연결됐다.
“강지한입니다. 지금 메시지 한 통 보냈습니다. 빠르게 사람 좀 찾아봐 주세요.”
해주를 찾았고, 윤을 통해 착한 대부 직원들 사진을 찍어 왔던 능력 좋은 심부름업체였다.
생전에 어머니가 소개해 준 업체. 그래서 더 믿고 이용하는 업체.
이제 그곳을 통해 어머니를 죽인 것과 다름없는 아버지의 정체를 캘 차례였다.
***
일요일엔 삼청동 데이트를 했다.
걷고, 먹고, 또 먹고. 익숙한 길을 연인의 손을 잡고 걸었을 뿐인데 참 행복했다.
해주에겐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만 빼면.
왤까. 문득문득 지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특히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어갔을 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순간 걸려 온 전화에 지한의 표정에는 좀처럼 그에게서 볼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때 지한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연락하면 된다고 하며 데이트에 집중해 주었다.
자신과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 준 게 고마운 한편으로, 해주는 지한이 걱정됐다.
남해 리조트 공사가 원활히 잘되는 것 같더니, 복잡한 일이 생긴 걸까?
아니면 다른 골칫거리가 있나?
설마 호재의 병이 악화된 건 아닐까, 찰나 생각했는데 그 일이라면 지한이 곧장 전화를 받았을 테니 곧 생각에서 지웠다.
“갔다 올게요.”
구두를 신은 지한이 입을 맞추며 현관을 나섰다. 해주는 억지로 웃음 짓는 것처럼 보이는 지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한 씨한테 좋은 일만 생기길 바랄게요.”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물음 대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 주었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먼저 캐묻고 싶지 않았으니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괜히 캐묻다간 그의 심기만 어지럽힐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해주 씨도 오늘 기분 좋게 보내요. 저녁에 봐요.”
지한은 다정한 인사를 남기고서 현관을 나섰다.
해주는 눈앞에서 사라진 지한을 계속 걱정했다.
오늘 지한의 하루가 무탈하길, 그의 앞길에 방해되는 건 모조리 없어지길.
해주는 다시 걸음을 돌렸다. 주방으로 간 그녀는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있는 오 여사에게 다가갔다.
“여사님, 오늘은 커피 드세요?”
오 여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았다.
“아, 응. 마실게요.”
오랜만이었다. 오 여사가 커피를 마시겠다고 말한 건.
그동안 왜 그랬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해주는 구태여 묻지 않고 커피 머신으로 다가갔다.
요즘 비밀이 참 많네. 지한 씨도, 오 여사님도. 궁금한데, 물을 수는 없고.
주방에 가득 찬 진한 원두 냄새를 맡으며 해주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라일락카페 말이에요.”
문득 들려온 말에 해주가 뒤를 돌았다.
“네?”
오 여사가 여전히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 사장 오영란이 내 동생이에요.”
해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그러고 보니 사장님하고 여사님, 성이 같네요.”
“내 동생이 해주 씨 참 아낀다고 하데요.”
“아, 사장님이 그러셨어요?”
“그랬어요.”
오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 외로울 때 해주 씨가 옆에 있어 줘서 웃고 지냈다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오히려 제가 사장님 덕분에 웃고 지냈는데……. 사장님께 바로 안부 전화 드려야겠어요.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해주가 라일락카페 사장을 향해 감동하고 있는데, 오 여사가 말했다.
“미안해요.”
“네? 뭐가…… 요?”
“그냥. 내 동생이 아끼던 사람한테 잘 못해 준 것 같아서.”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나 잘해 주셨는데요. 매일 아침 해 주시는 반찬들도 정성 들여서 해 주시잖아요. 오후에 먹을 것도 늘 신경 써 주시고요.”
“그건 내 일이니까 한 거지. 앞으론 더 신경 써 줄게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밥밖에 없으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말해요. 다 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해주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여태 어색하게 대하셨던 이유가 그래서였던 걸까? 사장님하고 아는 사이라서?
동생 지인인 게 왜 어색해질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주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완성된 따뜻한 커피를 오 여사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그리고 앞으로 말 놓으셨음 좋겠어요.”
“으응? 아니에요.”
“안 그래도 말 높이시는 거 마음 불편했어요. 근데 사장님 언니분이시라니,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아니…….”
“부탁드려요. 여사님이랑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해주가 부탁이란 말까지 쓰자 오 여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내가 준 한약 그거 붕어즙이거든? 위를 튼튼하게 하는 보양 음식이고, 혈관에 좋고, 빈혈에도…….”
그리고 이토록 살가운 해주를 이용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주 미안해서 오 여사는 괜히 비싸게 주고 산 한약 성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주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라일락카페 사장의 언니라는 말에 오 여사가 더 편해졌기에 설명이 끝나고, 오 여사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도 옆을 지켰다.
그런 해주와 얼마간 더 수다를 떨며 오 여사는 생각했다.
앞으로 해주에게 도움이 되는 어른이 되겠다고.
***
집을 나선 지한은 본사가 있는 서초동이 아닌,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다.
이내 지한이 차를 주차시킨 곳은 외진 카페 주차장.
지한은 조수석에 두었던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상자에 가득 5만 원권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서 그는 차에서 내렸다.
카페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메시지로 받았던 약속 장소. 카페 가장 구석에 있는 창가 테이블을 향해 지한은 천천히 걸어갔다.
머리가 긴 남자 하나가 있었다. 체구가 작았고, 눈은 주욱 옆으로 찢어진.
지한이 남자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아이스티를 빨대로 쭉 빨아들이던 남자는 그 상태로 눈만 들어 지한을 쳐다봤다.
거침없는 눈이었다. 세상이 다 우습다는 반항적인 눈빛을 담고 있었다.
“강지한입니다.”
“아, 만나자고 하신 분?”
지한은 대답 대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설명하진 않아도 되겠죠?”
“아, 예. 들었어요. 와이프 약 때문에 만나자고 했다던데요.”
남자는 별 죄책감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지한은 심부름업체에서 보내 준 남자의 정보를 되짚어 봤다.
이름, 이학규. 나이, 스물여덟. 중졸이고, 소년원을 다녀왔고, 착한 대부에서 일한 건 1년.
고작 1년 사이 채무자 폭행뿐 아니라 동료에게도 전치 4주를 입힐 만큼 안팎으로 잡음이 심했는데, 그렇게나 사고를 쳤던 것에 비해 퇴사한 뒤론 기록은 깨끗하다고 했다.
“사주한 사람이 누굽니까.”
지한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학규는 헤엑! 하고 놀라는 척하더니 웃었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내가 의리가 얼마나 좋은데. 의뢰인 신변 보호 정도는 해 줘요, 내가.”
신변 보호가 아니라 비밀 보장이겠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보이는 듯한 이학규를 속으로 비웃으며 지한은 다시 물었다.
“다시 묻죠. 얼마 받았습니까.”
“얼마 받았냐고?”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이학규가 한쪽 입매를 길게 올렸다.
“그건 내가 말할 수 있지.”
이학규가 손가락 두 개를 척! 펼쳤다.
“큰 거 두 장. 근데 쩜오는 강지한 씨 댁 아줌마한테 줬으니까 큰 거 한 장 반 받았어요.”
“2억 드리죠.”
지한은 곧장 금액을 제시하며 말했다.
“누가 사주했는지 이름 하나만 말하는 데 2억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2억, 나쁘진 않은데.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신뢰인 건 알죠?”
이학규가 어깨를 으쓱였다. 먼저 돈부터 내놓으라는 듯.
지한이 들고 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학규가 눈을 빛내며 냉큼 손을 뻗어 상자 속 봉투를 채갔고, 곧장 돈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세기엔 양이 많아 두께를 가늠해 봤다. 그러다 이학규가 돈 좀 만져 본 티를 내며 말했다.
“2억 아닌 것 같은데? 나랑 장난해?”
“1억 원이에요. 선입금이고, 나머진 제 질문에 대답하면 드리죠.”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인심 쓴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고는 말했다.
“뭐, 말해 줄 수는 있는데, 내가 은근 인간애란 게 있어요. 돈을 가장 사랑하는데, 나름 인간도 사랑해. 내가 인간이라서 그런지.”
지한이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는 이학규를 가만히 쳐다봤다.
“가족한테 배신당하고 충격받은 얼굴을 내가 어떻게 봐요. 가슴 아프게.”
거기까지 말한 이학규가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이 정도면 답이 됐죠? 나머지 1억도 현찰로 주나? 들고 온 돈은 방금 나한테 준 게 전부인 것 같은데.”
“아니, 못 줘.”
지한의 말에 이학규가 얼굴을 구겼다.
“못 줘? 나랑 장난해?”
지한 또한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장난하는 건 너겠지. 이름 똑바로 말해.”
“난 이미 얘기했어. 못 알아들은 건 본인 탓이고. 더 정확히 듣고 싶으면 2억 더 내놓던가.”
지한은 가만히 이학규를 쳐다봤다. 한심한 놈. 하나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
돈에 눈이 멀어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는 것도 못 알아보는 멍청한 것.
“이학규. 돈 따라 움직였으니 돈 가진 것들이 어떻게 일 처리하는진 잘 알고 있지? 한낱 쓰레기 소각하는 건 참 쉬운 일이지.”
“뭐, 나 처리하기라도 한다고? 그런 표정 짓고 협박하면 내가 쫄 줄 알아?”
이학규가 코웃음을 치려는 순간, 지한은 말했다.
“한지태, 김규성.”
지한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에 이학규의 미간이 좁혀졌다.
“2년 전 채무자 협박한 사건. 돈 받고 너까지 넷이서 벌인 사건인데 그중 둘이 죽었지? 누구 짓일 것 같아.”
“…….”
“이번 일 지시한 사람하고 같은 사람일 거라곤 생각 못 해 봤어?”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