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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31화 (31/68)

31화.

아정과 헤어진 해주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 시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온 시장은 변한 게 없었다. 가게 상호 하나 바뀌지 않았고, 언뜻 보니 주인들도 대부분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수제 약과 가게가 있는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나이 지긋한 가게 주인이 작은 텔레비전으로 전원 일기 재방송을 보다가, 인기척에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해주를 반겼다.

“약과 세 상자만 주세요. 따로 포장해 주세요.”

해주의 요청에 주인은 흔쾌히 쇼핑백 세 개를 꺼내 펼치고는 한쪽에 쌓아 둔 약과 상자 세 개를 각각 집어 안에 넣었다.

그러곤 여전히 인심 좋은 사장은 시식용으로 약과 낱개를 하나씩 함께 넣어 해주에게 건넸다.

“4만 8천 원 주시면 됩니다.”

“하나는 카드로, 하나는 현금으로 결제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해주가 약과 하나 금액만큼 현금을 먼저 건네고, 뒤이어 카드를 내밀었다.

약과 세 상자 중 하나는 아빠의 것. 또 다른 하나는 한과를 좋아한다던 지한의 외조부, 권호재를 위한 것, 그리고 혹시 남해 신혼여행 때 들를 수 있을까 싶어 라일락커피 사장 것도 하나 샀다.

결제하기 전에 잠시 해주는 고민했다.

지한이 카드를 줬으니 성의를 생각해 그의 카드로 아빠 선물을 사야 했다. 하지만 권호재와 라일락커피 사장의 선물은 제 돈으로 사고 싶었다.

결국 따로 결제하기로 했다. 하나는 지한의 카드로, 나머지 두 개는 지난번 권호재에게 받은 두둑한 용돈으로.

“가만, 예전에 자주 오던 손님 아닌가? 왜, 2, 3년 전쯤.”

다시 카드를 돌려주던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한참 매일같이 오다가 걸음 뚝 끊겨서 궁금했었어요.”

“멀리 이사 갔거든요.”

“그렇구만. 아버지는 잘 계시고? 인상 푸근했던 기억이 있네.”

해주는 미소 지었지만, 마음은 쓰렸다.

언제나 사람들의 호감을 사던 인상 푸근한 아빠는 이제 말라서 볼품이 없어졌으니까.

“네, 잘 계세요.”

“안부 전해 줘요.”

“그럴게요. 기억해 주시는 거 알면 아빠가 좋아하실 거예요.”

사장에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선 해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사야 할 게 하나 있었다. 혹시 모를 비상약 같은.

***

약과 선물 박스가 든 쇼핑백 세 개와 검정색 비닐봉지를 하나 손에 들고서야 해주는 시장을 빠져나갔다.

오후 5시. 곧 해가 저물 테지만 아직은 바깥이 한낮처럼 환하다.

그녀는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보다가, 문득 충동에 휩싸였다.

다섯 정거장 가서, 한 번 갈아타면 그 동네를 갈 수 있는데.

착한 대부.

그 남자를 확인하러 가고 싶었다.

여전히 스포츠머리인지, 아니면 예식장에서 본 것처럼 머리가 긴지.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진짜 그 남자였는지.

“지금은 안 돼.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해주는 얼른 마음을 고쳐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결혼 생활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일단 아빠가 안전하니까…….

혹여라도 그들에게 들키면 혼자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지한에게 폐를 끼칠지도 몰랐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낸 해주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가고,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짧고 단호한 음성은, 지한이었다.

“저 해주예요. 혹시 바쁘세요?”

-안 바쁩니다. 말해요.

낮고 살짝 울리는 음성. 전화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해주는 물었다.

“할아버님 연락처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 내 외조부 말입니까.

“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지금?

“압구정 지나거든요. 가는 길에 혹시 시간 되시면 들르려고요.”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던 지한이 말했다.

-핸드폰으로 보내 놓을게요.

***

권호재는 싱글벙글이었다.

“노인네 집이라 마실 게 뜨거운 차밖에 없어서 어째.”

예뻐하는 손주며느리가 왔다며 주방에서 직접 다도 용품도 가지고 왔다.

해주가 그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기 위해 일어났는데, 그는 해주를 도로 앉히고 손수 테이블에 주전자와 찻잔을 놓았다.

해주는 그의 다도 준비가 끝나고서야 편안하게 소파에 앉으며 웃었다.

“저 차 좋아해요. 할아버님께서 끓여 주신 차는 더 맛있을 것 같아요.”

“어이구,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해.”

권호재가 도자기 주전자에 찻잎을 넣으며 허허 웃었다.

차가 진하게 우러나길 기다리는 동안, 해주는 소파 옆에 두었던 쇼핑백 두 개 중 하나를 권호재에게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뭘 사 왔어. 그냥 와도 반기는데.”

권호재가 쇼핑백을 받아 들며 맘에도 없이 핀잔하자, 해주는 입매를 올리며 살갑게 말했다.

“좋아하실지 모르겠는데, 약과예요. 이거 드리고 싶어서 갑작스럽지만 찾아뵀어요.”

“지난번에도 과자 줬으면 됐지. 내 집은 언제든 편하게 와.”

“그땐 지한 씨가 같이 골라 준 거고요. 제가 직접 사서 드리고 싶었어요.”

권호재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차하고 먹으면 되겠어. 같이 하나 들어.”

“네.”

해주에게 약과 하나를 건넨 권호재가 약과 포장을 뜯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늘따라 거칠어 보이는 입술로 꼭꼭 씹어 녹차와 삼킨 그가 말했다.

“쫀득하고 달아서 아주 맛있어. 기운 좀 생기는구만.”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이에요.”

권호재의 말에 대답하던 해주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때문에 깨셔서 피곤하시죠?”

버스에서 해주가 전화했을 때, 권호재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었다.

집 근처라 전화를 드렸는데 목소리가 피곤해 보여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더니 금세 목소리가 생생해졌다.

안 그래도 결혼식 끝나고 내내 집에만 있어 적적했던 참이라며 그는 살갑게 해주를 반겼다.

그럼에도 집에 왔을 때, 해주는 괜히 찾아뵈었나 생각했다. 평소처럼 옷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권호재의 얼굴이 아주 거칠었으니까.

며칠 전 결혼식장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르게 눈은 퀭했고, 입술은 생기 없이 부르텄다.

권호재는 고개를 저었다.

“먹는 약이 점점 독해져서 약 먹으면 한없이 처져. 혼자 있었으면 또 잠만 자다가 하루를 다 보냈을 텐데 예쁜 손주며느리 덕분에 기분 좋게 차도 한 잔 마셨어. 와 줘서 고마워.”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제가 더 감사해요.”

권호재는 해주의 말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잠시 해주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지한이 녀석 참 무뚝뚝하지?”

“아니에요. 다정하세요.”

해주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는 듯 권호재가 이어 말했다.

“원래는 정말 다정한 놈이었어. 희영이 닮아서 웃음도 많았고. 아, 잠시만 있어 봐. 내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니.”

권호재는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서더니 거실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권호재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해주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지한의 본가. 그러니까 강태규 회장이 사는 집과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담 높은 평창동 집엔 비싼 미술품이 가득했고, 정원에 힘을 줬다면, 권호재가 사는 오래된 고급 빌라는 좀 투박한 느낌이 있었다.

평수 큰 집 가득 오래된 가전과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가구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래서 더 편안하고 정감 가는 느낌이었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권호재가 손에 앨범 하나를 들고서 소파로 돌아왔다.

“지한이 어린 시절 본 적 있어?”

권호재의 말에 해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러자 권호재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파 앞 테이블에 앨범을 펼쳐 해주의 앞에 밀어 주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체면 생각하는 놈이라 어린 시절 사진 같은 건 안 보여 줬을 거라고 생각했지.”

권호재가 적극적으로 사진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4Kg으로 태어나 딸, 희영을 고생시켰단 사진, 4살 때 생쥐처럼 도자기 쌀통에 들어가 생쌀을 씹고 있던 사진, 7살 때 샴푸를 온 바닥에 칠하고 맨몸으로 슬라이딩하고 다닌 사진, 그 밖에도 다양하게 장난꾸러기였던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 모습만 봤을 땐 상상이 안 가요.”

“희영이가 출산하고 어찌나 말랐던지. 가끔 고놈이 얄미웠지.”

권호재는 흐뭇한 미소로 말하곤 해주를 보며 물었다.

“사진 하나 줘?”

“저한테요?”

“어차피 나중에 나 죽으면 앨범 다 줄 테지만, 그래도 한 장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 이건 어때?”

해주는 권호재가 건넨 사진을 바라봤다.

한 7살쯤. 어린 지한이 태권도복을 입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표정으로 주먹 찌르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싫은 게야?”

“아뇨. 싫은 건 아니고…….”

해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코 지한의 사진을 갖기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한의 어린 시절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 한 장 갖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다만 자신이 그의 어릴 적 사진을 봤다는 걸 알게 되면, 심지어 사진까지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언짢아할까 걱정됐다.

가짜 아내에게 지금과 다른 어릴 적 모습을 보여 주는 걸 불쾌해하진 않을까.

결국 해주는 말했다.

“아니에요. 사진첩에 담겨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끔 와서 할아버님이랑 같이 볼게요.”

“그러겠어? 그럼 가끔 차 마시러 와서 사진첩 구경하도록 해.”

해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권호재가 껄껄 웃었다. 그러곤 다시 사진 구경을 이어 나갔다.

“이것 봐라. 서럽게 우는 얼굴이 얼마나 귀여워.”

해주는 그가 가리킨 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임에도 닭똥 같은 눈물이 생동감 있게 두 볼에 매달려 있었다.

지금의 서늘한 모습에서 보기 힘든 귀여운 모습이었다.

“엄청 서럽게 우네요. 이렇게 운 적도 있구나. 전 지한 씨가 태어나면서도 안 울었을 줄 알았어요.”

“어릴 땐 울보가 따로 없었다. 지 애비 때문에 메말라서 그렇지, 감정 풍부하고 순한 놈이야.”

권호재가 혀를 쯧쯧 찼다.

언제나 사위를 생각하면 절로 혀를 차게 되는 그였다.

그사이 해주는 지한이 우는 모습 옆에 꽂혀 있는 사진을 보았다.

“어머님이시죠?”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다. 붕붕 띄운 파마머리를 한 여자. 지한과 꼭 닮았고, 나이는 지금 해주보다 고작 두세 살 정도 많아 보였다.

“그래, 내 딸 희영이. 지한이 녀석하고 똑 닮았지?”

“네. 닮았어요. 정말 미인이세요.”

해주의 말에 권호재는 몹쓸 사위를 잊고 다시 금세 부드러운 얼굴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인 대회 상은 다 휩쓸었어. 나하고 안사람 예쁜 부분만 골라 태어났거든.”

문득, 권호재의 웃는 얼굴 위로 먹먹함이 녹아들었다.

“젊은 나이에 몹쓸 병 걸려 부모 마음 찢어지게 만든 것 빼고는 부족할 게 없는 아이였지.”

권호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한이에겐 미안한 게 참 많아. 내가 희영이 결혼만 밀어붙이지 않았어도 자식 놈이 어미 그리 외롭게 가는 꼴은 안 봐도 됐을 건데.”

그는 울컥 사무치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봤지? 내 아들 녀석. 어릴 땐 대를 잇는 아들이라고 끼고 예뻐했는데, 지한이랑 재산 나눈다고 찾아오지도 않는 괘씸한 놈.”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권호재가 덧붙였다.

“늘 부모만 생각하던 딸 녀석한테 정략결혼이나 밀어붙인 내 업보지, 내 업보야. 저세상 가면 내 딸 얼굴 좀 보고 싶어. 가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해야지. ……이제 곧 내 딸 기일인데.”

권호재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때 지한이가 좀 아파.”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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