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오, 헤어졌어요?”
윤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정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헤어졌네요.”
“잘됐네. 그 남자 진짜 별로였어요. 남인데도 헤어지길 바랄 만큼. 근데 내 지분이 있다는 건 뭐예요?”
아정은 다시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했다.
“해주 언니 결혼식장에서 그랬잖아요. 헤어지라고.”
“그땐 들은 척도 안 했잖아요.”
“그땐 웬 오지랖인가 싶었어요. 근데, 맞는 말이더라고요. 장재형 정상이 아닌 거.”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니 참 다행이네요.”
아정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물었다.
“안 마셔요? 첫 잔은 원샷인데.”
아정의 시선이 윤의 소주잔을 향해 있었다. 소주가 딱히 당기지 않아 잔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던 윤은 따가운 아정의 눈초리에 그만 잔을 들고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리 마셔도 적응 안 되는 쓴맛에 윤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안전 이별했어요?”
아정은 말 잘 듣는 술친구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안전 이별했죠. 위험한 이별도 있어요?”
“많죠. 위험한 이별. 장아정 씨 남자 친구는 그럴 가능성이 좀 있고요.”
“뭐…….”
아정은 아니라고 받아치려다가 말을 줄였다. 헤어지던 날, 재형이 좀 무섭다고 생각하긴 했었으니까.
해주의 결혼식에 다녀오고 이틀 뒤, 아정은 재형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재형이 결혼식에 다녀왔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고, 그 무례함에 아정은 싫다고 대답했다.
해주와 찍은 사진을 충분히 보여 줄 순 있었지만 벌써 1년째 지속된 의심에 지쳐 오기가 생긴 탓이었다.
그러자 재형의 눈이 한순간 살기를 띠었다. 그가 무서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바람 난 거 아니냐고. 그리고 급기야 더러운 말을 입에 올렸다.
‘맞네, 바람난 거. 어떤 새끼랑 뒹군 사진이 있기에 핸드폰을 안 내놔! 켕기는 게 없으면 핸드폰을 왜 숨기냐고!’
아정은 심히 충격받았다.
유복하게 자라진 못했어도, 부모에게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어도, 또 여태 사귄 남자 친구들과 그렇게 싸워 댔어도 이 정도 막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여태 만난 남자 중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는 건 재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딴 더러운 말이라니!
충격받은 아정은 얼빠진 표정으로 해주와 찍은 사진을 핸드폰에 띄워 재형에게 내밀었다.
보라고. 난 너한테 그런 말 들을 사람 아니라고.
재형은 그제야 방금 자신이 내뱉은 폭력적인 말에 대해 횡설수설 변명했다.
‘아니…… 아, 그러니까 왜 사진을 안 보여 줘. 미안해. 내가 너 너무 사랑하다 보니까 불안해서 그랬어. 방금 한 말 진심 아니야, 용서해 줘.’
1년은 잘해 줘서, 2년은 사랑해서, 나머지 1년은 정으로 만났다.
자그마치 4년. 이제 사랑은 없더라도 단단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다 허무해졌다.
그때 아정은 해주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말 결혼식에 간 게 맞냐고 질릴 만큼 전화했던 재형.
그런 재형과의 통화 내용을 듣고 헤어지라고 진지하게 충고했던 전무 수행 비서 윤.
그때까지 아정의 앞에서 재형을 나쁘게 얘기한 사람이 없었기에 윤의 오지랖이 어이없게만 들려왔었다.
막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윤의 말이 맞는다는 걸. 타인이 봐도 이상했던 거다. 재형의 집착은.
거기까지 생각한 아정은 말했다. 헤어지자고.
재형이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무릎 꿇었지만, 아정은 그런 그를 매몰차게 뿌리쳤다.
이별을 말하고 나서야 아정은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제 사랑이 끝났어도 여전히 사랑해 주던 재형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이런 건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고,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똑 부러지는 게 스스로의 장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놈의 정 때문에 못 헤어져 결국 바닥까지 오고 말았다니, 어리석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윤의 목소리에 아정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껍데기 잘라야겠네요.”
아정이 때마침 알맞게 익은 껍데기를 뒤집기 위해 가위를 들었다. 윤은 손을 뻗었다.
“줘요. 내가 할게요.”
“제가 고른 메뉴니 제가 잘라 드릴게요.”
“됐어요. 나 이런 거 잘 잘라요. 팔 아파요. 어서 줘요.”
윤이 결국 집게와 가위를 받아 들었다. 아정은 그가 껍데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는 걸 지켜보며 생각했다.
마르기만 한 것 같더니, 팔뚝이 장난 아니네.
윤은 아까 식당에 들어와 자리를 잡자마자 셔츠 소매부터 걷어 올렸다. 그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집게를 쥐고 가위질을 하는 양쪽 팔뚝을 보니 오,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저렇게나 힘줄이 툭 튀어나오는 남자는 티비에서나 봤다. 현실에선 핏줄 한 줄 도드라져 보이는 정도나 봤지, 이렇게 힘줄이 남자답게 불거지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윤은 아정의 은근한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열심히 가위질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자른 껍데기 한 점을 아정의 앞접시에 놓아 주었다.
“먹어요.”
“고마워요. 껍데기랑 소주는 어쩜 그렇게 잘 맞는지. 그런 의미에서 원샷하는 거예요.”
“또요?”
아정은 눈썹을 들썩이더니 소주를 먼저 원샷하고 바로 껍데기를 먹었다.
쫀득한 껍데기를 씹으며 아정이 윤을 보자, 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정이 한 것처럼 소주와 껍데기를 먹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아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지.
“나 비서님이랑 진짜 안 맞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술 같이 마시니 은근 재밌네요.”
아정이 살짝 오른 술기운에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뭐, 나도 그래요.”
윤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지만, 좀 걱정이었다.
소주와 껍데기, 맛있긴 한데…… 자꾸 아정에게 말려들어 술을 마시다가 취할까 봐서.
***
‘손, 치워요. 나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해주는 잠든 지한을 내려다봤다.
체온을 재기 위해 잠든 지한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놨을 때, 그는 불현듯 해주의 팔목을 잡아채곤 경고했다.
그가 고열에 지쳐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기에 당황했다.
불쾌해하는 지한에게 사과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프런트에서 약을 가져오며 방문을 두드렸다.
잠꼬대였던 걸까? 동시에 손에 힘이 빠진 지한은 해주를 놓아주었고, 해주는 잠시 머뭇대다가 약을 받으러 다녀왔다.
그리고 그사이, 지한은 잠들어 있었다.
약을 먹고 자면 좋았을 테지만, 그가 깊이 잠든 것처럼 새근거리는 소리를 내서 해주는 임시방편으로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두었다.
열은 좀 내렸을까. 물수건을 갈아 주고 싶었다. 약이 준비돼 있으니 그를 깨워 먹이고 싶었지만, 아까 그의 경고가 생각나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해주는 물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씩 시선을 내렸다.
지한의 단정한 눈썹, 속눈썹마저 예쁜 눈, 빚어 놓은 것 같은 오뚝한 코, 매력적인 입술.
얼굴 골격 하나하나까지, 참 잘생겼다.
“앞으로 1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해주는 자신이 없어졌다. 지한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라일락카페에 들러 사장님을 만나고 오던 길, 노을 진 하늘을 보며 고요한 차를 몰았을 때부터 이미 그렇게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서운할까. 결혼식을 올렸고, 혼인 신고를 했어도 그게 다 진짜가 아닌데.
신혼여행도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데, 밥 한 끼도 같이 못 먹는 것에 대해 그저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서운하고, 섭섭하고, 심지어 서러운 기분까지 들까.
그리고 지금, 아픈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확신이 든다.
결국 제 마음을 다 줘 버렸다는걸.
늘 단단하던 사람이 고열을 이기지 못한 채 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신 아파 주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좀 두려웠다. 결혼 생활 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을지.
좋아하는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고 밤마다 이불 속에서 얼마나 울어 댈지.
“용서해 주지 말지 그러셨어요. 결혼하자고 하지 마시지. 하다못해 침실이라도 따로 쓰게 해 주시지. ……적어도 상냥하다가 외면하진 마시지.”
해주가 원망하는 투로 지한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마음이 답답해서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물수건은 갈아야지 싶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손끝부터 천천히, 해주의 서늘한 손이 지한의 이마를 덮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지한의 손이 뻗쳐 왔다. 한순간 팔목을 붙잡힌 해주가 당황하는 표정을 짓자 열기 어린 눈으로 지한이 해주를 마주 보았다.
“전무님, 그게…….”
해주는 물수건만 갈고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고 둘러대려 했다. 그러나 지한이 그 말을 끊고 말했다.
“왜 여기 있어요.”
“그게, 열나서 이마에 수건만 갈아 드리려고…….”
아까 지한의 경고가 떠올라 해주는 식은땀을 흘렸다.
선의로 지한을 간호했지만, 지한이 원했던 일은 아니니까. 심지어 아까 전 그는 방에서 나가라고 할 만큼 곁에 있는 해주를 귀찮고 성가시게 여겼다.
“아. 전무님 방에 계속 있었던 건 아니었고, 이마에 물수건 올려놨는데 그것만 갈아 드리려고 왔어요. 죽도 시켜 놨는데…….”
“내가. 손 치우라고 경고했었는데.”
지한이 길어지는 해주의 말을 잘랐다.
그제야 해주는 아직도 제 손이 지한의 이마를 짚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해주는 지한에게서 멀어지려 상체를 뒤로 뺐다. 하지만 해주가 완전히 멀어지기 전, 지한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은 가까워졌고, 해주는 코앞의 지한을 보며 떨리는 가슴을 느껴야 했다.
“그냥 경고 아니었어요. 못 참을까 봐 한 말인데. 사람 말을 안 듣네.”
지한이 아파서 갈라진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해주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별다른 대꾸 없이 그를 쳐다만 봤다.
“왜 대답이 없지? 거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주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마음을 안고 무언으로 말하는 수밖에.
“왜, 내가 못 참길 바라는 표정이지? 진짜 후회 안 하겠어요?”
지한이 눈썹을 까딱였다.
후회하지 않느냐니, 뭘? 뭘 하고 싶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예상 가는 것들은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어제, 오늘 지한의 태도는 절대 그런 걸 할 마음 따윈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바라는 게 그것이라면.
아니, 지금으로서는 지한이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외면하고 피하는 것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았다.
결론을 낸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듯이. 그러자 지한은 픽, 의미 모를 웃음을 짓더니 한순간 돌변한 눈빛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입술이 맞닿았다. 해주가 그 사실을 깨달을 새 없이, 지한은 두 손을 뻗어 해주의 얼굴을 감쌌다.
동시에 지한은 입술을 좀 더 크게 벌리고 부드럽게 해주를 삼켰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