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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36화 (36/68)

36화.

짙은 노을에 하늘이 붉었다. 미르마을, 작은 시골 마을에 운치가 생긴 저녁 시간이었다.

“이거 가서 먹어.”

라일락카페 앞, 해주를 배웅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온 사장이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뭐예요?”

“너 좋아하는 세발나물이랑 빈대떡. 가다가 숨 죽지 말라고 나물은 양념하고 따로 넣었어.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어 두고 무쳐 먹어.”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해주가 감동 어린 표정으로 쇼핑백을 바라보자 라일락커피 사장은 아쉬운 표정으로 해주를 안아 주었다.

“너 온다고 전화 왔을 때 바로 준비해 뒀지. 약과 잘 먹을게. 또 놀러 오고.”

“또 올게요. 이제 들어가세요.”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사장이 얼른 먼저 가라며 손짓했다.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리조트에 도착할 땐 너무 늦은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저 먼저 가요.”

“조심히 가.”

해주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건 사장도 마찬가지인지 해주가 멀어질 때까지 카페로 돌아가지 않았다.

두어 번 뒤를 돌아보며 사장과 아쉬운 인사를 더 나누고, 해주는 주차해 뒀던 차에 올랐다.

해주가 시동을 걸고 나서야 사장은 카페로 들어갔고, 이내 해주는 차를 출발시켰다.

낮보다 기분이 훨씬 좋았다.

진섭이 있는 요양병원에서 나선 뒤, 헛헛한 마음에 라일락카페를 찾았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사장은 예상보다 더 반갑게 해주를 맞이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함박웃음을 짓는 사장의 표정에 해주는 문득 사무쳤던 외로움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커피와 함께 빈대떡을 꿀에 찍어 먹으며 수다를 떨고, 해주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평화로운 미르마을의 소소한 소식들도 듣고.

해주도 자신의 일상을 전했다. 사장이 상상할 수 없는 결혼 얘기 대신, 서울 친구 집에서 얹혀 지내며 일만 했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아주 많은 일이 있었지만, 사장에게 전할 수 있는 소식은 거짓으로 꾸민 것뿐이었다.

얼마간 도로를 더 달렸다. 문득 해주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울증도 아니고 기분이 뭐 이렇게 왔다 갔다 해.”

방금까지 분명 기분 전환됐다며 웃어 놓고는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는 이 기분은 뭔지.

리조트에 가까워질수록 그랬다. 지한을 떠올릴수록 점점 더.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해주는 걱정스러웠다.

이제 막 결혼 생활을 시작했을 뿐인데, 앞으로 1년은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데 시작부터 지한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다니.

벌써 감정 조절도 못 하면 앞으로 남은 1년은 어떡해야 할지.

지한은 참 잘난 사람이었다. 그만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그러니 결국 좋아하게 될 줄은 알았다. 하지만 결혼 시작부터 그로 인해 일희일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다 의식의 흐름은 곧 4월이 끝나고 5월이 시작된다는 걸 떠올렸고, 동시에 다시 지한을 끄집어 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전무님 괜찮으신 건가. 매년 이맘때 아프신데.”

4월 말. 지한이 두통과 고열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생긴 고질병이었다.

해주가 지한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건, 그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할 때 병간호를 밤새도록 한 적이 있었으니까.

무리하게 일해도 아픈 날이 그다지 없는데, 매년 4월이면 한 해도 빠짐없이 아팠다고 했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좀 무뎌진다더니, 그때보다도 2년이 더 흘러 이젠 괜찮은 걸까?

그가 아픈 시기라기엔 어제도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전무님은 내 걱정 필요하지도 않으신데 생각해서 뭣해. 계약 내용은 결혼했다가 무사히 이혼하는 것뿐이잖아. 다른 감정 다 접어 두고 이제 정말 계약에만 집중하자.”

해주가 스스로 다짐하며 지한을 향한 걱정을 차단하려 애썼다.

지한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그가 차지하는 공간이 자꾸만 늘어난다. 이러다 주체할 수 없이 커질까 무서웠다.

해주가 의식적으로 지한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새, 어느덧 리조트였다.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는데, 슬프게도 그녀는 또다시 생각했다.

전무님은 리조트에 있을까, 하고.

***

카드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이 온통 깜깜했다.

거실에 불이 꺼져 있었고, 닫혀 있는 지한의 방 안에서도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았다.

“외출하셨나.”

해주는 중얼거리며 벽에 손을 올려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거실이 환해졌고, 해주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의아함에 그녀는 뒤를 돌아봐야 했다.

어두울 땐 잘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지한의 방문이 왜 열려 있는 거지?

해주는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지한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어느 방에 들어가든 또는 나오든 항상 문을 완전히 닫았다.

문을 닫는 데 강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그랬다.

해주는 천천히 지한의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호기심에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어두운 방 안을 거실의 불빛이 어스름하게나마 밝혀 주었다.

잘 정돈된 내부를 조심스럽게 눈으로 쭉 둘러보던 해주는 감탄했다. 지한의 깔끔한 성격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캐리어를 열어 놓은 것과, 책상 위에 화장품 몇 개 놓아둔 걸 제외하면 바깥에 꺼내 놓은 물건이 없었다.

소파 위에 입었던 옷을 펼쳐 놓고,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봉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 방과는 참 비교됐다.

다시 해주는 시선을 돌렸다. 좀 더 대범하게 시선을 옮긴 그녀는 방구석에 놓인 침대를 바라봤다.

“여긴 소파가 없네.”

방 구조가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침대 근처는 좀 달랐다.

화장대 대신 책상이 있고, 침대 옆에 2인용 소파가 있는 대신 지한의 방엔 침대 밑에 두는 베드 벤치가 있었다.

실용성은 제 방이 좋고, 분위기는 지한의 방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해주는 이만 방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였다. 문득 그녀의 눈에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이불이 들어온 것이.

“아.”

해주는 잔뜩 당황했다. 분명 안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한이 침대에 있었다.

오늘 일정을 다 마치고 자는 모양이었다.

지한은 잠귀가 밝은데. 혹시라도 그가 제 인기척에 깨어날까 해주는 얼른 문을 닫았다.

그러나 문을 끝까지 닫기 전, 그녀는 다시 멈칫해야 했다.

뭔가 기시감이 들어서.

“……한 번도 이렇게 빨리 주무셨던 적이 없는데.”

아닌가? 딱 한 번 있었던 것 같기도.

“방도 덥고…… 그날도 그랬던 것 같은데.”

지한이 유독 빠르게 취침한 날, 밤공기는 쌀쌀한데 마치 침실은 홀로 초여름인 것 같은 온도.

지한은 시원한 걸 좋아했다. 직접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난 몸에 열이 많아요. 시원한 걸 좋아하는데, 윤해주 씨는 나보다 체온이 낮아서 안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침대에서 맨몸으로 껴안았을 때, 비교적 체온이 낮은 그녀를 안고 있으니 체온도 내려가고, 술기운도 좀 날아가는 것 같다며 그는 웃었다.

창문만 열어도 시원한 봄밤.

그런데 이렇게까지 모든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덥게 자고 있다는 건, 해주의 생각으론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해주는 서둘러 지한에게 향했다.

만약 아픈 게 아니라면, 그저 잠자고 있던 거라면 지한이 자신의 행동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할 순 없었다.

이 순간, 지한이 걱정되는 마음뿐이었으니까.

어두워서 사위를 밝히려 보조 등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온몸을 땀으로 적시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다 젖어 있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해주가 손을 뻗어 손등으로 지한의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높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불덩이처럼 뜨거워서.

“대체 언제부터 아프신 거야?”

해주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는지, 아니면 뜨거운 기운에 잡아먹혀 움직일 수조차 없는 건지 그는 눈꺼풀을 닫은 채 약하게 앓는 소리만 잇새로 뱉을 뿐이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지둥하던 해주는 침대 옆 협탁에 보조 등과 함께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내선 번호 1번을 누르니 몇 번의 신호음이 갔고, 이내 프런트에 연결됐다.

“펜트하우스 501호인데요. 해열제 좀 가져다주세요.”

바로 가져다드리겠다는 답변을 들으며 전화를 끊은 해주는 이번엔 냉장고에서 생수 하나를 꺼내 욕실로 향했다.

일단 열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물수건을 만들 생각이었고, 깨끗한 수건에 생수를 부어 적신 뒤 지한의 이마에 올렸다. 그 순간.

“손 치워요.”

해주의 손목이 커다란 손에 잡혔다. 놀란 해주가 시선을 내리니 지한이 열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손, 치워요. 나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

“자, 건배해요.”

소주병을 집어 든 아정이 손에 쥔 병을 빠르게 돌려 소주 회오리를 만든 다음 두 개의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윤 앞에 하나, 잔을 내려놓은 아정이 말하자 윤은 그 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원래 소주 그렇게 요란하게 마셔요?”

“요란하다뇨? 회오리가?”

아정은 묻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기본적인 스킬도 안 쓰면 소주 무슨 맛으로 마셔요? 비서님 나이가 몇이에요? 설마 그 얼굴로 마흔, 이런 건 아니죠?”

“서른이요. 모를 수도 있지. 난 소주 잘 안 마셔요. 그러게 맥주 마시고 싶다고 했구만.”

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정문에서 나타난 아정이 윤에게 물었다. 소주가 좋으냐, 맥주를 마시겠느냐.

윤은 당황하며 얼떨결에 맥주라고 대답했다. 소주는 싫으니까.

하지만 왜 껍데기와 소주를 먹게 된 건지.

아정과 윤이 술 한잔하기 위해 찾은 가게는 돼지껍데기집이었다.

둥근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밑반찬이 세팅되고, 불판 위에 올라간 껍데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그 맛깔나는 안주를 얼른 먹기 위해 아정은 윤이 들고 있는 잔에 냉큼 건배했고, 집게를 들어 성급하게 껍데기를 뒤집으며 입으로는 윤을 비웃듯 말했다.

“고작 4살 차인데 매사 그렇게 영감님처럼 굴어요? 회식도 안 해 봤어요?”

“누가 영감님이라고……!”

윤은 발끈하려다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져 참고서 말했다.

“대학 졸업하고 바로 전무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회식은 못 해 봤어요. 우리 전무님은 술 강요 안 하시는 분이고요.”

“대학 졸업하고 바로요? 취업이에요, 아님 친분으로 인한 낙하산?”

“그건 개인사라서 말해 주고 싶진 않네요.”

윤은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술은 왜 마시자고 했어요?”

윤은 많이 당황했었다. 아정과 친분 있는 사이도 아니고, 밥 한 끼 같이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서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불편한 관계에 가까웠지.

한데 뜬금없이 술이라니.

아정은 대답하기에 앞서 잔을 입가로 기울여 소주를 원샷했다. 그러곤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남자 친구랑 헤어져서 우울한데 내가 술 마실 친구가 없어요. 해주 언니는 신혼여행 갔고. 내 이별에 비서님 지분 크잖아요. 그러니 같이 마셔 줘야죠.”

며칠 전 해주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아정은 마음이 불편했다. 여전히 젠장 맞게도 재형 때문에.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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