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금요일부터 화창하던 날씨가 주말까지 이어졌다.
해주는 기분 좋은 햇살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힘껏 켜는데, 문득 옆 침대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요?”
해주가 재빨리 손을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하고서 물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지한이 있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그는 평일엔 곧장 출근 준비를, 주말엔 서재에 들어가 일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은 아직 침대에 있었다.
“한 시간 전쯤.”
“근데…… 아직 침대에 계시네요?”
“해주 씨 자는 모습 좀 구경했어요.”
“왜 그걸…… 너무 추했을 텐데요.”
해주는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붓기 빠지라고 손으로 세게 마른세수도 했다.
“예뻤어요. 그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고. 사실 해주 씨가 묻기 전까진 한 시간이나 흐른 줄 몰랐어요.”
“아.”
훅 들어온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지한의 솔직한 말에 해주는 한순간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심장도 빨리 뛰었다. 어찌나 빨리 뛰는지, 혹시 지한에게 들릴까 봐서 해주는 다시 차분해지려 많이 애써야 했다.
지한은 해주의 수줍은 미소에 다정히 미소 짓고는 말했다.
“천천히 나와요. 아침 배달시켰으니 먹고 나갈 준비하죠.”
“네. 금방 나갈게요.”
지한이 먼저 침실을 나서자, 해주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지한과 데면데면하게 지냈을 땐 언제나 그가 먼저 출근했기에 세수하지 않고 아침을 먹는 날이 많았지만, 오늘은 그와 마주 앉아 식사할 테니 깔끔한 모습이고 싶었다.
세수하고, 양치도 가볍게 하고.
문득 거울을 보던 해주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지난주 주말까지는 분명 지한과 거리감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경계선이 전부 사라지다니.
남해에서 지한의 방에 들어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오늘, 지한이 잠자고 있을 자신을 사랑스럽게 봐 줬을 리 없으니까.
해주가 거실로 나왔을 땐 아일랜드 식탁 위에 브런치 두 접시가 세팅되어 있었다.
해주는 지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이따 절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아요.”
지한의 말에 해주가 그를 쳐다봤다.
“절이요?”
“어머니 기일에 맞춰 갈 순 없을 것 같고, 오늘 잠시 들러서 인사드리고 올까 하고요.”
“아, 좋아요. 그럼 전 이따 뭐 입고 가야 할까요?”
해주가 같이 지한의 어머니에게 인사드리기 위해 묻자 지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혼자 들어갔다 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줘요.”
“그럴게요. 그래도 어머니 기일 다가와서 가는 거니 저도 옷은 갖춰 입고 가고 싶은데, 무채색 입으면 되겠죠?”
“평소대로 입어도 괜찮아요. 옷차림 신경 써서 가야 할 곳 아니니 편하게 가요.”
지한의 말에도 해주는 계속 고민했다. 제가 가진 옷들 중 어떤 게 가장 깔끔하고 무난한 옷일지.
식사를 마치고 결국 해주가 고른 옷은 베이지색 세미 정장 바지와 아이보리색 리본 블라우스였다.
단정해 보이면서도 예쁜 옷은, 지한과의 데이트까지 염두하고 고른 것이었다.
지한은 검정색 슈트를 입었다. 해주는 평소보다 더 단정한 느낌의 슈트에서 지한이 어머니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는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절이었다.
***
절 야외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지한은 홀로 절에 들어갔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달라는 말에 해주는 절을 둘러보았다.
자연과 절 건물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물고기 모양의 풍경 소리는 참 듣기 좋았고, 익숙한 듯 절 마당을 지나는 고양이들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해주는 무교였고, 절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참 오랜만이었다.
그럼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 있으니 살가운 치즈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해주는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평화롭다.”
너무 평화로워서 괜히 무서울 만큼.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한다는 게 심신에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앞으로 이 절에 오면 지한 씨가 생각나겠지.”
해주는 그와 추억을 많이 쌓고 싶었다. 나중에 그가 곁에 없어도 곳곳에서 그를 떠올릴 수 있도록.
***
해주가 절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마주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한이 나왔다.
고양이를 한 번 더 쓰다듬으며 해주는 작별 인사를 하고 지한에게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죠.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네요.”
“아니에요. 구경하다 보니 시간 금방 갔어요. 어머님이랑 인사 잘 하셨어요?”
“덕분에요.”
지한이 미소 짓고는 물었다.
“한정식 어때요? 근처에 괜찮은 집 있는데.”
“좋아요. 안 그래도 절밥 생각나서 한식 먹고 싶었어요.”
“가까운 곳이니 걸어갔다 오죠. 가져갈 게 있어서, 차에만 잠깐 들러요.”
해주는 지한을 따라나섰다.
지한은 차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챙기고는 식당으로 해주를 안내했다. 절에서 나와 걸어서 5분. 도로가에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만석은 아니었고, 지한과 해주는 2인실 방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조기와 떡갈비가 포함된 한정식 A코스 2개를 주문하고, 먼저 나온 장어 죽부터 한 그릇 먹었다.
“장어 죽은 처음 먹어 보는데 되게 고소하고 맛있어요.”
“여기 음식 다 괜찮아요. 간이 세진 않은데 그래서 더 깊은 맛이 나요.”
“자주 오시는 데예요?”
“절에 올 때면 대부분 들러요.”
죽 그릇을 다 비우고 난 뒤, 본격적인 요리가 나오기까지 텀이 있었다.
지한은 그사이 차에서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제게 줄 것인 줄 몰랐던 해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지한이 말했다.
“결혼식장에서 봤던 남자. 트럭 사고 낸 사채업자라는 남자, 찾아봤어요. 착한 대부 직원들 최근 사진이에요. 머리 긴 남자는 없던데, 이 안에 그 남자 있는지 확인해 봐요.”
해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류를 열었다.
총 아홉 장의 A4 용지가 들어 있었고, 인물 설명이 적힌 장마다 하나씩 사진이 클립으로 첨부돼 있었다.
해주는 한 장씩 종이를 넘겼다.
아는 얼굴도 있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트럭 운전을 하고 있던 착한 대부 막내 직원.
“없어요.”
해주는 다시 처음부터 종이를 넘기며 잘못 본 건지 확인했다. 하지만 정말 없었다. 그때 눈이 마주쳤던 그 남자는.
“확실해요?”
“네.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선이 굵잖아요. 그 남자는 체구도 작고 선도 고왔어요. 눈은 얄쌍했고요. 예식장에서 봤던 사람은 머리가 길었는데, 머리 긴 사람도 없네요.”
“아홉 명. 거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예요. 퇴사한 모양이네요.”
해주는 찝찝했다. 결혼식 후로 식장에서 본 그 사람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이 잘못 본 거라고 애써 위로했었는데.
그 남자 머리가 짧은 것만 확인하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찝찝하고 복잡해졌다.
그 순간, 해주는 또 다른 묘한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없어요.”
“누구요.”
“아빠 같이 협박했던 직원들 전부요. 세 명 더 있었는데요.”
“그래요? 더 찾아봐야겠네. 참고로 웨딩홀 CCTV도 확인해 봤는데 전부 교묘히 가려져 있었어요. 인근 CCTV도 확인해 볼 생각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요.”
“감사해요, 이렇게 도와주셔서. 바쁘신데요.”
“좋아하는 여자가 불안해하는 것보다 확실히 확인해 보는 게 내 마음도 편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아닐 거예요. 그 사람이 경호원까지 있던 예식장에 들어왔을 리 없으니까요.”
해주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한순간 그자가 가까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덮쳐 왔지만, 불안감을 티 내며 지한과의 시간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본격적인 식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호박과 부추전부터 나물 요리, 해산물 요리, 육류, 그리고 찌개와 밥까지.
든든한 식사를 마친 후엔 디저트로 수정과와 호두를 넣고 돌돌 만 곶감도 나왔다.
그러는 동안 해주는 잠시 가졌던 불안감을 지우고 지한과의 데이트에 집중하려 애썼다.
***
식사를 마치고 이동한 장소는 한강 근처 호텔 라운지 바였다.
해가 넘어가려는 시간. 하늘은 조금 붉은빛이 되었고, 그 풍경이 멋있어서 안 그래도 지한과 함께라 맛있게 느껴지는 커피가 더 맛있다고 해주가 생각할 때였다.
“궁금해요.”
문득 해주의 말에 지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요?”
“지한 씨는 일만 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좋은 장소를 많이 알아요?”
“아아. 전에 추천받았어요. 정 비서한테. 이런 곳을 많이 알더라고. 여긴 해외 바이어들하고 미팅 장소로 왔던 곳인데. 커피가 맛있어서 기억해 뒀어요.”
“그렇구나. 비서님 센스가 좋네요.”
지한이 인정하며 웃음 지었다.
“그 센스 덕분에 옆에 두고 있죠.”
“평소에도 지한 씨랑 비서님 되게 친해 보이세요.”
두 사람은 명백히 상하 관계에 있었다. 위치가 달랐고, 직급이 달랐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랐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참 가까워 보였다.
윤은 모두가 어려워하는 지한에게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편이었고, 지한은 그런 윤을 다 받아 주었으니까.
“정 비서, 가까이 두는 유일한 사람이죠. 물론 해주 씨를 제외하면.”
해주는 지한이 덧붙인 말에 기분 좋다는 듯 미소 짓고는 물었다.
“어떻게 정 비서님이 지한 씨와 일하게 된 거예요?”
“직접 채용했어요. 어머니 입원해 계셨을 때, 병원에서 만났어요. 정 비서도 다리 골절로 입원해 있었거든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