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공사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고서, 지한과 소장은 건설 현장 근처 마을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더 맛있는 걸 대접해야 하는데 근처에 기사 식당뿐이라 먹을 만한 곳은 여기뿐이네요.”
현장 소장의 말에 지한은 입매를 가볍게 올리며 대꾸했다.
“국밥 좋아합니다. 드시죠.”
지한은 앞에 놓인 뜨끈한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가 국물 먼저 떠서 입에 넣었다.
다음으론 밥 한 숟가락을 푸고, 다시 국물과 건더기를 푸짐하게 떠먹었는데, 오후 2시에 첫 식사를 하는 것이라 그런지 평범한 콩나물국밥이 꽤나 입맛에 잘 맞았다.
“전무님께서 절 직접 현장 책임자로 추천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조심스러운 현장 소장의 말에 지한은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 팀원들에게 소장님 얘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같이 일해 본 현장 엔지니어 중 가장 책임감 있으시다고요.”
“아, 그렇습니까? 가장…… 앞만 보며 열심히 일했더니 이런 좋은 평가도 받게 되네요.”
“소장님에 대한 팀원들 믿음이 큽니다. 저 또한 책임감 무겁게 일해 주실 걸 기대하고 있고요.”
“불미스러운 기사 한 줄 안 나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한 줄 정도는 제 선에서 정리할 테니 너무 부담 갖진 마세요.”
남해 리조트는 무조건 성공해야만 하는 지한의 야심작인 만큼, 처음엔 현장 경험이 많은 엔지니어를 현장 소장으로 세울 생각이었다.
지한이 따로 정해 둔 후보도 있었는데, 언젠가 정기 회의 때 리조트 사업개발팀 팀원들이 의외의 인물을 추천했다.
지금의 현장 소장으로, 성과 인정이 없는 작은 현장에서도 가장 책임감 있는 엔지니어라고들 입 모아 말했다.
지한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직원들을 신뢰했다. 때문에 자격은 부족했지만, 지금의 현장 소장을 우상건설 사장에게 특별히 현장 관리자로 부탁했다.
지한은 스스로 사람을 잘 보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현장 소장은 서글서글한 눈 안에 담긴 눈빛이 참 단단해 보였다. 웃을 때 힘들지 않게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매는 평소에도 가식 없이 웃는 듯했다.
가식 없는 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윤해주가 떠오른다.
윤해주는 말간 웃음을 가졌다. 늘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고, 어떤 생각을 할 때, 애써 감추려 해도 표정 위로 드러난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한 번, 크게 그를 속이긴 했지만.
점심시간이 꽤 지났는데 밥은 먹었나. 혼자 먹는다고 굶은 건 아닐지.
기껏 식당을 추천해 주기까지 했는데, 워낙 잘 챙겨 먹지 않으니 식사를 건너뛰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가 해주를 걱정하던 때였다.
“저, 근데 신혼여행으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장 소장의 말에 지한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식사, 돌아가서 사모님과 하셨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식사 대접해 드리고 싶은 욕심에 제가 괜히 점심을 권유했던 건 아닌가 걱정되네요.”
“아닙니다. 시간이 늦었는데요. 아내도 이해해 줄 겁니다.”
충분히 리조트로 돌아가 해주와 점심을 먹을 수 있었지만, 지한은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지금뿐인가. 리조트에 도착해 늦은 아침 식사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현장 방문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곧장 방을 나섰지만, 사실 현장 소장과 약속했던 시간까지 여유로웠다.
단지 같이 밥을 먹지 않기 위한 핑계였을 뿐.
지한은 해주에게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다. 부부가 됐으니 어느 정도 가깝게 지내지만, 또 진짜 부부처럼 친밀하진 않은 정도로.
그리고 지금은 생각보다 성큼 가까워진 바람에 조금 멀어져야 할 때였다.
자신의 마음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
요즘 지한은 해주에게 마음의 많은 자리를 내어 주고 있었다.
처음 마음을 주었던 여자를 매일 집에서 마주하는데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할아버지에게 잘하던 고마운 모습이 그를 더 빠르게 그녀에게 끌리게 했다.
그러니 남해에서 지내는 동안 최대한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해주가 아버지를 만나고 온다던 내일은 지한이 리조트에 머무를 것이고, 그녀가 방을 지킬 모레는 다시 지한이 외부 일정을 소화할 것이다.
며칠이나마 거리를 두면 반드시 윤해주에 대한 마음은 정리가 될 테니까.
“그런데요, 전무님.”
“네, 말씀하세요.”
“안색이 좀 별로이신 것같이 보이는데 괜찮으십니까?”
지한이 손등으로 가볍게 볼을 만졌다.
“아. 그렇게 보이나요? 새벽부터 움직였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보네요.”
지한이 가볍게 웃어 보이곤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 갔다.
티가 날 정도인가.
사실 아침부터 컨디션이 별로였다.
잠을 적게 잔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콩나물국밥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약한 두통이 시작됐다.
안 그래도 식사를 마치고 두통약을 한 알 먹을 생각이었다.
아직 견딜 만하지만, 4월 말. 매년 이맘때면 습관처럼 도지는 고통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미리 챙겨 온 두통약이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 있었다.
***
신혼여행 이틀째 아침이 찾아왔다.
동이 트자, 해주의 방 안에 햇빛이 깊게 드리워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숲 풍경을 보고 싶어 커튼을 열어 둔 탓이었다.
눈부신 햇살에 잠이 깬 해주는 잠시 꼼지락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부스스한 눈을 들어 창 쪽을 바라보니 눈앞에 탁 트인 풍경이 보였다.
푸르른 나무와 파란 하늘이 속을 뻥 뚫리게 해 주는 기분이었다.
햇볕은 어찌나 따뜻한지. 어제, 혼자 숙소에 머물며 쓸쓸했던 감정을 잠시 잊고서 해주는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이 거의 다 달아났을 때 해주는 또다시 지한을 생각했다.
“전무님은 일어나셨나.”
어제, 이른 저녁. 그가 방에 들어온 소리를 들었지만, 해주는 나가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지한도 곧장 방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지 않고 들어왔다면 같이 식사하자고 용기 내 말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을 만큼 빠르게도.
그는 평소처럼 아침부터 일을 할까?
서울에선 늘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했는데 해남에선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아직 자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닌가. 지독한 일벌레니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하고 있으려나.
같은 공간에 있는데 지한의 일과를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어쩐지 답답해져, 해주는 그 기분을 떨쳐 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바로 나갈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까진 차로 40분 거리. 면회 시간은 오후 2시까지니 서둘러 가서 아빠를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있어도 등이라도 실컷 보고 올 생각이었다.
***
“오늘 따님 온다더니. 그래서 이렇게 멀끔하게 단장하셨구만.”
햇빛요양병원.
윤진섭은 요양 보호사의 말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딸한테도 그렇게 좀 웃어 줘요. 뒷모습만 보고 가는데 얼마나 애처로운지 알아요?”
진섭은 그저 대답 없이 웃을 뿐이었다.
보호사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곧 올 때 됐네. 난 세탁실에 다녀올 테니 딸이랑 좋은 시간 보내요.”
보호사가 멀어졌다. 진섭은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을 쳐다봤다.
언제나 해주가 온다고 연락을 준 날이면 그는 약속 시간 전부터 이렇게 창밖을 보곤 했다.
요양병원 정문과 주차장이 보이는 곳이라, 해주가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해주가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축 처진 어깨로 다시 나가는 순간까지, 진섭은 해주를 등지고 벽을 향해 누워 있느라 애틋한 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지 못하는 건 죄책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얼굴 좀 보자고 섭섭한 목소리로 말할 텐데. 그럴 때면 마음이 아팠다.
잘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해주의 축 처진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그러니 그는 우는 모습을 보이며 딸을 더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답답하리만큼 나오지 않는 목소리.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눈물만 줄줄 흘린다면 해주가 얼마나 가슴 아파할지 그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못난 애비도 아빠라고, 자신 때문에 죽을 뻔한 경험을 했으면서도 꼬박꼬박 찾아오는 해주가 이제 그만 발걸음을 해 줬으면 했다.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야 맞다.
언제 다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를 사채업자들에게 해주가 다시 위험해지면 안 되니까.
물론…… 사랑하는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해주와 마주 보며 끊이지 않는 해주의 수다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잠시나마 얼굴을 보고 싶은 욕심은 의지로 되지 않았다.
저 멀리, 해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진섭은 잠시 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먹먹한 얼굴로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웠다.
***
해주는 햇빛요양병원 대문을 지났다.
건물로 점차 다가설수록 그녀는 요양병원이 참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전엔 참 느슨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무님께서 신경 많이 써 주셨구나.”
건물에 설치된 CCTV가 늘고, 곳곳에 서 있는 경비원들도 눈에 띄었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는 지한의 말을 들었을 때는 막연히 안전하겠구나, 싶었는데 제 눈으로 보니 참 안심이 됐다.
하나 있는 요양병원 출입문에 다다랐다.
이라는, 전에 없던 스티커가 붙은 유리문을 열고 해주는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렸고, 안에서 나온 간호사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해주는 엘리베이터 안에 올랐다.
3층 버튼을 누르니 다른 곳들보다 느린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 이내 해주를 목적지에서 내려 주었다.
진섭이 있는 병실은 303호였다.
해주는 문에 달린 작은 창 너머로 등을 보이고 누운 진섭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진 분명 창문을 보고 있었으면서.
멀리서도 보일 만큼 그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면서.
야속했지만, 해주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