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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35화 (35/68)

35화.

“아빠, 나 왔어.”

해주가 문을 열며 인기척을 냈다. 진섭의 어깨가 아주 살짝 위로 솟았다 내려오는 걸 보며 해주는 다시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갔다.

병실엔 진섭 혼자였다.

본래는 3인실 방이었지만, 워낙 구석진 마을에 있고, 병원 건물 또한 낙후된 탓에 환자가 적어 303호 병실은 진섭 혼자 쓰고 있었다.

이따금 사람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진섭처럼 장기 입원하는 환자는 적은지 다음번에 오면 또 금방 나간 뒤였다.

대화하기 편해서 좋다는 생각 한편으론, 사람 좋아하는 진섭이 외롭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해주는 진섭의 침대 아래서 간이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아빠. 오늘도 나 안 보는 거야?”

해주가 말했다. 당연히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서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해주는 개의치 않고 말을 덧붙였다.

“나 선물 사 왔는데. 뭔지 궁금하지? 아빠 좋아하는 약과. 우리 9년 전에 살던 집 근처 시장 있잖아. 거기 가게 약과 사 왔어. 서울 갔다 왔거든. 맛있겠지? 선반에 올려 둘 테니 심심할 때마다 먹어.”

해주가 약과가 든 쇼핑백을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2년 만에 서울 가니까 느낌이 다르더라. 서울은 그대로인데 내가 2년 내내 미르마을에만 있었더니 복잡하고 화려하게 보였어. 그래도 도시가 편하긴 편해. 다 있고, 교통도 좋고. 아빠랑 다시 서울 가서 살고 싶어.”

해주는 별 뜻 없는 말을 끝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천천히 꺼냈다.

“신약 쓰기로 한 거…… 들었지? 아빠가 의사 표현 안 해 주니까 내 맘대로 결정했어. 임상 결과가 좋다고 담당 선생님도 추천하시고, 아빠는 내가 하자면 다 해 줄 거 아니까. 그 정도는 내 맘대로 해도 괜찮지?”

신약을 쓰기로 했다.

지한이 금액을 지불해 주기로 했고, 해주는 오늘 의사를 만나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을 할 참이었다.

어디에도 진섭의 의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신약 사용을 거부하지 못한다.

해주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해주는 아빠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다.

“아빠, 나 이번에 서울 가서 전무님한테 용서받았어. 아, 전무님이라고 하면 모르겠구나. 강지한 상무님. 지금 전무님이시거든.”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 말을 한다면 아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아빠도 죄책감 이제 좀 덜었으면 좋겠어. 난 정말 괜찮은데 아빠 혼자 속 끓이는 거 마음 아파.”

하지만 아빠는 미동도 없는 뒷모습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 자신의 죄를 잊을 수 없다고.

해주는 안쓰러운 아빠를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아빠, 나 결혼했어. 진짜 결혼은 아니고 계약서 쓰고 한 결혼인데, 그래도 웨딩드레스 입었어. 아빠가 꼭 보고 싶어 했던 모습이었는데. 결혼식 내내 아빠 생각했어. 그 결혼식 덕분에 전무님이 날 용서해 주셨어. 그뿐이 아니야. 아빠도 지켜 주고, 이혼할 땐 큰돈도 주신대. 전무님 아버지에겐 인정받지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손주며느리로 인정해 주시기도 했어. 속이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내가 아빠 지킬 수 있어서 좋아.’

순간, 그녀는 감정이 울컥했다.

이렇게나 아빠를 생각하는데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여 주지 않는 아빠가 너무해서.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결혼을 떠올리니 지한이 생각났다.

왜 그럴까. 압구정, 지한의 외조부 집에 다녀온 날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지한은 고맙다는 말까지 했었다.

불과 사흘 전의 일이었다. 그사이 아무 일도 없었는데, 대체 그는 왜 하루아침에 성큼 멀어진 걸까?

분명 오해가 아니다. 지한이 해주에게 선을 긋는 게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리조트에 도착한 뒤로 얼굴 한 번 못 볼 리가 없으니까.

내 마음이 깊어져서 그런가? 감추려고 해도 티가 났나?

하지만 정말 평소처럼 행동했는데…….

마음이 답답했다.

아빠와 지한, 제게서 멀어지려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의지로 관계를 풀어낼 수 없어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평소 해주는 아빠의 병실에 오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오늘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꽤 오래 침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주는 멍하니 구부러진 등을 보고, 진섭은 여전히 큰 뒤척임 없이 정적을 유지하는데 문득 똑똑, 병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리는 소리에 해주가 뒤를 돌아보니 아빠의 요양 보호사였다.

“식사 나왔는데.”

그 말에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럼 저도 식사하고 올게요.”

진섭은 해주가 있으면 식사하지 않는다.

처음엔 같이 먹자고 조르고 얼러 봤지만, 그는 저녁까지 굶어 가며 해주가 돌아갈 때까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니 아빠가 굶지 않도록 그녀가 나가는 수밖엔 없었다.

그 전에. 자신이 없을 때에도 늘 아빠 곁을 지켜 주신 보호사님께 작은 성의를 표하고자 했다.

“저, 보호사님. 아빠 식사 전에 잠시 저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해주가 문밖으로 손짓하자 보호사는 흔쾌히 끄덕였다.

“그럼요.”

해주와 보호사가 병실을 나섰다.

진섭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눈물을 흘려 벌게진 눈으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시선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해주가 이토록 말을 하지 않은 날이 있던가.

해주에게 깊은 침묵을 하게 만든 고민이 있다는 걸 느끼며 그는 가슴 아파했다.

***

같은 시각.

지한은 리조트를 걸었다.

묵고 있는 건물을 나서 산책로를 따라 쭉 걷다가, 하나의 마을 같은 독채 펜션 단지를 지나 이곳 리조트의 핵심 시설인 클럽 하우스까지.

걷다 보니 리조트 전체를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 지난번에 윤과 묵었을 땐 괜찮았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 그런지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꽤 숨이 찼다.

지금 계획한 것보다 벤치를 더 두고, 이동 수단도 추가해야겠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지만 지한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했다.

어제 두통약을 먹고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어제보다 더 세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지금은 목뒤부터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몸이 기억하는 온도와 습도 따위가 있다.

오늘처럼 햇살이 포근하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고, 공기에 물기 하나 없는 것처럼 건조한 날.

그럴 때면 꼭 오늘처럼 두통이 생긴다.

그리고 4월 마지막 주. 그날이면 두통에 고열이 더해져 괴로워진다.

돌아가는 길이 머니, 몸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아프기 전에 침대에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지한이 해남으로 떠나 전무실을 비운 지 이틀째.

윤은 카페에서 은밀히 사람 하나를 만나고서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쯤 회사로 돌아왔다.

그가 정문을 지났을 때였다.

“아정 씨. 사회생활이 만만해? 내가 커피 사 오라고 한 지가 대체 언제야! 카페가 멀어요? 아니면 눈이 어둡나? 코앞에 둔 카페에서 커피 사 오는 거 하나 못 해서 내가 직접 내려오게 만들어?”

사람 없는 로비에서 고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윤이 놀라서 소리가 들려온 안내 데스크 쪽을 쳐다보니, 아정과 인사팀 부장 안미진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김서희 상무님 찾으시는 손님께서 오셔서요. 안내해 드리느라 늦었습니다.”

아정이 커피 심부름이 늦어진 이유를 들며 사과했지만, 아마도 윤이 들어온 걸 모르는 눈치인 안 부장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일을 못 하니까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 하는 거야! 내가 장아정 씨 자를 수 있다는 거 알아, 몰라?”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아정을 보며 윤은 혀를 쯧쯧 찼다.

그깟 커피 누가 사 오면 어떻다고. 자기 업무를 했다는데 공개적인 장소에서 저럴 일인가?

안 부장은 자기 팀 부하 직원들을 하인 부리듯 한다고 ‘안’ 씨 성을 따, 별명이 안주인이었다.

팀 직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인 그녀는 낙하산 취업시켜 준 아정을 당연하게 부리는 모양이었다.

윤은 약간 정의감이 있었다.

특히 어디 가게에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진상 고객을 보면 차마 고객에게 험한 말 못 하는 직원을 대신해 자주 나서기도 했었다.

안 부장의 억지와 아무 말도 못 하는 아정의 바보 같은 모습. 이것도 진상 고객과 직원, 그 맥락이라고 생각하며 윤은 성큼성큼 안내 데스크로 다가갔다.

“안 부장님, 식사하셨어요?”

윤의 살가운 인사에 안 부장은 한순간 입을 다물고 뒤를 돌았다. 누가 방해하나 싶어 눈을 치켜뜨던 안 부장이 이내 순한 얼굴을 했다.

“어머, 정 비서님. 어디 다녀오는 길이세요?”

방금까지 고함지르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사근사근하게 말하며 안 부장이 윤의 옆으로 다가왔다.

“전무님 심부름이요. 지금 신혼여행 가셔서 맡기신 일이 많거든요.”

윤이 아정을 돌아봤다.

“아정 씨, 사모님이 돌아오면 만나기로 하셨죠?”

“네? 아, 네. 언니 만나기로 했죠.”

갑자기 자신에게 향한 질문에 아정은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윤은 다시 안 부장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정 씨랑 전무님 사모님이랑 친구 사이거든요.”

“아…… 그래요?”

안 부장이 놀란 눈으로 아정을 봤지만, 윤은 모른 체하고 아정에게 인사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지한의 비서이기에 유독 더 친절하게 구는 태도를 알기에, 윤은 그걸 이용해 주었다.

***

오후 6시. 정각에 퇴근한 윤은 비서팀 사무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 버튼을 누르며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 얼마만의 자유인가!

남들보다 30분 늦은 퇴근이지만, 평소에 비하면 선녀 같은 퇴근 시간이었다.

어제도 일찍 끝났었지만, 지한이 사적으로 시킨 일 때문에 맥주 한 잔 즐기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일을 낮에 단골 심부름센터 사람을 만나 맡겼으니 마음껏 좋아하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서 어떤 맥주를 마실까,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문을 열었다.

로비를 지났다. 5시 퇴근인 안내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고, 맞은편의 카페도 마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퇴근 기분이 난다고 생각하며 정문을 나선 순간이었다.

“비서님.”

“으악!”

누군가 정문 옆에서 휙 튀어나왔다. 놀란 윤이 소리 지르며 몸을 크게 움찔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신을 놀라게 한 이를 쳐다봤다.

“장아정 씨?”

아정이 피식, 비웃듯 웃었다.

“간이 되게 작으신가 보다. 그냥 불렀을 뿐인데 뭘 그렇게 놀라세요?”

윤은 발끈했다.

“그냥 부르긴요! 갑자기 튀어나왔잖아요. 뭡니까? 퇴근하지 않았어요?”

아정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비서님 기다렸어요.”

“나를요?”

“술 한잔해요. 기분 꿀꿀한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요. 내 기분 이런 건 비서님 때문이기도 하니까 내빼지 마요.”

“나 때문에요? 내가 뭘 어쨌는데요?”

윤이 의아해하며 묻자 아정은 말했다.

“마시면서 말해 줄게요. 소주가 좋아요, 맥주가 좋아요?”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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