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WS호텔 한식당에 지한과 윤은 자리 잡았다.
단품 요리를 하나씩 주문했고, 이내 지한의 앞엔 된장찌개와 밥이, 윤의 앞엔 삼계탕이 놓였다.
지한이 숟가락을 들었을 때, 윤이 질문했다.
“제가 드린 서류는 확인해 보셨어요?”
“그 얘기 하려던 참이었어. 사진 찍은 사람은, 그게 전부야?”
“네. 지금 근무하는 사람은 총 아홉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주 바뀌는 곳이니 찾으시는 사람은 퇴사하지 않았을까요?”
“그래, 알았어.”
‘착한 대부’ 직원 명단.
지한은 남해로 떠나기 전 윤에게 사람을 알아보라며, 대부업체 전 직원의 사진을 찍어 오라고 지시했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출근하자마자 최근 사진과 간단한 정보가 함께 담긴 서류를 받았다.
결혼식장에서 해주가 본 남자는 트럭 사고를 낸 사채업체 직원과 얼굴은 똑같은데 머리가 길었다고 했다. 하지만 윤이 건넨 사진 중 어디에도 머리가 긴 남자는 없었다.
WS호텔 서울점 측에 얘기해서 웨딩홀과 호텔 로비 CCTV도 아침 내내 돌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머리가 긴 남자는 있었지만, 마치 CCTV 위치를 아는 것처럼 얼굴을 교묘히 가리거나 피했으니까.
실루엣이 나온 것조차 없어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해주에게 보여 주면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며 지한은 물었다.
“요즘 인기 있는 주얼리 브랜드가 어디야?”
윤은 닭고기를 크게 뜯어 한입에 넣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지한을 쳐다봤다.
“전무님 주얼리 하시게요?”
윤의 표정엔 의아함이 서렸다. 반지 한 번 끼지 않던 지한이 갑자기 액세서리에 관심을 갖다니.
“나 말고, 여자들한테.”
“아, 여자요. ……네? 여자요?”
윤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어떤 여자한테 선물하시려고요?”
저를 위한 액세서리를 산 적도 없지만, 윤이 알기로 지한은 액세서리 같은 물건을 여자한테 선물 한 번 한 적도 없었으니까.
“해주한테.”
“해주? ……윤해주 씨요?”
그리고 윤은 또다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분명 지한이 해주라고…… 성을 떼고 불렀다.
지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자꾸 놀라는 거지? 눈만 크게 뜨지 말고 추천을 해 봐.”
“아니, 해주 씨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신 적 없잖아요. 뭐예요, 남해에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해주 씨한테 왜 선물하시려고 하세요?”
“그건 알 거 없어.”
지한은 윤에겐 해주와 마음이 통해 연애하게 됐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들떠서 연애한다고 떠들고 다닐 나이는 아니니까. 연애를 시작했다고 크게 알리기보단 조용히 해주와 연애하고 싶었다.
그러니 윤이 자연스럽게 알아챌 때까지 그는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해주 씨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티파니가 낫지 않을까요? 디자인이 여성스럽고 캐주얼하니까요. 민트 박스도 예쁘고요.”
“그래?”
“해주 씨 평소 스타일도 좀 여성스러우니까 적극 추천드려 봅니다. 디자인도 추천해 드려요?”
“그건 됐어. 내가 알아보지.”
예물은 직원이 골라 준 것 내에서 해주가 골랐지만, 이번 선물은 제 마음을 담고 싶었다.
결혼처럼 기간이 정해져 있는 연애. 그 짧은 기간 동안 지한은 해주에게 많은 것을 해 줄 생각이었다.
자신과 지내는 시간 동안 행복할 수 있도록.
“주중에 백화점 들를 수 있도록 한 시간 정도 스케줄 빼.”
“백화점이면 제 의견 반영 확정인가요?”
“그래. 도움 많이 됐어.”
***
주경이 엄마와 단둘이 사는 아파트였다.
“밥이 넘어가? 일자리 알아는 보고 있는 거야?”
주경의 엄마, 권해숙의 말에 주경이 식탁 위에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밥 먹는데 잔소리 좀 하지 마!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왜 자꾸 보태냐고.”
“그러게 멀쩡한 직장을 왜 때려치워, 때려치우길! 엄마가 말했잖아. 거기 붙어 있어야 시집 잘 간다고.”
해숙이 답답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어휴, 소리를 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짜증 난다는 듯 주경은 목소리를 높였다.
“아, 내 마음이야! 엄만 내가 엄마 인생 피게 하는 도구야? 왜 시집 못 보내서 안달인데?”
주경은 짜증이 났다.
실은 자진해서 그만둔 게 아니었으니까. 안 그래도 자존심 상해 죽겠는데, 불난 데 부채질을 하는 엄마 때문에 더 신경질이 났다.
세림백화점 인사팀에서 경고를 해 왔다. 자진 퇴사하지 않으면 권고사직 처리하겠다고. 잘리는 것보단 스스로 그만두는 게 모양새가 낫기에 주경은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게 다 윤해주 때문이다.
주경은 인사팀에 있는 지인에게 전해 들었다. 우상 회장 아들이 컴플레인을 걸었다는 것을.
그것도 세림백화점 대표에게 직접 연락을 했단다.
윤해주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이게 다 그 계집애 때문이다.
그것만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주경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분한 마음을 삭였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안보혜 그 여자 어디 사는지 아는 사람 없어?”
“안보혜?”
이번엔 해숙의 표정이 구겨졌다.
안보혜. 바람을 밥 먹듯이 피우던 전 남편이 가장 정성을 들였던 여자였다.
질투심이 끓어오를 만큼 청순한 얼굴과 남자를 홀려 대던 눈웃음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열불이 터졌다.
그 전에도 자잘하게 여자를 사귀고 헤어졌던 전 남편은 이상하리만큼 그 여자에게 집착했다.
유부남이 애인 갖는 걸 당연하게,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인간이 철저히 미혼인 척했고, 가진 돈을 다 바치려 들었고, 유부남인 걸 들키고 버림받은 뒤엔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 뒤에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다른 여자를 만나 아들까지 가졌지만, 해숙은 확신한다.
전 남편을 유흥업소에서 술만 퍼마시게 만들더니, 결국 정신 못 차리고 사업까지 말아먹게 만든 원인은 안보혜 그 불여시라는 걸.
“몰라. 사라진 지가 몇 년인데.”
“하긴. 알았으면 엄마가 먼저 가서 머리끄덩이 잡았겠지. 그래도 마트 아줌마 그 여자랑 친했잖아. 소식 모르나?”
“모를걸? 어린놈이랑 나른 뒤로 뚝 끊겼다던데.”
주경은 짜증 났다.
좋은 생각까진 났는데 그걸 실행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주경은 보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윤해주가 재벌을 만난다는 걸 돈 좋아하는 그 여자가 알면 참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돈 앞에서는 자존심도 자식도 없던 여자였으니, 윤해주 앞에 나타나 충분히 망신을 줄지도 몰랐다.
그럼 자연스럽게 둘은 헤어질 테지.
어차피 재벌이 평범한 여자를 만난다는 건 소설이나 드라마 속 신데렐라 같은 얘기다. 그러니 가만히 둬도 조만간 헤어지겠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더 빨리 헤어지게 만들어야 주경은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사람 찾는 업체를 이용해 볼까?
그런 업체가 실제로 존재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느 순간이었다. 주경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밥 먹다 말고 어디 가?”
해숙이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책상 서랍 맨 위 칸을 열어 모아 둔 명함을 죄다 꺼냈다.
책상 위에 착 펼쳐 하나씩 골라내던 주경은 이내 파란색 명함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기업 총수나 임원들, 국회 의원, 부동산 재벌, 전문직 종사자.
주경은 VVIP라운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또 퍼스널 쇼퍼로 3개월을 일하는 동안 다양한 고객들에게 명함을 받았다.
찾는 물건이 나오면 바로 연락 달라고 명함을 내민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음흉한 마음을 품고 건넸다.
심심할 때 연락 달라는 은근한 대시부터 대놓고 스폰을 해 주겠다는 말까지.
주경은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멘트를 날리던 중년 남자를 떠올렸다.
‘퍼스널 쇼퍼 한 달 차라니까 내가 센스 없는 거 이해해 주는 거야. 그래도 살가워서 보기 좋네. 사람 상대하는 거 힘들어지면 연락해. 편히 살게 해 줄 테니까.’
흔해 빠진 대사 뒤에 그는 말을 덧붙였다.
‘내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주경의 다리를 대놓고 쳐다보면서.
그는 결연금융 대표였다. 조폭 기업에서 시작해 제3 금융 회사로 몸집을 키운 결연금융. 주경이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쇼핑 내내 회사를 어떻게 중견 기업까지 키워 왔는지 떠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과거엔 돈을 빌려 가고 안 갚은 사람들 잡아다 인생 완전히 망가뜨려 주는 게 특기였다고 했다.
지금은 법을 지키지만, 거침없던 과거가 그립다고 했었다.
자랑할 게 없어서 조폭이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나 싶어 당시엔 우스웠는데, 지금 주경은 그때 그의 말이 솔깃했다.
핸드폰을 들고 명함 속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갔고, 이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그에 상반되게, 주경은 눈웃음을 지으며 살랑살랑 목소리를 냈다.
“사장님, 저 두 달 전 쇼핑 도와드린 세림백화점 퍼스널 쇼퍼 권주경입니다. 기억하세요?”
-권주경?
“빨간 립스틱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셨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빨간 립스틱? 아아, 그 말 하니 이제 기억나네. 무슨 일이야?
주경은 여전히 존중 따위 없이 반말하는 그가 못 배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잘 배우고 가난한 남자보단 못 배우고 돈 많은 남자가 더 낫다고 여기며 말했다.
“대표님 생각이 나서요. 저 일 그만뒀거든요.”
그래서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시간 되실 때 한번 뵐 수 있을까요?”
한때 조폭이었고, 거침없이 살던 사람이라면 사람 찾는 데 일가견이 있지 않을까.
잠깐 만나면서 윤해주 엄마를 찾는 데 도움 좀 받고, 헬스장 1년 치 회원권 끊어 달라고 애교 좀 부리고, 거기서 만날 남자와 데이트할 때 입을 옷하고 가방 좀 뜯어내고.
늙은이 상대는 피곤하겠지만, 그럼에도 썩 괜찮은 생각이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