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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40화 (40/68)

40화.

상대적으로 술이 덜 취했었던 윤. 그는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싶었을 테고, 아정이 잠든 걸 확인하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을 거다.

굳이 문을 잠글 필요성을 못 느꼈을 거다. 아정이 잠든 걸 확인한 뒤였으니.

그러니 그가 아정이 문을 벌컥 열고서 자신을 구석구석 훑을 걸 꿈에라도 예상했을까.

한데 취기가 가득한 눈으로 봐도 바람직한 몸매였다.

전무를 따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걸로 아는데, 대체 운동을 언제 했기에 가슴 근육과 복근이 저리도 예쁠까.

아정의 시선이 너무 적나라했던가. 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빨리 문 닫고 나가라고 울부짖었지만, 만취한 아정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아정은 술주정이 조금 있었다. 19금 영화나 소설을 즐겨 볼 만큼 변태적인 성향도 조금 있었다.

그렇기에 술을 마시니 저 복근과 가슴팍, 단단하고 길쭉한 팔다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정은 푸스스 웃었다.

아까 고기 구울 때도 팔뚝이 장난 아니더니. 아주 온몸 곳곳이 탐스러웠다.

꿈에서만 그리던 이상형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니.

윤은 그런 아정을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며 절규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웃음은 뭔데요? 웃지 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윤이 급기야 뒤를 돌았다. 아정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말똥말똥 빛냈다.

‘여자 친구 있어요?’

‘뭐요?’

‘여자 친구. 있냐구요.’

‘어, 없어요! 그게 뭐요!’

‘나랑 잘래요?’

‘……네?’

‘나랑 자자구.’

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정은 씩, 미소 짓고는 망설이는 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정이 고개를 들어 윤과 시선을 마주하고 배시시 웃었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윤은 그대로 아정에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그 뒤에 참 많은 일을 했더랬다.

“미쳤어, 미쳤어!”

아정은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도망가 버릴까? 그리고 앞으로 윤을 모른 체하면 오늘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정은 고개를 쓱 옆으로 돌려 다시 한번 윤을 바라봤다.

밤새 원기 충전이라도 한 건가? 윤의 얼굴이 번쩍번쩍 광이 나 보였다.

“몸정이 이래서 무서워. 한 번 잤다고 괜찮아 보이는 건 뭐야.”

윤은 아정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좀 능글맞거나 아니면 어느 무리에서나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호쾌한 인상의 남자를 선호했다.

이렇게 학창 시절 반장만 도맡아 했을 것 같은 사람에게 끌려 본 적이 없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아정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야. 무슨 생각 해. 아니야. 한 번 잤다고 다 사귀어?”

무엇보다 4년 사귄 남자 친구와 이별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헤어진 연인 간에도 지킬 의리가 있는 법!

그러니 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일단 호텔부터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아정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윤이 깨지 않도록 이불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으며 조심히.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속옷부터 주워 입고, 치마부터 블라우스까지 전부 갖춰 입었다.

창가 소파에 놓인 가방까지 주워 든 아정이 다시 침대 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으악!”

아정이 몸을 크게 들썩이며 비명을 질렀다.

“내빼요?”

윤이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아정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

해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을 둘러보는데 새벽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제 방은 커튼을 열어 두어 아침에 햇빛이 잔뜩 들어왔는데, 창가를 바라보니 암막 커튼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제야 해주는 제 방이 아닌 걸 깨닫고서 옆을 돌아봤다.

지한은 없었다. 그녀는 시계 기능이 탑재된 협탁 위 전화기를 쳐다봤다.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그제야 해주는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렇게 늦게 일어난 날이 없었는데.

“나 얼마나 잔 거야? ……전무님은 어디 가셨지?”

새벽, 해주는 지한의 품에서 잠들었었다. 중간에 일어나 지한의 상태를 확인하니 여전히 고열이 나는 것 같아 그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두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를 구석구석 쳐다봤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 자신을 매만지던 손가락들. 그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얼떨떨하다가 다시 마음이 벅차올라 미소 짓기를 반복했다.

적어도 그의 열이 내릴 때까진 간호하려고 했는데 대체 언제 잠든 건지 모르겠다.

해주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그녀는, 지한이 두었는지 침대 아래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발견했다.

혹시나 또 마음이 급변해 갑자기 서울로 떠나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제야 다급했던 마음이 진정되었고, 또 좀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슬리퍼를 가지런히 놓아 준 건 신경을 써 줬다는 뜻이니까. 적어도 그가 어젯밤 일에 대한 예의를 지켜 준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때, 방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마도 지한은 거실이나 다이닝 룸에 있는 모양이었다.

해주는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방문을 열었다.

그가 어젯밤 일을 실수였다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

지한은 다이닝 룸 테이블에 앉아 일을 하는 중이었다.

노트북으로 결재 요청 서류를 확인하던 그는 카펫 위에서 끌리는 슬리퍼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해주가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 조심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지한이 입매를 둥글게 말아 올리며 인사했다.

“일어났어요?”

그 다정한 인사에 해주는 웃음 지으며 더 가까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결재해 줘야 할 서류가 있어서 잠시요. 이제 끝났어요.”

지한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노트북 화면 속 창들을 끄기 시작했다. 해주는 그의 맞은편 자리 의자를 빼 앉으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새벽에도 열 계속 나시던데.”

“덕분에 가뿐해졌어요. 그냥 잠 푹 자지 왜 간호했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지한은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보았던 해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분명 같이 잠자고 있었는데, 그때 해주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상체는 침대 쪽에 엎드려 지한의 옆구리 쪽에 머리를 대고 잠자고 있었다.

열을 재며 물수건을 갈아 주다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그 모습에 지한은 고맙고 미안했다.

“나한테 감기 안 옮았어요?”

“다행히 안 옮은 건지, 아직 티가 안 나는 건지 지금은 괜찮아요. 감기 걸리면 저처럼 간호해 주실 거예요?”

해주의 가벼운 질문에 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그래도 조심해요. 오늘 하루 무리하지 말고.”

지한의 걱정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오늘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니면 가고 싶은 곳이나.”

“오늘요? 어…… 전무님 일정 있지 않으세요?”

“취소해도 상관없는 일정이라. 말해 봐요.”

오로지 해주 때문에 잡은 일정이었다.

의도치 않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해주에게 선을 긋기 위해. 가까워진 제 마음을 도로 물리기 위해.

그러나 이미 마음은 물꼬를 텄다. 되돌릴 수 없기에 해주에게 그동안 감춰 왔던 마음을 전부 끄집어내 잘해 줄 생각이었다.

해주는 정말 원하는 걸 말해도 될까, 고민했다. 한 가지, 지한과 같이하고 싶은 게 있기는 했다. 남해에 와서 줄곧 그와 한 번은 꼭 해 보고 싶었던 것.

“전무님이랑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요.”

“밥 한 끼? 집에서도 먹잖아요.”

의아한 듯한 지한의 말에 해주는 그 뜻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남해에서요. 그래도 신혼여행이니까 전무님과 마주 앉아서 식사 한 번은 같이하고 싶었거든요. 바쁘다고 하셔서 좀 아쉬웠어요.”

너무도 소박한 요구였다.

지한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이왕 먹는 거 뷰 좋은 식당 찾아보죠.”

“나가서요?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호텔에서 먹어도 괜찮은데.”

“피곤하지 않으니 걱정 마요. 12시에 나가도록 준비할 수 있어요?”

“네, 할 수 있어요.”

해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상기됐다.

기분 좋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지한은 미소 지었다. 한편으론, 자신의 한 마디에 기뻐하는 해주를 보니 고민이 많았다.

연애하는 동안 제가 해주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지, 일이 바빠 그녀를 서운하게 만들지는 않을지.

물론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기에 지한은 일단 해 줄 수 있는 것부터 해 주기로 했다.

오늘은 특히 해주에게 기분 전환을 시켜 주고 싶어 그는 덧붙여 말했다.

“준비하면서 다른 거 더 하고 싶은 것도 생각해 봐요.”

해주는 설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

지한의 안내로 식당까지 이동했다.

차로 20분쯤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고, 이내 지한이 차를 멈춘 곳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1층짜리 하얀 건물이었다.

창가 자리에서 보는 풍경이 참 예쁘기로 유명한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지한이 땅을 사러 다닐 때 부동산 개발 사업자가 나중에 여자 친구랑 와 보라며 추천했던 식당이었다.

남해로 신혼여행을 오면 꼭 밥 한 끼 해야 하는 곳이라고 했을 땐 갈 일이 없겠다 싶었는데,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지한은 해주를 이곳에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건물이 예쁘고, 풍경도 좋고. 무엇보다 배정받은 창가 자리에 앉아 해주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문하실 때 벨 눌러 주세요.”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자리를 안내한 직원이 메뉴판과 물을 내려 두며 말했다.

곧 직원은 자리를 떠났고, 지한이 메뉴판을 펼쳤다.

“천천히 골라요.”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맛있을 것 같아서 고르는 데 힘들 것 같아요.”

“먹고 싶은 거 양껏 주문해요.”

해주는 메뉴판을 천천히 살폈다. 메뉴는 전부 맛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 지금 식사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았으니까.

지한과 함께 있는 시간이 꿈같고 행복해서 이미 배부른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표현을 여태 이해하지 못했는데 겪어 보니 속이 참 꽉 찬 느낌이 드는구나, 싶었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경험해 봐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해주는 말했다.

“전 해물 오일 파스타 먹을게요.”

“하나로 되겠어요?”

“네, 충분해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지만, 지한은 영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든든하게 먹이고 싶었다는 듯한 표정을 읽고서 해주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식사하고서 카페…… 어떠세요?”

질문하자마자 그녀는 지한의 상태를 슬쩍 봤다. 바로 오늘 새벽까지 아팠던 그가 피곤해하거나 싫어하면 곧장 됐다고 말하려고.

다행히 지한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식사 끝내면 카페 찾아보고 이동하죠.”

“맛있는 원두 쓰는 곳으로 찾아볼게요.”

“그렇게 해요.”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요리가 나왔다.

해주의 앞엔 해물 오일 파스타, 지한의 앞엔 슈림프 크림 리조또가 놓여졌다.

“왜 그러세요?”

포크를 집어 들던 해주가 문득 지한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지한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미소 지은 표정 그대로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물과 함께 삼키려던 말을 다시 뱉었다.

“기분 좋네요. 윤해주 씨와 나와 있으니까.”

지금 그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늘어지고 피곤한데, 기운이 났다.

해주의 앞에선 티 내지 않고 있지만, 사실 컨디션이 아주 좋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기분은 가뿐했다.

한순간 터진 마음. 한순간 가까워진 거리.

여태 해주를 밀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지한은 그녀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적어도 이혼하는 날까진.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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