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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39화 (39/68)

39화.

“마음이 깊어질까 봐 절 외면하셨던 거면, 지금은 왜 안으셨어요?”

해주가 다시 물었다. 그의 마음을 샅샅이 알고 싶어서.

함부로 방에 들어왔다고 화낼 줄 알았는데, 그 대신 키스한 그 마음이 궁금했다.

“이성이 끊겼어요. 열 오르니 아무 생각이 안 들었고, 그냥, 윤해주 씨만 보였어요.”

“그랬구나…… 저한텐 아프셔서 다행이네요. 아니었으면 남해에서 돌아가는 날까지 전무님 생각하면서 속앓이할 뻔했어요.”

“그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윤해주 씨 마음 생각 못 하고 내 감정만 생각했네요.”

해주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지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하고 연애하는 거, 쉽지 않을 겁니다.”

지한은 연애라고 말했다.

결혼 생활을 하고는 있어도, 서류상 부부여도 감정이 통한 적은 없었으니까. 해주와 이제 시작한다면 연애 감정을 가질 테니까.

“쉽지 않다는 건……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일이 바쁠 테고, 그러니 데이트할 시간은 적을 테고. 무엇보다 이혼은 예정대로 해야 합니다. 기한을 두고 하는 연애는 마냥 좋을 리가 없죠.”

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는 듯이.

잠자리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음에도 지한은 해주에게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이성을 잃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키스했을 만큼 온몸으로 널 원한다고. 뜨거운 감정을 함부로 뱉어 낼 수 없었다.

“서로 마음이 있는 걸 확인했어도 이혼해야 하나요?”

해주는 물었다. 이유를 말해 주면 체념하겠다는 듯, 큰 동요 없는 말투와 표정을 하고서.

“난 결혼하고 맞지 않는 사람이에요.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우상전자 대표 자리. 그 목표가 있어 다시 우상전자로 간다면 일에만 몰두하고 싶어요.”

지한은 말했다. 제 마음을 속이고 거짓으로.

다만, 결혼을 유지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소중한 사람일수록 잃을까 봐 두렵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한은 어머니를 외롭게 만든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토록 욕심냈고, 또 아직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욕심내는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꼭 앉을 생각이었다.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가족을 외면한 아버지와 다른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그 자리를 원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 미래는 오지 않았고, 그가 아버지와 같아지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보장도 없었다.

아무리 증오해도 결국 같은 핏줄이니까.

만약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상황에 놓여 가족을 버리고 싶어진다면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미칠지도 몰랐다.

해주에게 이런 얘기까진 하지 않는 건, 그녀에게 동정심을 얻고 싶지 않으니까.

해주라면 그의 불안정함도 이해하고 곁에 있어 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녀가 손을 내민다면 지한은 분명 그 따뜻함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었다.

해주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 역시 욕심을 크게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지한이 좋아한다고 말을 해 주었고, 마음이 통했으니 그거면 됐다.

과거 큰 잘못을 했던 자신에게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그에게 참 많은 것을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이혼해요. 저도 전무님께서 목표를 꼭 이루시길 바랄게요. 전무님과의 연애가 힘들어도 괜찮아요. 혼자만 좋아하는 것도 정말 많이 힘들었으니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어요.”

해주도 이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단 지한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서운하니, 그 마음을 달래고자 해주가 말했다.

“저…… 오늘 이 방에서 자도 될까요?”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기엔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지한의 마음이 변할까 불안해서.

“여기서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 몸이 안 좋아서 푹 쉬셔야 하는 거면 건너가고요.”

“쉬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열 옮길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그건 이미 옮으려면 다 옮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지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자 해주가 말했다.

“아, 그리고 저 해열제 받아 뒀어요. 약 드시려면 먼저 뭐라도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좀 늦었지만, 룸서비스 시켜서 저녁 같이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해주는 고민했다. 크게 입맛은 없는데 몸을 많이 쓰고 땀을 많이 흘려서 배는 고팠다.

“크게 먹고 싶은 건 없고, 먹는다면 밥 종류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내가 괜찮아 보이는 걸로 시켜 놓을게요. 방에서 씻는 게 편하죠? 샤워하고 거실로 올래요?”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수줍게 말했다.

“잠시만 뒤돌아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옷 좀 입고 가고 싶은데.”

지한의 시선을 피해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여태 뜨거운 몸을 맞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혼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서 방을 나서는 건 다른 문제였다.

지한이 뒤를 돌아 주자 해주는 서둘러 옷을 갖춰 입었다.

“그럼 조금 이따 봬요.”

해주가 방을 나섰다.

그는 해주가 건너편 방문을 열 때까지 지켜보다가 룸서비스를 시켰고, 아직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그는 눈을 감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좀 뜨겁다 싶을 만큼 따뜻한 물이었음에도 그가 뱉는 숨의 온도가 더 높았다.

여전히 열이 높다. 다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은 사라졌다. 해주와 짙게 입맞춤한 그때부터.

신기하지. 여느 때보다 두통이 심했는데.

이틀 내내 그를 괴롭히던 고통이 마치 마음과 달리 해주를 억지로 밀어내 생긴 거라는 듯, 그녀를 안자마자 고통 따윈 잊혔다.

그는 손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물줄기가 쏟아져 잠시 감은 눈 위로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2년 전. 그녀가 사라진 순간부터, 그녀의 행적을 좇고, 정착한 곳을 알아내고, 지켜보다가 다시 찾아간 것.

미련만 남은 마음, 1년 정도 같이 살며 다 털어 내자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깊어지던 제 마음. 그리고 뒷일을 생각도 못 하고 미친놈처럼 폭주해 버렸던 조금 전.

지한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며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서, 해주를 차갑게 외면하며 상처 줬던 날들이 후회된다.

지한이 샤워 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가볍게 털고,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룸서비스가 도착했는지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크리스피 베이컨 오믈렛과 소고기죽, 과일을 주문한 차였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으니, 이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해주도 거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앉아요.”

“빨리 왔네요.”

해주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메뉴를 보았다. 그리고 지한의 몫으로 주문한 죽을 보며 물었다.

“소고기죽이에요?”

“죽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늘은 먹고 싶네요.”

지한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처럼 아플 때 누가 끓여 준 거 생각나서요.”

해주는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2년 전, 지한이 오늘처럼 아팠던 날 해주가 죽을 끓여 준 적이 있었다.

처음 끓여 보는 죽이라 맛이 없었을 텐데 지한은 덕분에 기운이 난다며 죽 그릇을 다 비웠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잊을 수 없던 맛이라서.”

“맛은 좀 없었죠?”

해주가 머쓱하게 묻자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맛있었어요. 매년 이맘때면 생각났을 만큼.”

“그랬다면 다행이에요.”

이제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어색하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해주가 오믈렛을 천천히 씹는데, 지한이 말했다.

“오늘은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 아픈 거 생각 못 하고 윤해주 씨 안았어요.”

지한의 목소리엔 자책감이 깃들어 있었다.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전, 좋았어요. 그리고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잖아요. 제가 옮았으면 전무님은 빨리 낫고 간호해 주세요.”

“그럼, 다 나을 때까지 성심성의를 다하죠.”

지한이 미소 지었다.

해주를 위해선 마음을 끝까지 숨겼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해주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생각했다.

***

아정이 눈을 번쩍 떴다.

말 그대로 번쩍. 놀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은 떴지만 막 잠에서 깬 터라 비몽사몽간이었다.

방 천장도 하얀색, 눈앞에 보이는 것도 하얀색. 방 전등갓도 둥글고, 이것도 둥글고…….

눈을 굴리며 하나씩 확인하는데 문득 그녀의 표정에 망연자실, 네 글자가 떠올랐다.

시야가 또렷해지며 깨달았다. 천장 벽지는 하얗지만 고급스러운 펄이 들어가 있었고, 전등갓은 둥근 모양만 같지, 그녀의 방에 있는 것과 디자인이 완전 다르다는 걸.

아정은 확인하기 싫다는 듯 곁눈질로 옆을 돌아봤다.

옆자리에 상의를 탈의한 채 세상모르게 잠자고 있는 윤을 확인한 그녀는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미쳤네.”

잤다. 확실했다. 술 취해서 옷만 벗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될뿐더러, 망할 놈의 기억이 생생하니까.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6시였다. 어제 마지막으로 술집에서 시계를 확인했던 게 자정 10분 전.

두 번 중 한 번은 꽤 길게 했으니까 두 시간쯤 했을 테고, 그럼 3시간 겨우 잤나.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기분이라 아정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다시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이미 일어난 일, 되돌릴 수 없는데 어쩌겠나.

일단 숙취와 밤새 한 일로 얻은 근육통, 그리고 피로까지 겹친 몸을 좀 쉬어 줘야 할 것 같아 다시 자 보려고 했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계산 감사하니까 2차! 진짜 내가 쏠게요.’

‘비서님 나 잡아 봐라! 아니면 같이 달리든가! 아, 신나!’

‘술 먹고 운전을 어떻게 해요! 대리? 대리는 무슨! 나랑 자고 가요. 모텔은 싫으니까 호텔로 고고!’

‘아! 안 건드려. 뭐 볼 게 있다고 건드려요?’

아정이 경악하며 다시 번쩍 눈을 떴다.

“완전 개…… 진상이었잖아?”

떠오른 기억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싱글 사이즈 침대 두 개가 들어간 방을 빌렸고, 아정은 주량을 넘긴 탓에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한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대로 잠들었던 그녀는 갑자기 올라오는 구토 증상에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본의 아니게 보았다.

손으로 다급하게 중요 부위만 가린 윤의 몸을.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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