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협상-45화 (45/68)

45화.

“다녀오세요.”

해주가 현관으로 나와 출근하는 지한을 마중하며 인사했다.

지한은 그런 해주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하곤 말했다.

“이따 외출 잘하고 와요.”

“그럴게요.”

두 번째 잠자리 이후, 지한과 한층 더 가까워졌다.

매일 아침 출근길, 지한은 현관에서 배웅하는 해주에게 짧게 입맞춤을 하고 집을 나섰고, 밤이면 더 짙은 스킨십을 나눴다.

오히려 밤엔 아무렇지 않은데, 아침에 나누는 짧은 키스는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해주는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지한의 뒷모습을 보며 뿌듯해했다.

저렇게 멋진 남자와 연애하다니. 지한이 제 남편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벅차오르곤 했다.

현관문이 완전히 닫히고, 이만 해주도 걸음을 돌리며 천천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주는 오늘 오랜만에 홀로 외출할 예정이었다.

서점에 들러 아빠가 볼만한 책을 사려고 한다.

신약을 새로운 치료제로 쓰고 있는데, 약물이 독한 편이라 쉽게 지칠 거라고 병원에선 말했었다. 그러니 책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택배를 부쳐 주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주방에 들어섰다.

해주와 아침 식사 그릇을 치우던 오 여사의 눈이 마주쳤다. 해주가 미소 지었고, 그런 해주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오 여사는 식탁 위 수저를 모아 싱크대로 가져가며 말했다.

“쉬어요. 난 빨래해야겠네.”

그대로 오 여사는 아직 다 치우지 않은 식탁을 두고서 세탁실로 들어가 버렸다.

“요즘 왜 피하시는 것 같지…….”

해주가 의아해하며 세탁실 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빨래해야 한다, 콩나물을 다듬어야 한다, 커피도 됐다. 설거지가 밀려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이 없다.

요 며칠 동안 오 여사는 해주를 피하기 급급했다.

“내가 뭘 실수했나?”

묻고 싶은데, 대놓고 피하는 오 여사를 오히려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한약은 마저 다 먹어야지.

오 여사가 신경 쓰여 세탁실을 한 번 본 해주는 냉장고로 가 한약 한 봉지를 꺼냈다.

***

해주는 우체국을 들러 책 다섯 권을 햇빛요양병원으로 보냈다.

12시. 막 점심시간이 되었다. 좀 출출해져서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고 샌드위치를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던 해주는 문득 고민했다.

지한에게 연락을 해 볼까.

그도 점심시간일 텐데, 시간이 나면 같이 밥 한 끼 하자고 물어볼까?

얼마간의 고민 끝에 해주는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쁘다고 거절당하더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가 보고 싶었으니까.

신호음이 길게 갔다. 전화를 받지 않으려나 싶던 순간, 신호음이 끊기며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해주 씨.

“바쁘세요?”

-지금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지한의 물음에 해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지한 씨 회사 근처거든요. 혹시 시간 되면 얼굴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지한은 잠시 생각하는 듯 대답이 없었다. 바쁘면 괜찮다고, 집에서 보자고 하려는데 이내 그가 말했다.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간단히 회의할 게 있어서요. 나도 얼굴 보고 싶은데 괜찮으면 1층 카페에서 기다려 줄래요?

“기다릴게요. 끝나면 연락 주세요.”

-알겠어요. 최대한 일찍 갈게요.

해주는 전화를 끊고서 곧장 WS호텔&리조트 본사를 향해 걸었다.

지한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해주는 입매를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아정이 근무 중일 텐데. 쉴 때 먹으라고 디저트나 사 갈까.”

때마침 옆에 마카롱 가게가 있었다.

해주는 아정에게 선물할 마카롱을 사기 위해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해주는 금세 WS호텔&리조트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마카롱 쇼핑백을 들고서 회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해주는 곧장 아정이 있을 안내 데스크 쪽으로 향했다.

“토요일에 어디 갈까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 그 음성의 주인공을 보며 해주는 걸음을 멈칫했다.

왜 저 두 사람이…….

“난 좀 걸어 다니고 싶어요. 꽃구경도 좋고요.”

왜 아정과 윤이 저토록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걸까.

심지어 안내 데스크 위에서 손을 꼼지락대며 잡고 있었다.

“그럼 가평 놀러 갈래요? 아침고요수목원 어때요? 지금 생각나는 건 거기밖에 없네. 아님 좀 더 찾아봐요?”

“아침고요수목원 좋아요. 안 가 봤어요.”

“진짜? 연애 4년 했잖아요.”

“나가는 걸 안 좋아해서…… 그런 데 별로 못 가 봤어요.”

“와, 내가 다 데리고 다녀야겠네.”

“그래 주면…….”

순간 아정이 윤의 손을 확 뿌리쳤다.

윤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정을 보는데, 아정의 시선은 윤 너머 해주에게 향해 있었다.

당황스러워 보이는 아정의 표정에 윤은 지한이라도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뒤이어 해주를 발견한 윤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전무님껜…… 비밀로 해 주세요.”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왜 둘이 달달함을 풍기며 같이 있는 건지.

조금 있으면 지한이 내려온다며 윤을 먼저 보낸 해주는 아정에게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해주가 신혼여행을 간 사이, 아정은 재형과의 이별이 힘들어 술이 마시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마시다간 감정 과잉이 될 것 같아 술친구가 필요하던 찰나에, 재형과의 이별에 일정 부분 이바지한 윤이 생각났고, 마시다 보니 친해졌다고 했다.

재형과 이별하는 데 윤이 어떤 이바지를 했는지, 어떻게 데이트까지 하는 사이가 된 건지 같은 중요한 부분은 다음으로 미뤘다. 지한이 그가 말한 시간보다 5분 일찍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지한과 해주는 회사 앞 막국수집으로 갔다.

지한이 최대한 비워 본 시간은 1시간이었고, 밥만 먹고 곧장 보내기엔 마음이 쓰여 커피까지 한잔하기로 하며 가볍게 고른 메뉴였다.

두 사람 주문하고 얼마 뒤 나온 물막국수를 한 그릇씩 앞에 두고 먹었다.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해주가 말했다.

“예전엔 입맛이 없었는데요, 지한 씨랑 사귀고 나니까 뭐든 맛있는 것 같아요.”

해주의 말에 지한은 웃었다.

“이것저것 더 많이 먹여야겠네. 건강하려면 해주 씨는 살 좀 올라야 해요.”

“많이 먹을 테니까 자주 밥 같이 먹어요.”

“그래요. 종종 외출하면 오늘처럼 나 불러요. 점심 같이 먹게.”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지한의 핸드폰에 전화가 울렸다.

‘오영선 여사님’이었다. 지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 여사가 근무 시간 외에 연락해 온 적이 없었기에.

이내 그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

“네, 여사님.”

-전무님 혼자 계세요?

“아닙니다. 해주 씨랑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오 여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럼 해주 씨 없을 때 잠깐 통화 좀 가능할까요?

지한은 흘끗 해주를 돌아보았다. 해주가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기에 그는 고개를 저은 뒤 말했다.

“잠깐 나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다녀오세요.”

지한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 막국수집을 나섰다.

출입문 앞에 서서 지한은 다시 통화를 이어 나갔다.

“말씀하세요. 잠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전화했어요. 어휴, 내가 그러면 안 됐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게…….

오 여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시 오 여사의 말을 묵묵히 듣던 지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약…… 여사님, 큰 실수 하셨네요. 우선 알겠습니다. 제가 좀 알아보죠.”

***

한편, 햇빛요양병원.

진섭이 요양병원 운동장을 목발 짚고 걸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라 함께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활 목적으로, 심심해서, 친한 사람과 수다를 떨기 위해, 또 진섭처럼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따뜻한 햇볕 아래서 진섭은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는 생각과 또 반대로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평화로운 느낌이 편안한 기분을 주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으니까.

한때 몸 바쳐 일하며 열정적으로 살았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불량 식품 공장을 크게 키워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봤을 탄탄한 식품 회사로 키워 냈고, 번 돈으로 여기저기 하고 싶던 후원도 하며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았었다.

일하느라 쉰 가까이 된 나이에나 했던 사랑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한데, 남은 건 절뚝이는 두 다리와 피폐해진 정신뿐이다.

얼마 못 가 지친 진섭은 운동장 한편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하늘을 바라봤다. 지금 내리쬐는 햇볕처럼 굳건하고 따스한 딸 해주를 떠올렸다.

제 엄마 때문에 진섭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소중한 아빠로 여기는 건지, 해주는 진섭 때문에 죽을 뻔하고도 곁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딸이었다.

미안해할 게 하나도 없는데. 나 몰라라 버렸어도 할 말이 없는데.

진섭은 사실 처음엔 해주를 이용했다.

보혜가 잠적하듯 떠나가고, 모든 걸 잃었을 때 해주가 보였다.

사랑하는 여자의 딸. 그 여자에게 더 결속되고 싶어 친자 입양을 한 딸, 해주.

그때 진섭의 눈에 들어온 해주는 희망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시 제게로 돌아와 줄 수 있는 매개체, 그런 것이 돼 줄 수 있다는 희망.

그걸 알면서도 해주는 진섭을 친아빠 대하듯 했다.

서류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도 진짜 가족 같다며, 평생 제 곁에서 아빠로 있어 줘야 한다며 장난치듯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진섭도 같은 마음이긴 했다. 평생 가족. 보혜까지 돌아와 셋이서 영영 가족이 됐으면 하는 마음.

한데 해주가 제 빚을 같이 갚아 주기 위해 자진해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만 두세 개씩 뛰기 시작하면서 진섭은 날로 미안한 마음이 쌓여 갔다.

그러다 사채업자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그 트럭 사고를 겪은 날.

미안함은 죄책감으로 변했다.

오늘 같은 날 죽어도 참 괜찮을 것 같은데…….

띠리리리.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떴고, 진섭은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아 귓가에 댔다.

평소라면 받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애써도 입 밖으로 아무런 말이 안 나와 대화를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이 전화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

-여보세요? 진섭 씨? 진섭 씨 맞지? 나야 보혜. 번호 안 바뀐 거지?

보혜였다. 그가 가장 사랑한 여자. 또 사랑하는 딸의 친모.

-아, 말 못 한다고 들었어. 그래서 대답 안 하는 거지?

믿어지지 않았다. 평생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다.

-진섭 씨 아직 해주랑 살지? 해주 아빠 노릇 해 주고 있잖아. 맞지? 그럼 있잖아, 해주가 우상 회장 아들이랑 결혼한 거 진짜야?

……해주가 뭘 해?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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