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두 사람은 밥을 먹곤 인근 카페로 이동했다.
갤러리 안에서 운영하는 카페로, 인테리어가 모던하고 깔끔했다.
해주와 지한은 각자 취향대로 주문한 커피를 앞에 두고 마셨다.
대화를 하다가 창밖 작은 중정을 보고, 또 벽에 걸린 미술품을 구경하면서 커피를 마시다가, 또 대화했다.
시시콜콜한 대화도 즐거웠다.
해주로서는 관심 없는 미술품 얘기도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대화였다.
세상 곳곳이, 사물 하나하나가 설레고 행복하게 보였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각자 주문한 커피가 반쯤 남고, 디저트로 주문한 케이크도 반 정도 먹었을 때였다.
“컨디션은 어때요?”
지한의 물음에 해주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좋아요. 벌써 세 번째 물어보시는 거 아세요? 저 한때 열 잘 안 나는 게 자랑이었어요. 그러니 아플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해주의 자신감에 지한도 입매를 둥글게 말았다.
“다행이네요.”
“근데 저희 연애하는 거면…… 앞으로 전무님께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내려 드려도 될까요? 예전처럼요. 꼭 회사에서 드셔야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요.”
해주는 고민했다. 지한에게 받은 건 많은데 준 건 하나도 없어서.
예전처럼 매일 아침 커피라도 내려 주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번거롭지 않다면 고맙죠.”
“저는 전무님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어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전무님은 다 가지고 계시고.”
지한은 해주의 마음이 고마웠다.
여태 잘해 준 것도 없는데, 그를 신경 써 주고 뭐든 주고 싶어 하는 게 참 마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럼 고맙게 마실게요. 그동안은 일부러 안 마셨어요. 윤해주 씨 생각날까 봐. 내가 마시는 건 윤해주 씨가 알려 준 커피니까요.”
“아, 그런 이유인 줄 몰랐는데…… 이제 제 커피 마시면서 매일 생각해 주세요.”
“그럴게요. 안 마셔도 내내 생각하겠지만.”
지한이 입매를 둥글게 말아 올리곤 말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호칭은 편하게 하는 게 좋겠네요. 앞으론 편하게 부를게요. 윤해주 씨도 나 편하게 대해요.”
“그럼…… 지한 씨라고 불러도 돼요?”
막상 부르고 보니 해주는 낯간지러웠다.
과거에는 상무님, 지금은 전무님. 늘 그의 직위로 지한을 불렀었다.
지한과 결혼하기로 한 뒤엔 이따금 아정이나 지한의 외조부에게 ‘지한 씨’라고 호칭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직접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불러요.”
지한이 가볍게 웃고는 말했다.
“해주 씨, 앞으로 서운하게 하는 일 없게 늘 잘할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지한의 입에서 나온 해주 씨, 그 호칭엔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한이 자신의 성을 빼고 이름만 부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끝이 있는 만남이지만 그래도 좋다.
1년. 그 시간 동안 지한이 자신을 올곧게 바라봐 준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헤어지는 날까지 오늘처럼 소소하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와 이별하고 꺼내 볼 수 있는 추억이 많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
남해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짐을 싸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지한이 원한다면 한 이틀은 더 있어도 좋다고 했지만 해주는 거절했다.
지한에게 얼마나 바쁜 시기인지 알기에, 그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다음에 또 오자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만으로도 해주는 행복했다. 앞으로 지한과 또 여행 가는 날을 기다리며 설렐 수 있으니까.
체크아웃을 했고, 벨 보이의 도움을 받아 짐을 싣고서 지한과 해주는 이만 리조트를 벗어났다.
지한과 해주는 해남에서부터 내내 손을 맞잡았다. 광주 공항까지, 또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차를 타고 한남동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다정한 연인이 되어서 돌아온 집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제야 정말 신혼집 같다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지며, 밤새 또 서로를 안았다.
***
“신혼여행은 어때, 재밌었어요? 신혼부부한테 하기엔 적절하지 못한 질문인가? 다 재밌을 텐데.”
닷새 만에 보는 오 여사의 질문에 해주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네, 다 재밌었어요.”
다시 떠올려도 참 좋았다. 마지막 이틀이 근 몇 년, 해주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 여사와 대화하다가 무언가 떠올린 해주는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봉지 하나를 꺼내는데, 마침 김치를 꺼내기 위해 냉장고로 왔던 오 여사가 물었다.
“그건 뭐예요?”
“아, 세발나물이요.”
“세발나물? 무쳐 먹으면 맛있는데.”
오 여사의 반가운 표정에 해주는 물었다.
“여사님도 좋아하세요?”
“나 남해 살 때 자주 먹었거든.”
“양념장도 있어요. 넉넉한데 퇴근하실 때 좀 가져가세요.”
해주가 양념장도 마저 꺼내자 오 여사는 물었다.
“사 온 게 아닌가 보네요?”
“남해에서 살 때 일하던 카페 사장님이 챙겨 주셨어요.”
“그래요? 직접 만든 양념장이 맛있지. 그럼 고맙게 가져갈게요.”
오 여사가 양념장을 마저 받아 들며 말했다.
“앉아 있어요. 내가 무쳐서 상에 놔 줄게.”
“감사합니다.”
해주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았다. 오 여사가 큰 볼에 세발나물을 적당히 넣고 양념장을 덜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
샤워를 마친 지한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해주를 발견하곤 입매를 둥글게 말았다.
“일찍 일어났네요.”
“왠지 눈이 일찍 떠졌어요.”
해주의 말에 지한이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밥 같이 먹어요. 준비하고 나올 테니.”
“네.”
***
지한이 옷방에서 다시 나왔을 땐 식탁이 어느 정도 차려져 있었다.
밥과 국을 푸기 전, 오 여사는 마지막으로 세발나물에 양념장을 적당히 부어 버무렸다.
그리고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조금 집어 맛을 보는데, 오 여사가 고개를 갸웃댔다.
정수기에서 물을 뜨던 해주가 그 모습을 발견하곤 물었다.
“왜 그러세요?”
남해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는 길이 멀었다.
광주까지 가 비행기를 타고 다시 서울로 왔지만 그래도 3시간을 이동했다.
호텔 냉장고에서 보관했고, 오는 동안엔 호텔에서 얻은 얼음으로 시원하게 해 가지고 왔었지만 그래도 날이 따뜻해 쉬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 아니. 그냥 어디서 많이 먹어 본 맛이네. 뭐, 양념장이 거기서 거기겠죠.”
오 여사는 좀 찝찝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식사를 차렸다.
지한과 해주는 마주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오늘 뭐 할 거예요?”
지한의 물음에 해주는 숟가락으로 국을 뜨며 대답했다.
“집에 있으면서 짐 정리 좀 하고, 쉬려고요.”
“그래요. 멀리 다녀와서 피곤했을 테니 좀 쉬어요.”
“지한 씨는 못 쉬어서 어떡해요? 피곤하겠어요.”
해주의 걱정에 지한은 괜찮다며 웃었다.
“괜찮아요. 쉬면 오히려 불안해서 출근하는 게 나아요.”
아쉬운 건 해주를 저녁까지 못 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오 여사 앞에서 낯간지러운 진심을 꺼내기가 어려워 그는 대신 물었다.
“주말에 데이트 나갈까요? 같이 가고 싶은 원 테이블 식당 있어요.”
“좋아요. 한 번도 안 가 봤는데 기대돼요.”
서울에서 하는 데이트는 얼마나 설렐까. 해주는 기대했다.
두 사람은 이내 비슷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해주가 먼저 말했다.
“커피 내려 드릴게요.”
“고마워요.”
지한의 말에 해주가 행복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지한의 것을 먼저, 다음으론 오 여사의 커피도 내렸다. 커피 두 잔을 쟁반 위에 놓고, 설탕도 챙긴 뒤 해주는 오 여사에게 먼저 다가가 머그 컵을 내밀었다.
“여사님, 커피 드세요.”
그때까지 세발나무 무침을 하고 있던 오 여사가 해주를 바라봤다.
“아, 고마워요.”
해주는 순간 의아했다. 커피를 받아 드는 오 여사의 표정이 여전히 찝찝해 보여서.
하지만 오랜만에 제 커피를 기분 좋게 마셔 주는 지한이 있어 금세 그 부분을 잊고 말았다.
곧 지한이 출근했다. 해주는 그를 현관까지 배웅하며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오 여사는 제 앞에 세발나물 무침을 두고 멍하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사님, 정말 상한 것 같으면 안 드셔도 괜찮아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오 여사는 말을 잇지 않았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에 해주는 더 묻지 못하고 오 여사가 선물했던 한약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평소엔 오 여사가 챙겨 줬지만, 오늘은 직접 챙겨야 할 것 같았다.
그대로 해주가 전자레인지로 향했을 때였다.
“아, 잠깐!”
그제야 해주를 돌아본 오 여사가 말했다.
“네?”
갑작스럽게 들려온 외침에 해주가 걸음을 멈추고 오 여사를 쳐다봤다.
해주의 손에 들린 한약을 보며 오 여사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마셔요. 건강에 좋은 거니 쭉 들이켜요.”
“아, 네…….”
오늘따라 오 여사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해주는 한약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금세 따뜻하게 데워진 한약을 다 먹고, 사탕까지 한 알 물었을 때였다.
“해주 씨, 남해에서 일했던 카페가 어디예요?”
문득 오 여사가 물었다.
“저 일했던 카페요? 잘 모르실 텐데…… 미르마을이라고 좀 작은 곳이에요.”
“미르마을?”
오 여사가 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카페 사장님 이름은 알아요?”
“사장님 성함이요?”
해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답했다.
“오영란 사장님이요. 근데 그건 왜요?”
“아니. 아니에요. 내가 남해에서 먹던 세발나물 무침이랑 맛이 비슷해서 물어봤어요.”
오 여사가 손을 내저었다.
“빨래해야겠다. 그럼 쉬어요.”
착각일까. 해주가 보기엔 세탁실로 향하는 오 여사의 표정이 좀 착잡한 것처럼 느껴졌다.
늘 여유로워 보이던 태도가 오늘따라 좀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
리조트 개발팀 오전 회의를 마치고 지한이 회의실을 나섰을 때였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지한을 따라 나와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윤이 물었다.
“그래 보여?”
“회의 내내 웃고 계시던데요?”
윤이 제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지한을 따라 했다.
“이렇게 웃으시면서 회의에 집중도 크게 못 하셨던 것 같구요.”
윤의 말에 지한은 오늘 아침 현관까지 자신의 출근길을 배웅한 해주를 떠올렸지만, 굳이 말하진 않고서 물었다.
“점심 뭐 먹을래? 나가서 먹지.”
“나가서요? 그럼 저 호텔 한식당 가고 싶은데요.”
주저 없이 윤은 대답했고, 지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해.”
“아싸! 오랜만에 보양식 든든하게 먹어야겠어요.”
“예약해 둬. 사무실 들렀다가 바로 가지.”
“넵. 알겠습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