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저녁 시간, 해주와 지한은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잠시 식탁을 둘러보던 지한이 한숨 쉬듯 말했다.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해요. 할아버지 장단에 다 맞출 필요는 없으니까.”
식탁 위에 미디움 굽기의 스테이크 두 접시와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뿐인가.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빈 접시 밑에 테이블 매트를 깔고, 식탁 곳곳에 초와 꽃꽂이 된 화병으로 플레이팅도 해 놓았다.
해주와 지한이 정한 메뉴는 아니었다. 식탁을 꾸민 것도 그와 그녀가 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슬슬 저녁 식사를 생각하던 찰나, 부른 적 없던 케이터링이 도착했다.
‘권호재 님 요청으로 출장 나왔습니다.’
요즘 인기 좋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본래 케이터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 아닌데, 권호재 개인 인맥으로 신혼부부를 위해 집으로 출장 와 준 것이었다.
지한은 어이가 없어 당장 외조부에게 전화를 넣었다. 권호재는 말했다.
‘젊은 놈이 결혼식 당일에 신혼여행도 안 가, 호텔에서 묵는 것도 아니야. 무드 없이 시간 보내려는 게 영 못마땅해서 보냈다. 한 셰프 레스토랑 빌리려다 참은 거니 잔말 마. 특별히 귀한 와인 보냈으니 손주며느리랑 가볍게 한잔하고.’
어이없는 통보였다.
어쩐지 아까 전화를 해 오더라니.
저녁엔 뭘 할 거냐고 묻기에 솔직하게 대답한 게 문제였다. 결혼식을 치르고 일까지 하다 보니 피곤해서 판단력이 떨어졌다.
“전 좋아요. 맛있겠어요.”
해주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먹겠다는 대답을 한 거라고 생각하며 지한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요. 억지로 먹을 필요 없으니.”
“정말 좋아요. TV에서 예약 한 달 걸리는 레스토랑이라고 봤던 것 같은데, 할아버님 덕분에 먹게 되네요.”
“……괜찮다면 됐어요. 와인은. 한잔할래요?”
지한이 와인병을 집어 들며 물었다. 해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마실게요.”
와인, 참 오랜만이었다.
해주가 가장 좋아하는 술은 와인이었지만, 그녀는 2년 동안 와인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후회로 가득 남은 밤. 그 밤의 시작이 와인이니까.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더라도 좀 적당히 마셨다면 그와 잠자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양심도 없이 그에게 미련 따윈 갖지 않았을 거라며, 2년 내내 해주를 후회하게 만들었던 술이었다.
가끔 라일락커피 사장이 싸구려 와인을 마시자며 들고 와도 해주는 고집스럽게 맥주 캔을 따 건배했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한잔하고 싶었다.
평생 오늘뿐일지도 모르는 결혼식에 신혼여행도, 설레는 첫날밤도 없는데 약하게나마 기분 정도는 내도 되지 않을까.
딱 한 잔만.
지한이 케이터링에 딸려 온 와인 잔 하나를 해주의 앞에 놓아 주고는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바닥에서 찰랑일 만큼만 붉은 와인을 채우며 말했다.
“안 마실까 했는데, 오늘만큼은 건배 정도는 하죠. 진짜 계약이 시작되는 날이니까.”
지한이 건배를 제의하며 잔을 내밀었다.
해주는 그가 내민 잔에 제 잔을 부딪쳤고, 공중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와인 잔을 입으로 기울였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해주는 흘끗, 지한을 바라봤다.
와인과 지한. 뜨거웠던 밤이 절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칼질을 하고, 고깃덩이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스테이크는 조금 식었지만 부드러웠다.
곁들인 야채도 적당히 소금과 후추 간이 돼 있었는데, 함께 온 특제 소스에 찍어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해주가 어느 정도 접시를 비웠을 때였다.
먼저 접시를 비운 지한이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더니, 신용 카드 하나를 해주의 앞으로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해주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찍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봤다.
“이게 뭐예요?”
“앞으로 필요한 건 내 카드로 사서 써요.”
“……전무님 카드로요?”
“생활비 준다고 생각해요. 한도 없으니 원하는 대로 써도 좋아요.”
“하지만…….”
해주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자 지한은 말했다.
“내일이면 혼인 신고 할 겁니다. 아내가 남편 카드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받아요.”
아내와 남편.
해주는 그 단어들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오를 수 없는 나무고, 한여름 밤의 꿈. 한때 지한은 제게 그런 대상이었는데.
“남해 갈 때 아버지께 들고 갈 선물을 사도 좋고.”
“아버지라면…… 저희 아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해주가 눈을 깜빡이자 지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병원에 들르고 싶을 것 아니에요.”
“못 갈 줄 알았어요. 시간이 안 돼서.”
“남해까지 가는데 들러요. 난 일이 바빠 같이 갈 수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해주는 뭉클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열흘 뒤에 남해에 간다.
대외적인 이유는 신혼여행이지만, 진짜 목적은 지한의 일 때문이었다.
지한은 이제 막 공사에 들어간 WS 남해 리조트 보완점을 찾기 위해 인기 좋은 타 리조트와 비교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다.
그동안 해주는 리조트에 남고, 그는 공사 현장과 건설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촘촘한 일정이라 아빠 요양병원까지 들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요.”
“이 정도로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지한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는 이만 마지막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지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아니면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결혼 후 첫날밤이라는 말이 주는 묘함 때문일까?
해주는 지한과 함께할 앞으로가 기대됐다.
물론 결혼 생활 동안 지한과 무슨 일이 일어날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가당치도 않지.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그래도, 1년이란 시간이 지나면 지한과 좋은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잘못을 저지른 뒤에는 평생 척을 지고 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부부가 됐다. 그러니 이혼 후 영영 안 보고 살겠거니 생각했어도 가끔은 오늘처럼 술 한잔하는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주는 작게 웃음 지었다.
너무 실현 가능성 없는 상상이었다.
지한이 아무리 너그러운 사람이라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 리가. 욕심이 너무 컸다.
지한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데 웃음이 터진 건지.
부드럽게 접힌 눈매, 산뜻하게 올라간 입술.
오랜만이네. 저 무해한 웃음.
한땐 사람을 무장 해제 시키던 표정이었다.
와인을 마셔 풀어진 거겠지.
앞으로 와인은 함께 마시지 않는 걸로.
“선은 확실하게 지킵시다.”
해주는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그와 친구라도 되고 싶다는 제 욕망이 들렸나 싶어서.
“네?”
당황하는 해주를 보며 지한은 다시금 말했다.
“나는 결혼으로 우상전자에서 내 자리를 찾고, 윤해주 씨는 아버지 안전을 지키고. 좋은 동맹, 그 선 넘지 말고 잘 지내봐요.”
그냥…… 결혼 생활 잘해 보자는 뜻이겠지.
다행이었다. 속마음을 들킨 게 아니라.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해주의 대답에 지한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아내 자리만 지켜 준다면.
하지만 굳이 까칠하게 말할 일은 아니라 그는 해주의 말을 정정하지 않고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부터 침실을 같이 써야 하지만, 오늘까진 따로 자도록 하죠. 난 오늘 손님방에서 잘 테니 윤해주 씨는 침실 쓰도록 해요.”
“왜…… 그럼 제가 손님방에서 잘게요.”
지한이 왜 계획을 변경했는지 몰라 해주가 의아해하며 말했고, 지한은 의자를 뒤로 빼며 대답했다.
“됐어요. 방 적응도 할 겸 침실에서 자요.”
지한은 제가 먹은 잔과 접시, 식기만 간단히 치우고 거실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
옷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나온 지한은 거실 욕실로 들어섰다. 문을 굳게 닫은 그는 거울을 바라봤다.
커다란 거울 속에 세 모금 와인을 마시고 풀어진 얼굴이 보인다.
술을 잘 못하지만 그렇다고 와인 세 모금에 취하진 않는데.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을 틀었다.
두 손에 찬물을 가득 받고 얼굴에 끼얹었다.
그때도 그랬다. 2년 전에도.
지한은 취해도 겉으론 티 나지 않는 타입이었다. 자기 관리하는 습관은 취했을 때도 그를 흐트러지지 않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한데 그날은 취한 걸 온몸으로 드러냈다. 표정은 상기됐고, 상체는 지나치게 앞으로 기울었으며 결국 취기를 핑계로 윤해주 입술에 키스까지 했다.
그뿐인가.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회식 자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다.
과거 잠자리 얘기를 꺼내고, 웨딩드레스를 칭찬하고.
오늘 방을 따로 쓰자고 말한 건,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전적들이 있었고, 오늘은 고작 와인 세 모금에 얼굴이 풀어졌으니 한 침실을 쓰다가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지 몰라서.
왜 윤해주만 곁에 있으면 자제력을 잃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