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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46화 (46/68)

46화.

진섭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이라니. 그러고 보니 지난번 해주가 왔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 나 이번에 서울 가서 전무님한테 용서받았어. 아, 전무님이라고 하면 모르겠구나. 강지한 상무님. 지금 전무님이시거든. ……그러니까 아빠도 죄책감 이제 좀 덜었으면 좋겠어. 난 정말 괜찮은데 아빠 혼자 속 끓이는 거 마음 아파.’

해주의 말을 들으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한편, 조금 의아했었다.

용서받지 못할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렇게 쉽게 용서를 받았다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회사를 상대로 했던 절도죄였다.

그러나 보혜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진섭은 다 이해가 됐다. 그렇지, 사랑하는 사이엔 뭐든 용서가 되는 법이지.

자신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벌써 보혜를 용서한 것처럼.

그렇다고 결혼까지 했다니…….

언제 했던 걸까. 지난번에 찾아왔을 땐 결혼을 한 후였을까. 보혜가 착각을 했을 리는…….

아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여자. 10년 만에 어설픈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할 리가 없었다. 확실하다고 생각하니 확인차 전화를 한 거겠지.

진섭은 마음이 아팠다. 딸의 결혼을 몰랐다니. 하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그런 부잣집에 시집을 가는데 말을 못 하고, 다리를 저는 아빠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에 섭섭함을 느끼는 스스로가 못났다고 생각했다.

-진짜야, 아니야?

진섭은 보채듯 말하는 보혜에게 무어라 말하고 싶어 입을 벌렸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의미 없는 목 긁는 소리뿐.

-아, 맞다. 목소리 안 나오는 거 또 잊었어. 그럼 맞으면 지금처럼 으, 소리 두 번만…….

결국 그는 보혜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방금 전화가 왔던 핸드폰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내 연락처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주한테 연락하지 말고, 찾아가지도 마. 버렸으니 이제 당신 딸 아니야.]

***

토요일 아침, 지한은 집 근처 한 개인 카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구석 자리에 먼저 와 있는 오 여사가 있었다.

“아, 오셨어요.”

어제 아침과는 달리 오 여사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불편하게 굴렸다.

지한은 그런 오 여사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얘기 나누면서 커피 한잔하시죠. 뭐 드시겠어요.”

“괜찮은데…… 그럼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할게요.”

지한은 카운터로 가 아이스아메리카노까지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 나오면 말씀하시죠.”

“아, 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오 여사는 계속 안절부절못했고, 지한은 그런 오 여사를 주시했다.

주말 아침부터 오 여사를 만난 것. 오늘 지한은 오 여사에게 들을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었다.

해주에겐 잠시 회사에 들렀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비밀로 하려는 얘기니까.

이윽고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직원이 지한과 오 여사의 앞에 각각 커피를 놓아 주고 가자, 지한이 그제야 말했다.

“말씀해 보세요.”

가라앉은 목소리에 오 여사는 우물쭈물했다.

어디 가서 기죽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제 잘못이 얼마나 큰지 잘 알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러니까…… 전무님 결혼식 직전에 나한테 찾아왔어요. 한약 상자를 건네면서, 해주 씨한테 먹이면 5천만 원을 주겠다지 뭐예요.”

오 여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애 유학은 보내 놨지, 돈은 많이 들지. 그래서 5천만 원 얘기 들으니까 눈이 확 뒤집혔지 뭐예요. 사실 여태 별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해주 씨한테 먹인 건 바꿔치기한 거니까. 한데 최근에 알았지 뭐예요. 내가 동생 하나 있는데, 해주 씨 일하던 카페 사장이래. 아는 사이라니까 말 안 한 게 죄책감이 들더라고요.”

오 여사는 남해에 있는 동생 영란에게 전화해 확인했다.

해주 이름이 나오자마자 영란은 반가워했고, 남해에서 조카처럼 데리고 있던 애라며 잘해 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오 여사가 후회막심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물론 그 전에도 말했어야 맞는데…… 해주 씨에겐 바꿔치기한 좋은 한약 먹이고, 난 돈 챙기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참고로 해주 씨한테 준 건 붕어즙이에요. 워낙 잘 못 먹으니까 원기 회복 좀 되라고. 나한테 커피 내려 주면서 살갑게 구는 애한테 어떻게 나쁜 걸 먹여.”

오 여사는 한의원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붕어즙 내린 곳에서 받은 거예요.”

지한은 눈앞의 명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돈을 챙겨 받고, 한약은 따로 지어 주고. 아마 오 여사가 말한 대로 그렇게 간단하진 않을 거라고.

예상해 보자면 그 약은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 오 여사에게 전달한 것일 거다.

그렇다면 한약에 해주의 건강을 악화시키거나, 임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약재가 들어갔을지 모른다.

제 추측이 맞는다면, 시간이 지나도 해주가 멀쩡하다거나 혹은 임신하는 일이 생겼을 때 오 여사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대가를 받고도 주어진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얼마나 지독히 괴롭히는지 수없이 봐 왔으니까.

하지만 오 여사에게 그 얘길 굳이 하진 않았다.

아직 확실한 정보도 아니었고, 맞다 한들 제가 알게 됐으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괜한 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오 여사는 나름 제 행동을 변명해 보았지만, 지한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다시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내가 잘못했지. 그런 제안 받았을 때 바로 전무님한테 말했어야 했는데요.”

“네. 말씀하셨어야 했어요.”

“일은…… 관둘까요?”

관두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오 여사는 말했다.

“우선 보류하겠습니다. 한약 성분 의뢰 할 생각이니. 물론 그만두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아니, 난 계속 일하고 싶죠…… 이만한 일터가 없는데.”

“그러시면 계속 정상 출근하세요. 해주 씨에겐 티 내지 마시고요.”

오 여사의 처분을 보류한 건, 해주를 위해서였다.

정 붙인 사람이 몇 없는데 오 여사가 갑자기 그만뒀다고 하면 많이 아쉬워할 것 같았다.

비록 오 여사가 돈 욕심을 부리긴 했지만, 해주에게 해를 가하진 않은 것 같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여사님께 접근했다는 남자 명함 받은 건 없습니까?”

지한의 물음에 오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는데, 내가 인상착의는 확실히 말해 줄 수 있어요. 특징이 꽤 있었거든.”

“그렇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오 여사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키는 나보다 한 10센티 정도 컸어요. 내가 작은 편이니까 아마 170센티가 좀 안 되지? 눈은 뱀눈처럼 얄쌍하니 쭉 찢어졌고 코랑 입은 작았고, 아! 머리는 또 길었어요. 습관인지 콧잔등을 그렇게 긁었고요.”

지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오 여사의 말 중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서.

“머리카락이 길었다는 말씀이시죠.”

“네. 어깨 정도? 머리 묶고 모자 썼는데, 뒤 꽁지가 어깨쯤 닿았으니까요.”

‘헤어스타일도 달랐어요. 그 남자는 스포츠머리였는데, 제가 본 사람은 머리가 길었고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선이 굵잖아요. 그 남자는 체구도 작고 선도 고왔어요. 눈은 얄쌍했고요. 예식장에서 봤던 사람은 머리가 길었는데, 머리 긴 사람도 없네요.’

해주의 말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마치 둘은 같은 인물이라는 듯.

왜.

어째서 2년 전 해주를 해쳤던 사채업자와 오 여사에게 한약을 건넸던 남자가 비슷한 점이 많은 거지?

불안했다. 불쾌했고, 역겨운 감정이 들었다.

아직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한은 그럼에도 해주가 두려워하던 그 남자에게서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일에 아버지가 개입돼 있다면, 왜 트럭 사고를 지시했지? 아니, 애초에 대부업체와 아버지가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

사채업자의 협박으로 해주가 기술 정보를 빼돌리고, 그 정보로 이득을 본 건 DF전자였다.

아버지가 DF전자에 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DF전자를 도울 이유도 없고, 그런데 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빠져나오기 힘든 미궁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그 남자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난 장소와 그 외 더 특정할 것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지한은 해결 나지 않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오 여사는 다시 기억을 되짚어 지한에게 그 남자를 만난 장소를 정확히 읊어 주었다.

***

해주는 지한과 오후에 삼청동을 가기로 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샤워를 했고, 화장을 했고, 이제 옷을 입으러 옷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지한이 집으로 돌아왔다.

정오가 다 되어 가던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다고 말하려던 해주의 얼굴에 순간 걱정이 어렸다.

지한이 머릿속이 복잡한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거실로 오면 바로 보이는 곳에 해주가 있었는데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침실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회사 일 잘 안 풀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그제야 지한이 해주를 발견했다. 그가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띠곤 말했다.

“조금 복잡한 일이 있네요.”

“일하셔야 하면 오늘은 집에 있을까요?”

“아니에요. 삼청동 데이트해야죠.”

“다음에 가도 돼요. 지한 씨랑 집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아요.”

그러자 지한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성큼성큼 걸어가 해주를 꽉 안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 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지한은 잠시 대답 없이 해주를 안기만 했다.

이래서 널 곁에 두지 않으려 했다.

이 썩어 빠진 집안에 있으면 언젠가 아버지가 널 괴롭힐 테니까. 또 널 놓아주는 날 내가 많이 힘들까 봐.

결국 제풀에 지쳐서 널 안지 말았어야 했는데.

네가 날 원망하는 일이 생기면 그땐 어떡하지.

불안감에 지한은 해주를 꽉 안았다.

“미안해요. 삼청동은 내일 갑시다.”

“그렇게 해요.”

“오늘은 집에서 시간 보내요.”

“네. 좋아요.”

고분고분 해주가 지한의 말에 대답했다.

지한이 서서히 몸을 뗐다. 그러곤 그는 해주와 눈을 마주했다.

서서히 입을 맞췄고, 깊게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 모든 추측이 확실해지기 전에, 해주가 모든 걸 알게 되기 전에 그녀를 제 품에 꽉 안고 싶었다.

아닐 수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없다고 그의 모든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이었다.

지한은 참 오랜만에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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