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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30화 (30/68)

30화.

평범한 날들이었다.

당연히 신혼의 설렘은 없었고, 삶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집에서 해주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과거 죄를 지었던 장소인 서재도 여전히 출입 금지였다.

지한은 결혼식 다음 날부터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튿날부턴 같은 침실에서 잠을 잤지만, 지한은 잘 볼 수 없었다.

일이 많이 바쁜 건지, 전보다 출근은 더 빠르고 퇴근은 더 늦어져서, 해주는 그와 방을 공유하고 있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오 여사는 여전히 아침마다 집으로 와 아침을 차려 주었다.

그나마 삶에서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자, 여기. 마셔요.”

오 여사가 식사 후 챙겨 주는 한약이었다.

“감사합니다.”

쓴맛을 오래 느끼고 싶지 않은 해주가 받아서 한 번에 들이켜자, 오 여사는 과일 맛 사탕 하나를 건넸다.

“그래도 먹다 보니 먹을 만하죠?”

“네. 적응되네요.”

해주는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하얀 거짓말을 했다.

신경 써서 챙겨 주니 먹지만, 지나치게 쓴맛은 아직 적응이 안 됐다.

‘내 결혼 선물이에요. 아는 사람이 준 건데, 체질 이런 거 상관없이 먹는 보약이래요. 해주 씨 잘 체하잖아. 좋은 거라니까 먹어 봐요.’

결혼식 다음 날, 집으로 출근한 오 여사가 결혼 선물이라며 보약을 들고 왔고, 아침마다 챙겨 주기 시작했다.

해주는 한약을 좋아하지 않았다. 먹는 양은 적어도 딱히 편식하는 편은 아닌데 쓴맛은 별로였다.

하지만 오 여사의 성의가 있으니 며칠 먹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건네는 보약을 매일 아침 한 팩씩 먹기 시작했다.

“신혼여행. 남해로 간다고 했었나?”

오 여사가 해주에게서 빈 컵을 받아 들며 묻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왜 해외로 안 가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해외로 많이 가잖아요. 남해에 뭐 볼 거 있나?”

“볼 거 많아요. 특히 바다가 정말 예뻐요. 저 남해에 살다 왔거든요. 2년뿐이지만요.”

오 여사가 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쭉 서울에서만 살았을 것 같았는데. 나도 고향이 남해예요.”

“정말요?”

“뭐, 난 구석탱이 시골에 살았어서 바다 구경은 해 보지도 못했지만요. 지금은 내 동생 혼자 남해에 있는데 난 한 번을 놀러 가 보지도 않았네요. 너무 멀어서. 교통도 별로잖아요.”

“맞아요. 좀 멀긴 해요.”

서울에서 가기에 거리가 멀긴 멀었다. 그래서 도피처로 정하기도 했었다.

해주는 커피 머신 앞에 서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기회 되면 한번 가 보세요. 구경할 곳 많아요.”

“그래요? 동생 얼굴도 좀 볼 겸 이번 휴가 때 한번 가 봐야겠네.”

해주는 그렇게 하시라며 미소 짓고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따뜻하게 내려진 아메리카노를 오 여사에게 건네며 해주가 말했다.

“여사님, 커피 드세요.”

“매번 고마워요.”

오 여사가 반갑게 커피를 받아 들며 호로록 한 모금 마셨다.

“아침마다 해주 씨 커피 한 잔에 얼마나 기운이 나는지 몰라.”

“여사님 기운 나신다니 다행이네요.”

“내가 준 한약, 좀 써도 계속 먹어요. 몸에 진짜 좋은 거니까.”

“그럴게요.”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한 박스는 주시는 대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여사는 뜨거운 커피를 잘도 마셨다.

언제나처럼 금세 잔을 비운 오 여사가 말했다.

“잘 마셨어요. 빨래하러 가야겠어. 해주 씨는 이제 나갈 준비 해야 되겠네.”

“네, 바로 준비해야 해요.”

오 여사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연차를 썼으니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온 아정과 약속을 잡았다.

곧장 오 여사는 주방 옆 세탁실로 향했고, 해주는 준비를 위해 이만 주방을 떠나려 했다.

그때, 주방 벽에 붙어 있는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오 여사가 지한의 허락을 받고 편의상 붙여 놓은 것으로, 글씨가 큼지막해서 보기 편한 달력이었다.

4월 22일. 지한과 해주가 남해로 떠나는 날에 그려진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4월 23일. 바로 아래, 일주일 뒤인 30일 날짜 또한 해주의 눈에 들어왔다.

“30일이었지 아마. 전무님 어머니 기일이…….”

***

오후 1시. 해주는 곱창전골 가게에서 아정을 만났다.

대낮보다는 저녁에 술안주 삼아 먹는 느낌이 강한 메뉴지만, 매콤한 걸 먹고 싶다는 아정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밑반찬이 세팅되고, 곧이어 반조리 된 곱창전골도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용 버너에 놓였다.

버너의 불을 켜며 아정이 물었다.

“신혼 생활 어때? 행복해?”

물컵에 물을 따라 하나씩 나누며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지.”

해주의 대답에 아정이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행복한데? 좀 길게, 얼마나, 어떻게 행복한지 낱낱이 말해 줘. 나 지금 설렘이 필요해.”

“음…….”

해주의 입에서는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행복을 쥐어짜느라 힘들었다. 사실 결혼 전이나 후나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중이니까.

아니, 결혼 전보다 더 지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일이 얼마나 바쁜 건지 그는 결혼 후 더 일찍 출근하고, 더 늦게 퇴근했으니까.

한 침실을 쓰는데도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고, 그나마 마주치는 순간도 해주가 잠결이나, 잠에서 아직 덜 깨 비몽사몽 한 순간뿐이었다.

결국 거짓말로 대답하기 곤란했던 해주는 그냥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기로 했다.

“넌 왜 설렘이 필요한데?”

“솔로 됐거든.”

“언제? 나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사귀고 있지 않았어?”

“이틀 전에 헤어졌어.”

“이틀. 마음 많이 힘들겠네.”

걱정하는 해주의 말에 아정은 고개를 젓더니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힘들진 않은데 마음이 너무 불편해.”

“왜?”

“나 붙잡는다고 무릎까지 꿇었거든.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

아정은 불편한 마음이 힘들다는 듯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주는 그런 아정을 걱정스럽게 보다가 물었다.

“헤어진 건 계기가 있었어?”

“그냥 똑같아. 의처증같이 구는 거. 헤어지던 날은 막말도 했지만.”

“어떤 막말을 했는데?”

‘어떤 새끼랑 뒹군 사진이 있기에 핸드폰을 안 내놔! 켕기는 게 없으면 핸드폰을 왜 숨기냐고!’

아정은 재형의 막말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입으로 말 못 해. 들을 때도 수치스러웠는데 내 입으론 절대.”

말하기 창피했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시작했던 연애가 얼마나 저급하게 끝이 났는지.

더 창피한 건 저런 말을 들어 놓고 헤어지던 순간,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재형의 모습을 떠올리며 짠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정이 뭔지. 분명 사랑은 없는데 그놈의 함께한 4년이 발목을 잡았다.

해주는 한숨 쉬는 아정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아닌 인연은 빨리 끝내는 게 맞아. 무릎 꿇은 건 오빠 선택이지 네가 시킨 것도 아니잖아. 막말도 들었다면 더 잘 헤어졌어.”

“맞아. 어차피 또 같은 이유로 헤어지겠지? 그래! 잘 헤어졌어. 이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그딴 놈 신경 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정이 결심하며 개인 접시에 덜어 놓은 곱창전골을 숟가락에 가득 퍼 입에 넣었다.

금세 기분 좋아진 아정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매운 거 먹더니, 그래서 오늘 매콤한 거 먹고 싶다고 했구나?”

“응, 스트레스받을 땐 매운 거 먹어 줘야지.”

해주도 곱창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매운 양념이 묻은 곱창을 씹으며 그녀는 지한을 생각했다.

한 침실에서 잠을 자도, 혼인 신고를 마쳤는데도 전보다 더 볼 수 없는 지한을.

얼굴 한 번 마주치지 못하니 서운했다. 꼭 피하는 것 같아서.

오늘 저녁에는 잠을 자지 말고 버텨 볼까. 한 번 보고 나면 이 마음이 사그라들까?

이내 그녀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전무님이 출근을 빨리하고 또 늦게 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보는 게 언제부터 그렇게 서운할 일이었다고.

결혼 하나 했다고 관계가 달라지길 바라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 생각하며.

***

같은 시각.

“전무님, 식사 사 왔습니다.”

노크 후, 들어오라는 지한의 말에 전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며 윤이 말했다.

지한이 대답 없이 보고서에 집중하고 있자, 윤은 테이블로 가 들고 있던 샐러드 가게 봉지에서 점심 식사를 꺼내 놓았다.

지한 몫으로는 견과류가 곁들여진 닭 가슴살 샐러드, 당근 케일 주스 한 잔이, 윤의 것은 먹음직한 고기가 가득 든 햄버거와 콜라 한 캔이었다.

소박한 점심 식사가 다 차려졌을 즈음, 보고서를 다 검토한 지한이 의자를 빼고 일어나 테이블로 걸어왔다.

“사람 좀 알아봐.”

지한이 윤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지한의 샐러드 뚜껑을 열어 주던 윤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착한 대부>

“착한 대부…… 대부업체예요?”

쪽지 내용을 따라 읽던 윤이 묻자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 직원 얼굴 사진 필요해. 최근 걸로.”

“전 직원 얼굴을요? 그러니까, 대표부터 말단 직원까지 다.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그래.”

이유는 모르지만 필요한 데가 있겠거니, 언제나처럼 윤은 궁금증을 더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키우는 개가 있으면 개 사진까지. 꼼꼼히 찍어 오겠습니다.”

대답을 깔끔하게 하는 편이지만, 가끔 윤은 쓸데없는 말을 곁들일 때가 있었다.

키우는 개 사진까진 필요 없건만, 이제는 윤의 과한 열정에 익숙해진 지한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말했다.

“보름. 가능하겠어?”

“그럼요. 충분합니다. 보름 내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그 확신에 지한은 만족하며 이만 샐러드를 먹기 위해 일회용 포크를 뜯었다.

“식사 마치면 혼인 신고 하러 다녀올게. 회의 준비 차질 없이 해 놔.”

지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윤이 슬며시 물었다.

“네. 근데 꼭 하셔야 해요? 결혼식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안심시켜 드리려면 서류까지 부부로 남아야지.”

“그래도요. 요즘 이혼이 흔하다고 해도 아직은 사회적 시선이 그렇잖아요. 윤해주 씨 나중에 발목 잡히면 어떡해요.”

지한은 포크로 양상추 몇 조각을 찍었다. 잠시 대답이 없던 그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정 비서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딱딱 끊어지는 말투에, 냉정한 음성이었다.

어느 부분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일을 쉴 틈 없이 시켜서 그렇지, 윤에겐 유독 너그러운 편인 지한이 목소리를 낮추다니.

너무 오지랖을 부렸나, 윤은 머쓱해졌다.

“넵. 죄송합니다.”

지한은 그만 표정을 풀고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윤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크게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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