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권호재는 지한이 아플 때 해주가 옆에 있어 주길 바라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설명을 하려고 했다.
“어머니 기일이 다가오면 지한 씨 하루 이틀 전에 고열 나는 거 알고 있어요.”
권호재는 놀란 눈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알고 있겠구만.”
“지한 씨 아플 때 제가 잘 챙길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해주의 말이 든든했는지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같은 아픔 겪은 반쪽을 만났으니 서로 이해해 주기 쉽겠어. 두 사람 서로 의지하며 잘 살도록 해.”
같은 아픔. 달랐다.
지한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녀의 엄마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 뿐,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잘살고 있으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해주는 찔리는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딩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에 더 가까이 앉아 있는 해주가 인터폰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지한 씨네요.”
그 말에 권호재는 앨범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릴 적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녀석이니 사진첩 도로 가져다 놔야지. 지한이 문 좀 열어 줘.”
권호재는 그 말을 남기곤 앨범과 함께 방으로 사라졌다.
해주는 이내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슈트 차림의 지한이 문 앞에 서 있었다.
***
지한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권호재는 다시 방에서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일찍 왔구나. 못 올 것처럼 하더니.”
지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협박하셨잖아요. 직접 데리러 오지 않으면 단식 투쟁하시겠다면서요.”
회의가 끝나고 전무실로 돌아가던 중, 권호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주가 집에 오기로 했다고. 차 한 잔 마시고 있을 테니 편안하게 집에 갈 수 있도록 데리러 오라고.
오지 않을 경우 매정한 손자를 둔 죄로 굶겠노라고.
말도 안 되는 협박이고, 실천하지 않으실 걸 알지만 기분을 맞춰 드리고자 왔다.
“잘했다. 아내가 어딜 가든 남편이 데리러 와야지.”
권호재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해주가 가운데서 난감할 줄도 모르고.
해주는 어쩔 줄 몰랐다.
바쁜 지한이 한참 회사에 있을 시간에 이곳에 온 게 자신 때문이라니.
권호재가 그를 불렀을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나마 지한의 표정이 그리 불쾌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일까.
“저녁 먹고 가.”
“집에서도 일해야 해요.”
권호재의 말에 지한은 단호히 답했다. 늙은 낯빛에 서운함이 은근히 드리워졌다.
“그럼 어서 가서 일해. 둘이 저녁은 꼭 같이 먹고. 부부가 하루 한 끼 정돈 식사 꼭 같이해야 해.”
지한은 언제나처럼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대신 권호재의 얼굴 위로 떠오른 아쉬움을 챙기듯 말했다.
“남해 다녀와서 저녁 식사 하러 올게요. 며칠 자리 비워야 하니 미리 마무리해 놔야 할 일이 많아요.”
권호재의 기분이 금세 사르르 풀렸다.
“그래. 어서 가. 이틀 뒤에 가는 거지? 조심히 잘 다녀오고.”
“네.”
해주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권호재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이내 현관을 나서는 손주 부부를 보며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
차에 오른 지한과 해주가 금세 빌라를 빠져나갔을 때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찍 퇴근하시고.”
눈치를 보던 해주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지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할아버지가 시키신 일인데 윤해주 씨가 사과할 필요 없어요.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아니에요, 고생은요.”
지한의 말에 해주가 손을 저었을 때였다.
“앞으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요. 할아버지까지 챙길 의무 없어요.”
지한이 먼저 말했다. 냉정하진 않지만, 선을 확실히 그으며.
“아…….”
해주는 지한의 말이 조금 서운하게 들려왔다.
할아버지 찾아뵌 것을 좋아해 줄 줄 알았는데.
하지만 한편으론 그를 이해했다.
지한과 사전에 상의하지도 않고 멋대로 그의 외조부를 찾아갔으니 당황스러웠겠고, 계약 결혼한 사이에 할아버지까지 챙기는 건 좀 오지랖 같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
게다가 일하던 도중 불려 왔으니 더욱더.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뵀죠.”
그녀는 눈치 보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찾아뵌 건 아니에요. 결혼 전에 할아버님께서 용돈 주셨잖아요. 그거 감사해서, 아빠 약과 산 김에 같이 사서 드리고 싶었어요.”
지한은 잠시 해주를 돌아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주는 그 한숨의 의미를 몰라 긴장했다.
말대답을 한다고 불쾌해진 걸까, 생각하는데 그가 말했다.
“미안해요.”
“……네?”
해주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한은 말을 덧붙였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할아버지 말동무 돼 줘서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아…….”
“결혼했다고 무리하게 신경 쓴 것 같아서 앞으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냉정하게 말했던 거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그럼요. 안 담아 뒀어요. 싫어하시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좋아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할아버지 고집 세신 분이라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괜찮았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았어요. 할아버님이랑 재밌게 대화했어요.”
지한이 입매를 가볍게 올렸다. 그리고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오래 못 사신다는 판정 받고 전과 달리 많이 우울해하셨어요. 한데, 윤해주 씨 만날 땐 전처럼 활기가 넘치시네요. 오늘도 그랬고.”
“절 좋아해 주시니 다행이에요.”
“무슨 얘기 했어요?”
말해도 될까.
지한의 어린 시절 얘기와 그의 어머니 얘기가 주를 이뤘는데, 두 가지 다 지한이 달가워할 것 같진 않았다.
특히 어린 시절 사진을 봤다고 하면 지한이 언짢아할 것만 같아 그 얘기만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전무님 얘기 조금 하고, 전무님 어머님 얘기도 했어요.”
“뻔하네요. 미안하다는 얘기 했겠지.”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님이 전무님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할아버진,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옆에 계셔 주셨어요.”
지한이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외조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상기할 때면 늘 마음이 그랬다.
나이를 먹어도 가족을 잃는 슬픔은 똑같겠지.
그러니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냈을 때처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나마 지금, 마음이 외로운 순간에 윤해주와 함께라는 게 작은 위로가 됐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잘못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복잡한 마음을 숨기며 지한은 물었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크게 생각 없어요.”
“그럼 간단히 배달시켜 먹죠.”
“좋아요.”
그새 한남동 집에 다다랐다.
***
저녁으로 간단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해주가 먼저 침실로 들어왔다.
먼저 자신의 침대 쪽 협탁에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
“아직 안 자고 있었네요.”
불을 꺼 둬 지한의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테이블 스탠드 조명만이 비추고 있는 방 안, 아직 잠들지 않은 해주를 보며 지한이 물었다.
해주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일 다 끝나셨어요?”
“끝났어요. 평소보다 취침이 늦네요.”
지한은 침대로 걸어와 자신의 침대 이불을 걷으며 물었다.
“아. 잠이 안 와서요. 남해 갈 생각해서 그런가 봐요.”
“아버지 때문에?”
“……네.”
해주는 거짓말을 했다. 실은 지한 때문이었다.
요 며칠 내내 지한과 같은 침실을 썼지만, 늘 잠에 들고 나서야 지한이 집으로 돌아오니 한 번도 같이 썼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처음이었다. 해주가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지한이 집에 있는 게.
긴장됐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이만 자 볼게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해주는 말했다. 지한이 스탠드 조명을 끄고 대답했다.
“잘 자요.”
침실이 아주 고요하다.
두 사람의 옅은 숨소리만이 아주 은근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조심하고 있는 해주는 얼른 잠에 들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온 신경이 지한에게 쏠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직도 잠이 안 오나 봅니다.”
순간, 해주가 어깨를 움찔했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전무님은 왜 안 주무세요?”
“평소보다 일찍 누워서 그런가. 잠이 안 오네요.”
“아…….”
해주는 가볍게 소리만 흘릴 뿐 왜 잠이 안 오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지한이 옆 침대에 있어 잠이 안 온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윤해주 씨가 안 자고 있어서 그런가.”
그때, 지한의 말이 이어졌다.
“늘 자고 있어서 몰랐는데, 방 같이 쓰는 거 꽤 신경 쓰이네요.”
해주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타인과 한방을 쓰는 건 당연히 불편한 일이지만, 그래도 지한이 자신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니 좀 섭섭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니니까. 지한이 있어 불편한 게 아니라, 설레서 잠이 안 오는 거니까.
“남해에선 방 따로 사용할 테니 편하게 지내요. 난 돌아가는 날까지 일 때문에 계속 바쁠 것 같으니 남해에선 원하는 대로 자유 시간 가지고요.”
“……그렇게 할게요.”
해주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단 하루도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구나.
남해에 가는 명목이 신혼여행이라 하루 정도는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아쉬워할 자격이 없는 입장이니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 해주의 안정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지한은 눈을 감고, 눈꺼풀 위로 팔 하나를 올렸다.
감은 눈 위로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압구정 집에 있던 해주와, 아주 즐거워 보이던 할아버지.
사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지한은 현관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현관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다.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도, 해주의 웃음소리도.
문득,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무해한 두 사람 속에 함께라면.
하지만 그럴 수 없지.
할아버지는 제 곁을 떠날 테고, 해주는 떠나보내야 한다.
한날, 동시에.
그러려면 정을 주면 안 되겠지. 윤해주에게.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다시 거리를 둬야지. 늘 비슷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