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오전 7시 30분. 비서2팀으로 출근한 윤은 언제나 그랬듯 태블릿을 하나 가지고 다시 비서팀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 출근 시간 전이라 고요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윤은 15층을 눌렀다.
이내 1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윤은 대회의실과 임원 사무실이 모여 있는 동쪽 복도 중간, 전무실 문을 열었다.
노크는 없었다. 아직 지한이 출근하지 않을 시간이니까.
지한은 보통 8시 전후로 도착하는데, 윤은 언제나 그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해 전무실을 정리하고, 태블릿 화면에 스케줄을 띄워 그의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전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긴 윤이 책상으로 다가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무님?”
윤이 놀라 움찔했다. 이 시간에 전무실에 없어야 할 지한이 슈트를 입은 채로 소파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얕은 잠을 자고 있었던 건지, 윤의 인기척에 지한은 쉽게 눈을 떴다. 그가 윤을 발견하곤 상체를 일으켰다.
“아. 왔어.”
“왜 여기서 주무시고 계세요?”
“피곤해서.”
소파에서 내려온 지한이 엄지 뒷부분으로 뻐근한 눈가를 꾹꾹 누르곤 전무실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로 다가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니, 아니. 왜 이렇게 일찍 오신 건데요? 신혼여행으로 자리 비워야 해서 걱정되세요?”
지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벌써 7년째 지한과 함께 일하고 있는 윤은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남해 일정이 3박 4일이었다. 그동안 책임자인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문제 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표정으로 지한이 별다른 대꾸 없이 책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윤은 가져온 태블릿을 책상 위에 올려 주며 다시 물었다.
“내일 7시에 출발하신다고 하셨던가요?”
“그래.”
“직접 운전하시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요즘 내내 4시간 겨우 주무셨잖아요. 모셔다드리고 싶은데 한사코 거절하시니 맘대로 따라갈 수도 없고요.”
“걱정 마. 내내 운전하는 것도 아니니.”
지한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윤의 얼굴에선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요. 적어도 3시간은 운전하셔야 할 텐데. 해주 씨랑 이제 한 침실 쓰시니 더 불편하시죠?”
“나보단 윤해주가 불편하겠지. 남의 집살이가 쉬운 건 아니니까.”
“하긴. 해주 씨는 여자라서 더 불편하겠네요.”
순간, 윤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강력히 스쳤다.
“아! 혹시 해주 씨 때문이었던 건 아니시죠?”
“뭐가.”
“전무님 결혼식 끝나자마자 극단적으로 출퇴근하신 것 말이에요. 해주 씨 때문에 불편해서 일찍 출근하시고 늦게 퇴근하시고, 오늘도 굳이 회사 와서 주무셨다는 느낌이 딱 드네요?”
눈치 빠른 윤의 말에 지한은 부정하지 않았다.
요 며칠 지한이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을 한 이유. 그건 남해에 가며 처리할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해주 때문이니까.
“주객전도됐네요. 이러다 계약 끝나면 해주 씨한테 집도 주시는 거 아니에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지한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 훑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냉장고와 정수기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설탕 넣은 아이스커피를 마셔야 남은 피로가 풀릴 것 같았다.
“전무님은 항상 해주 씨한테 무르시잖아요. 예전에도, 지금도요. 예전엔 저한테 안 주셨던 유급 휴가까지 주시고. 저한테도 그의 반의반만큼만 다정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윤은 마지막엔 중얼거리더니 샐쭉하게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말은 혼잣말이니 무시해 주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윤은 그 뒤로도 서운하다는 투의 말들을 중얼중얼 뱉어 냈다.
지한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한 가지 생각을 하면서.
이혼 후 위자료로 해주와 그녀의 아버지가 살 아파트를 하나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 정도는 더 해 주고 싶었다.
***
아침 일찍 김포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온 지한과 해주가 광주 공항에 도착했다.
WS호텔 광주 지점에서 전날 주차장에 준비해 놓은 차에 올라 남해로 향했을 때였다.
“아버지께 언제 다녀올 거예요?”
심심한 도로 풍경만큼이나 고요하던 차 안의 공기를 깨고 지한이 물었다.
적막한 분위기가 어색해 내내 차창 밖 풍경을 보고 있던 해주는 그를 돌아봤다.
“내일 다녀오려고요.”
“갈 때 이 차 써요.”
“네? 아니에요. 전무님께서 쓰셔야죠.”
해주가 손을 내저었다. 비록 남해에 온 건 지한의 일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빠를 보러 갈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니 차까지 빌려 쓰기엔 너무 그에게 신세 지는 것 같았다.
“난 현장에 차 보내라고 하면 돼요. 거리 멀어서 대중교통으론 불편할 테니 써요.”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 또 한 번 거절하면 어색해지려나. 해주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감사히 쓰겠습니다.”
해주의 대답에 다시 차 안이 고요해졌다.
갑작스레 다시 찾아온 정적에 어색하게 앞창을 보고 있던 해주는 다시 제 오른편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건 없는데.
지한의 외조부에게 다녀온 날 화기애애했고, 어제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어제부터 분위기가 냉랭한 것 같지?
요즘 지한과의 관계가 좀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라일락카페에서 오랜만에 만났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괜한 생각이겠지? 방금도 아빠 병원까지 차 타고 가라고 해 주셨는데.
요즘 전무님 내내 바쁘셨으니 피곤해서 그렇겠지.
해주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곤 남해 일정을 떠올렸다.
3박 4일 동안 뭘 할지 얼추 생각해 놓았다.
오늘은 호텔에서 지내고, 내일은 아빠를 만나러 갔다가 라일락카페에 사장님을 만나러 갈 것이다.
모레는 호텔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리조트가 소유한 바다가 예쁘다고 하니 혼자 산책이나 하고, 바다가 보이는 호텔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흘끔 지한을 쳐다봤다.
모든 일정을 함께하진 못해도 같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적어도 한 끼 정도는…….
해주가 그런 생각을 한 사이, 저 멀리 남해 리조트가 보였다.
***
체크인을 마친 뒤, 해주는 지한을 따라 배정받은 룸으로 향했다.
리조트 메인 건물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는 거실을 사이에 두고 침실과 욕실이 각각 별개로 있는 구조였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거실 통창이 아주 넓었는데, 덕분에 창밖의 숲 전망이 아주 시원하게 보였다.
해주가 문 옆쪽으로 있는 깔끔한 다이닝 룸까지 눈으로 훑으며 구경하는 사이, 지한은 왼팔에 찬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곤 말했다.
“점심이라도 같이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어요. 바로 나가 봐야 하는데, 혼자 식사 괜찮아요?”
“그럼요. 다녀오세요.”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같이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해주가 흔쾌히 대답하는데, 지한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쉽게 됐네요. 계속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아서 점심은 같이하려고 했는데. 룸서비스 시켜 먹거나 레스토랑 가서 먹어요. 여기 한식당이 잘한다는 얘기가 있던데 괜찮으면 가 봐요.”
“아…… 그럴게요.”
해주는 애써 싱긋 웃음 지었다.
지한도 가볍게 미소 지어 보이더니, 벨 보이가 방까지 올려 준 두 개의 캐리어 중 검정색 캐리어 손잡이를 빼 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해주는 잠시 그가 사라진 방을 쳐다봤다.
그렇구나. 계속 같이 식사할 수 없구나. 그렇게나 바쁜가? 한 번도 같이 못 먹는구나…….
“정말 밥 한 끼도 같이 못 먹을 줄은 몰랐는데.”
다른 여행도 아니고 신혼여행이라서 그런가.
지한에겐 당연히 일이 먼저고, 그녀는 서운해할 자격도 없는데 그와 함께하지 못할 남해 일정이 섭섭했다.
하지만 곧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기대 안 하기로 해 놓고 뭐가 서운해.”
그녀는 애써 생각을 떨쳐 버리곤 반대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해주는 안으로 들어갔다.
킹사이즈 침대와 텔레비전, 원목 책상과 테이블, 그리고 옷장과 화장대. 그 외에도 필요한 물건은 웬만큼 다 있는 넓은 침실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커튼 너머로는 거실에서 보았던 숲이 보였는데, 해주는 저녁에 룸서비스를 시켜 창 앞에 있는 테이블에서 노을 지는 풍경을 보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침실엔 욕조가 딸린 큰 욕실도 하나 있었는데, 반신욕을 하면 피로가 싹 풀릴 것 같았다.
난생처음 와 보는 비싼 리조트였다.
충분히 즐기다 가면 서운한 기분도 희석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해주는 짐을 풀었다.
좀 더 갖춰 입는 느낌으로 옷을 갈아입고, 지한이 말한 한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
하얀색 중형 세단에서 지한이 내리자, 우상건설 측에서 나온 리조트 공사 현장 소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지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는 현장 소장을 향해 지한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닙니다. 일부러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께서 오시는데 당연히 나와 봐야죠. 현장 먼저 둘러보시죠.”
지한의 손을 맞잡으며 현장 소장이 말했고, 지한은 현장 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지한은 흙막이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을 천천히 걸었다.
온통 흙과 장비로 가득했다.
가까운 뒷산에 올라가 보았던 소담한 마을들은 이제 없고,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1년 뒤, 그땐 과거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리조트가 세워지겠지.
지한이 가장 공들인 작품이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집결체가 바로 남해 리조트였다.
그러니 무조건 성공해야 했다. 공사가 끝날 땐 이미 우상전자로 돌아가 있을 테지만, 돌아가더라도 마무리까지 제 손으로 완벽하게 할 것이다.
우상그룹에 강태규 회장보다 강지한 전무가 더 유명해지도록.
“인명 사고 없는 현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점 잘 신경 써 주세요.”
지한이 공사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고, 현장 소장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또한 그 점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안전을 가장 신경 쓰겠습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