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당시, 지한은 어머니 재산만 탐내는 아버지 때문에 환멸을 느낀 상태였다.
예민했고, 때문에 아픈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펴 드리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어머니 재산이 가지 않을까, 큰 법무 법인을 찾아 법률을 자문하는 데만 바빴던 어느 날, 지한은 병원 정원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늘 미소 정도는 지어 주셨지만, 해맑은 웃음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로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어머니 곁에 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
어머니와 즐겁게 수다를 떨던 그 대학생이 윤이었다.
어머니를 웃게 해 준 게 고마워 병실로 몇 번 과일 바구니를 보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장에 찾아와 준 날엔 고마움에 언젠가 도움이 돼 주겠다고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물론 정말 연락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윤은 쉽게도 연락을 해 왔다.
태권도 4단, 전국 대회 금상도 받았던 체육 특기생인데 다리 인대를 다쳐서 선수 생활은 물론 동네 태권도장 취업도 어렵게 됐다고.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 건강도 좋지 않아 이제 제가 가장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아주 작은 자리라도 취업시켜 줄 수 없겠냐고.
윤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을 했다.
처음에 지한은 윤에게 경호원 일을 시켰다. 다리는 못 써도 팔은 쓸 수 있을 테니 어떤 위협에서도 자신을 지키라고.
어떤 불법적인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가족도 해칠 수 있는 아버지가 우상을 손에서 놓지 않기 위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그 정도 대비책은 있어도 좋았다.
2년, 윤은 오버스러울 만큼 지한을 경호했고, 그때의 믿음으로 지한은 상무로 승진하자마자 윤을 비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아주 든든한 파트너로서.
“끈끈할 수밖에 없네요.”
해주는 한편으론 윤이 부러웠다. 자신과 지한이 사이가 끝나더라도 윤은 그의 옆에 오래도록 함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즐거워야 할 데이트를 망치고 싶지 않아 해주는 애써 생각을 떨치며 말했다.
“다음엔 저 하고 싶은 데이트해도 돼요?”
“그래요. 뭐 하고 싶어요?”
“인사동부터 삼청동까지 손잡고 걷고 싶어요. 걷다가 식당 가서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싶고요.”
혹시 지한이 걷는 걸 좋아하지 않을까 봐, 해주는 또다시 흘끗 그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다행히 지한은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좋아요. 다음엔 더 편하게 입고 오랫동안 걸어 봐요. 걷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요? 재밌겠다.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이 그쪽이었는데 데이트하는 커플 보면 그렇게 부러웠거든요.”
해주는 한순간 들떴다. 만약 남자 친구가 생긴다면 정말 하고 싶었던 데이트였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지한과 하게 된다니 설렜다.
그때였다. 해주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지한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지한이 은은하게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더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예뻐서요. 고백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얼마나 속앓이했을까 싶을 만큼 예쁘네요.”
해주의 얼굴이 한순간 상기됐다.
“지한 씨한테 그런 얘기 들으면 아직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앞으로 마음 표현 많이 할게요.”
지한이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이내 그의 손에 벨벳 상자 하나가 딸려 나왔고, 그는 해주의 앞으로 상자를 내밀었다.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요.”
해주가 어리둥절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웃는 입 모양의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언젠가 해주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브랜드의 것이었다.
“……예뻐요.”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네요. 머리 걷어 볼래요?”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해주는 얼떨떨해하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에게로 걸어가 상자 속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해주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몸이 밀착됐고, 해주는 훅 끼쳐 온 그의 향기에 가슴 설레었다.
이내 해주의 가는 목에 그녀와 잘 어울리는 목걸이가 걸렸다. 지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펜던트가 해주 씨랑 디자인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예상대로 잘 어울리네요.”
그가 멀어지자, 해주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감사해요. 귀걸이도 해 볼래요.”
해주가 귀걸이를 빼내 귓불에 착용하는 사이, 자리로 돌아간 지한이 말했다.
“앞으로 자주 선물할게요.”
“전 이걸로 충분해요.”
“난 부족해요. 해주 씨한테 많은 걸 주고 싶어요. 결혼 생활 동안 내가 줄 수 있는 걸 다 주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 후회하지 않도록.”
“하지만 전 드릴 수 있는 게 없는걸요…….”
“곁에만 있어요. 그거면 되니까.”
해주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맙게 받을게요.”
“이만 집으로 가죠. 하고 싶은 게 많은데.”
하고 싶은 거, 그건 해주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지한이 목걸이를 걸어 줄 때 그의 향수 냄새를 짙게 맡은 뒤부터 내내.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으로 가요.”
차에 올랐다. 평소보다 빠르게 차가 도로 위를 지났다.
금세 한남동이었고, 주차를 마친 뒤 곧장 집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에 입을 맞췄다. 성급하게 키스하며 구두를 벗고, 재킷을 벗고, 걸음을 옮기며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해주를 눕힌 지한이 그 위에 올라타듯 해주와 겹쳐졌다. 두 사람은 그제야 조금 진정하며 입술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밤이 좀 길 것 같은데.”
조금 잠긴 목소리가 참 섹시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그 긴 밤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어도 좋아요.”
지한이 해주의 볼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시선을 맞추었고, 그대로 고개를 비틀며 해주의 입술에 닿았다.
지한이 해주의 입술을 천천히 머금다가 점점 깊게 빨아들였다.
해주는 그의 숨을 느낄 때마다, 또 혀끝이 스칠 때마다 발끝이 찌릿했다. 심장이 두근댔고, 몸엔 점차 열이 올랐다.
어서 빨리 안아 주기를. 지한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구석구석 꽉 껴안아 포근한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참 신기하다. 지한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땐 어떻게 이렇게나 행복한 걸까?
걱정도 근심도 전부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저 지한이 제 세상의 모든 것 같았다.
아직 밤은 쌀쌀하건만, 벌써 여름이 찾아온 것처럼 방 안엔 열기가 가득했다.
지한이 더운 숨을 뱉으며 입술을 뗐다. 지긋하게 해주를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기분 좋게 해 줄게요.”
***
전라북도 군산, 어느 폐교에 딸린 작은 운동장이었다.
산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옷차림을 한 40대 후반쯤의 여자가 하늘에 뜬 별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후, 길게.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뻗어 가던 담배 연기가 이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때 여자의 곁으로, 그녀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쭈그리고 앉아 담배 하나를 빼 물었다.
“불.”
명령조의 말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보혜는 군말 없이 라이터를 켜서 입가에 대 주었다.
“돈 다 떨어졌다.”
진오의 말에 보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라고. 네가 도박으로 날렸으면 입 다물고 있어야 정상 아니야?”
“넌 꼭 그렇게 서방 자존감을 박살 내야겠냐.”
진오가 눈썹을 꿀렁이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보혜는 그 뻔뻔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지랄. 어느 서방이 마누라 웃음 팔아서 돈 벌어 오게 해? 나 좋다는 돈 많은 놈들 다 놔두고 왜 너 같은 새끼 옆에서 개고생인지.”
“야. 몸 파는 것도 아니면서 엄살 좀 부리지 마.”
보혜가 차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더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보혜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버리곤 자리에서 일어서며 발로 밟았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는데, 남자가 따라 일어서 그녀를 뒤로 안았다.
“아, 미안해. 딴 새끼 운운하니까 질투 나서 헛소리했어. 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내가 못나서 자격지심 때문에 잠깐 미쳤었어. 봐줘라. 응?”
“암튼 너, 말 가려서 해.”
“알겠어. 사랑해. 나 버리면 안 돼. 알지? 나 너밖에 없어.”
진오의 애교에 보혜가 다시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너 담배 피우는 모습은 왜 봐도 봐도 섹시할까? 40대 후반에 너처럼 청순하고 섹시한 여자는 없을걸?”
보혜는 볼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감싸며 치근덕대는 진오를 가만히 받아들이며 말했다.
“내일 최 사장 만날 거야.”
“최 사장?”
“한 번 만나 달라잖아. 만나 줘야지.”
보혜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최길주 사장. 그는 보혜가 다섯 살 어린 남자와 자식도 없이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몇 번이나 치근덕거렸다.
전형적인 동네 양아치로, 젊은 시절엔 조폭 생활을 했고 지금은 시내에 7080 나이트클럽을 운영 중이었다.
이래 봬도 재산 꽤나 있었다. 보혜가 여태 만났던 남자들과 결은 다르지만, 최 사장도 결코 한두 번 만나 보기 나쁘진 않았다.
조폭 생활도 아버지 밑에서, 운영하는 나이트클럽 세 곳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름 지역 조폭 우두머리급이었던 만큼 불법 업소들엔 전부 손을 뻗고 있었고, 직접 운영하진 않지만, 지인들에게 대리 운영을 맡긴 단란 주점과 게임장 몇 곳에서 수급도 받고 있었다.
보혜는 진오와 전라북도에 정착해 소위 땅 부자라고 떵떵거리는 남자들을 등쳐 먹고 살았다.
처음엔 꽤나 쏠쏠했는데, 보혜가 꽃뱀으로 소문이 나는 바람에 더는 그녀의 그물망에 걸려들려는 멍청이들이 없었다.
그러니 최 사장이라도 덥석 무는 수밖에.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