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예상하지 못한 짙은 키스에 해주는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눈을 감았다.
타액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침실을 메웠다. 고열에 시달린 지한 때문에 안 그래도 더웠던 방의 열기가 더 강해졌다.
지한이 천천히 해주를 침대에 올라오게 만들었다. 이내 해주를 아래에 눕힌 그는 점차 그녀와 아무렇게나 뭉개지고 뒤섞였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그동안 외면했던 사람이 맞나 싶도록 지한은 해주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해주는 숨이 막혀서, 또 자극적인 감각에 발끝을 오그라뜨렸다. 아랫배가 저릿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랬다.
몸은 뜨거웠다. 지한의 열이 옮은 건지, 아니면 지한의 눈에 담긴 열기에 몸이 달아오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한의 손이 닿아 있는 볼은 또 어떻고.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에 몇 번이고 아찔했다.
그날이 떠오른다. 와인에 취해 지한과 잤던 날.
꼭 지금과 같은 키스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날엔 조심스러웠고, 이번엔 대범하다는 점.
지한의 거침없는 키스에 해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제 지한은 해주의 두 볼을 부여잡던 손을 점점 내리기 시작했다.
목뒤를 지나 등을 쓸어내리고, 허리께를 부드럽게 유영하던 손이 이내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손에 힘을 주니 해주가 지한에게 깊게 밀착됐다. 지한은 그대로 그녀를 꽉 껴안고 이번엔 귓바퀴에 입술을 올렸다.
그리고 들려온 간질거리는 속삭임.
“경고했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듣지?”
목이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지한이 물었다.
귓가에 닿아 오는 그의 낮은 음성에 해주는 다시 한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해주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전무님…….”
지한이 이번엔 낮게 한숨을 뱉었다. 고열로 머리가 어지러워 그런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 이상은 하지 않으려고, 참아 보려고 무던히 인내심을 꺼내 보는데 도저히 이성이 본능을 이기질 못해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키스, 피했어야지. 왜 같이 했습니까.”
“……하고 싶었어요.”
질문인 듯, 혼잣말인 듯 높낮이 없는 말투에 해주는 솔직하게 답했다.
지한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음 지었다.
“하고 싶었다?”
그러곤 다시 입꼬리를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윤해주 씨 보면서 참 많이 참았거든. 아파서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그런가. 지금은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은데.”
무언가 인내하는 지한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싫으면, 피해요. 난 도중에 멈출 자신 없으니까.”
이성의 끈이 고열에 모두 불타 버린 듯 지한은 본능만 남았다.
몸이 아픈 것보다 해주를 탐하고 싶은 욕망이 컸다.
몸이 뜨거운 만큼 열정적으로 그녀를 집어삼키고 싶었다.
인내심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했고, 뭐든 잘 참는다고 자신했는데.
윤해주 앞에선 그게 왜 안 되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왜 난 널 용서했고, 집에 들였고, 결혼 상대로 오직 너만 떠올렸을까.
한집에 있어도, 한 침실을 써도 네게 푹 빠지지 않고 1년 후엔 약속대로 널 놔줄 거라고 자신했는데.
왜 한방을 쓰자마자 무리해서 네가 잠자고 있는 시간에 출퇴근하고, 남해에 와서도 방을 따로 쓰며 한시도 쉬지 못하고 널 신경 쓰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머리가 아파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미칠 듯한 욕구를 빨리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
지한이 천천히 해주의 귓바퀴를 핥았다.
간지러움에 해주가 숨소리를 내며 고개를 젖히니 지한은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들어 어깨를 움츠러뜨리는 해주를 보았다.
맹수에게 걸려 목숨을 포기한 초식 동물처럼 애처로워 보였지만, 지한은 그럼에도 봐주고 싶어지지 않았다.
해주 또한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네가 받아들이겠다면 기꺼이 먹어 줘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 목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가늘고 긴 목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얗고 탐스러운 그 목선을 더 보고 싶어 지한은 해주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조금씩 더 드러나는 맨살에 그는 한쪽으로 피가 뻐근하게 몰리는 기분이었다.
“하아…….”
해주의 블라우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한이 천천히 목으로, 어깨로, 쇄골로 입술을 내리자 해주는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가 입으로 물었다 놓은 살점마다 진분홍 자국이 짙다. 그의 체온이 높은 탓인지, 아니면 제 몸이 뜨거워진 탓인지 해주는 그 부위마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좀 무서워졌다.
행위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고, 지한을 제대로 느끼는 게 처음이라 두려웠다.
전에는 술기운이 있었지만, 이번엔 맨정신이었다.
지한이 정성스럽게 제 몸을 애무하고 있는 모습, 즐겨 쓰는 바디 워시 향이 섞인 살냄새, 그가 제 아래로 내려갈수록 보이는 속눈썹, 그가 내는 소리까지 전부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면 어쩌지.
안 그래도 좋아하는 그를 이렇게 또렷하게 느꼈으니 평생 그리워하면 얼마나 괴로울까.
이혼하고서 그를 영영 볼 수 없는 날이 오게 되면 느끼게 될 슬픔이 무섭다고 해주는 생각했다.
지한의 입술이 해주의 브래지어 위에서 멈췄다. 그는 상체를 들어 티셔츠를 벗었다.
눈으론 올곧게 해주를 바라봤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고 경고하듯.
해주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하고 있었으니까.
걱정하는 마음과 달리, 그녀는 빨리 그를 안고 싶었다.
***
4월 말. 이맘쯤이면 지한은 고열에 시달리며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늘 묵묵히 견뎌 냈는데 딱 두 번. 그는 무너졌다.
한 번은 2년 전, 해주가 떠나가기 2주 전이었던 어머니 기일에.
그날, 해주가 방에서 홀로 고독한 아픔을 견디던 지한을 발견하곤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 지독히 아프고 외로운 순간에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닌 해주가 곁에 있다.
그러니 지한은 해주를 깊숙이, 더 깊숙이 안고 싶었다.
외로움을 가득히 채워 주는 해주를 갈망하며.
지한은 제 아래에서 몸을 비트는 해주를 바라봤다.
널 어떡하면 좋을까.
고통도 잊을 만큼 쾌락에 빠진 그는 이 순간에도 마음이 수십 번씩 변했다.
해주를 안을수록 조금씩 되찾아 가는 이성은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본심은 평생 옆에 두라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널 곁에 두어도 괜찮을까.
자신이 상처받는 건 상관없었다. 해주가 그의 곁에서 제 불행함에 힘들어질까 봐 그게 무서웠지.
그 순간, 해주가 두 손을 뻗어 지한의 목을 감쌌다. 얼른 안아 달라는 듯, 그녀가 제 위에 올라탄 지한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다시 겨우 붙잡아 둔 지한의 이성이 끊어진 순간, 지한은 해주의 안으로 끝없이 밀려들었다.
***
“감기 옮았을 것 같은데.”
깊은 새벽,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 둔 어스름한 방 안의 열기가 조금씩 식고 있을 때였다.
지한이 제 품에 안겨 있는 해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해주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각오하고 했는데요. 그리고 저 열 감기 잘 안 나요. 옮아도 크게 아프지 않을 거예요.”
해주는 대답하곤 지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체온은 아직 뜨거운데.”
“한결 가뿐해졌어요. 몸 많이 썼는데 신기하게도.”
신기한 일이지. 여전히 몸에 열은 올랐지만, 지나치게 무리했는데도 두통이 가라앉았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훨씬 나아진 기분이었다.
“땀 흘리셔서 그런가 봐요.”
“아니면 두통의 원인이 사라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두통의 원인이요? ……그게 뭐였는데요?”
해주의 물음에 지한은 한 번 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지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주친 시선에 해주는 안심했다. 눈빛과 말투가 퍽 부드러웠으니까.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차가운 남자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는데,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두통의 원인은 윤해주라고.
“나 아픈 건 어떻게 알았어요?”
다시 지한이 물었다.
“항상 방문 닫고 지내시는데 오늘따라 방문이 열려 있어서 이상했어요. 더군다나 어머니 기일이잖아요. 이땐 꼭 아프시고요. 그래서 들어와 봤더니 힘겨워하고 계셨어요.”
“……어머니 기일.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기억해요. 이것 말고도 다…… 전무님과 관련된 모든 일들 다 기억해요.”
해주의 말에 지한은 잠시 해주를 빤하게 쳐다봤다.
감정을 숨기려 해도 결국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그럴 수밖에.
함께한 모든 일을 기억한다는 해주의 말은 외조부, 호재마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린 지한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한데 왜 그러셨어요.”
그때, 해주가 물었다.
“어떤 게요.”
“남해에 올 때부터 저한테 차갑게 구셨잖아요. 할아버님 뵈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저한테 고맙다고 하셨었는데…… 제가 뭐 잘못한 일 있었나요?”
조금 서러운 목소리에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고맙게 할아버지 챙겨 줬는데 잘못한 게 있을 리가요. 변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좀 거리를 두고 싶었어요.”
“왜, 거리를 두려고 하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좋아서. 마음이 깊어질까 봐. 그래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윤해주 씨 소유하고 싶어질까 봐.”
소유라니. 다소 집착 어린 말에 해주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전무님이 절, 소유요? 저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셨다고요?”
지한은 작게 웃음 지었다.
“전혀 예상도 못 했던 걸 보면 내가 감정을 참 잘 숨겼나 보네요.”
지한의 진심에 해주는 좀 울컥했다.
마음 앓이 한 게 억울해서는 아니었다.
아니,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보단 혼자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었다는 게 좋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