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늘도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온 권호재는 신랑과 신부가 동시 입장하는 순서에도, 꽃잎이 휘날리는 웨딩 아치를 지날 때도 가장 크게 박수 쳤다.
권호재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온 지한과 해주를 마주 봤다. 그가 이젠 정말 손주며느리가 된 해주의 두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물었다.
“일일이 인사 다니느라 피곤하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해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새벽부터 움직이며 나름 강행군을 이어 왔기에 피로감이 짙었지만, 호재가 걱정할까 봐 티를 내진 않았다.
“신혼여행을 못 가서 아쉽진 않고?”
“아쉽지 않아요. 남해로 가는걸요.”
“지한이 일 때문에 방문하는 차에 같이 가는 거니 신혼여행은 아니지 않아.”
“아니에요. 저 남해 좋아해요, 할아버님. 재밌게 다녀올게요.”
해주가 얼굴에 웃음까지 띠며 말했지만, 권호재는 해주가 애써 서운함을 감추고 얘기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 손주 녀석이지만 참 무심하지. 결혼식 끝나자마자 일이라니!”
권호재가 휙, 고개를 돌리더니 지한을 향해 야속하다는 눈빛을 지었다.
“두 사람 합의한 일이라고 하니 내 크게 말 보태지 않겠지만, 가정을 꾸렸으면 일은 줄여! 아끼고 보듬어 주려고 결혼했으면 안사람 서운하게 하지 마라.”
권호재가 혀까지 쯧쯧 차자, 지한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바쁜 때 결혼 보채신 건 할아버지세요. 한참 리조트에 신경 써야 할 때고요. 해주 씨는 괜찮다는데 왜 할아버지가 못마땅해하세요?”
“이놈이! 한 마디도 안 지지? 우리 손주며느리는 착해서 괜찮은 척하는 게지!”
“하고 싶은 말은 하셔야 하는 할아버지 닮아서요.”
지한은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외조부를 향한 시선만은 다정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지한이 가족이라고 여기는 건 외조부뿐이었다.
원망스러운 아버지와 척지고 사는 동안, 그래도 아버지를 악에 받쳐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외조부 덕분이었다.
늘 자신을 걱정하고, 칭찬하고, 잘못된 길로 빠지려 들면 나무라 주었으니까.
잔소리가 좀 심한 편이긴 하지만, 사실 혀를 차며 내뱉는 잔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지한에겐 그마저도 따뜻한 소리로 들려왔으니까. 쯧쯧, 혀를 차는 습관은, 못마땅할 때면 늘 혀를 차던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원하시는 결혼 했으니 이제 마음 좀 놓이세요?”
“그래. 이제 마음 놓인다. 이렇게 마음씨 고운 손주며느리가 네 곁에 있으니 아주 푹 놓여.”
“그럼 할아버지께선 이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치료에 집중하세요.”
권호재는 자신을 걱정하는 손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하나 있는 아들 새끼와 두 손녀는 재산만 노리는데, 생의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돈으로 보지 않고 걱정해 주는 가족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러나 살갑게 대하기엔 그러지 않았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권호재는 괜히 역정 내며 말했다.
“내가 치료에만 집중하길 바란다면 네가 신경 쓰이지 않게 잘해야지. 오늘도, 집으로 바로 가지 말고 근사한 호텔방에서 와인 한 잔이라도 하면 할애비 마음이 얼마나 놓이겠어. 내가 예약이라도 해 주랴?”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데요. 바로 증손주 보고 싶으셔서 그러신 거 티 나요.”
지한이 지겹다는 눈빛을 하자 권호재는 버럭, 화를 냈다.
“누굴 구닥다리로 보는 게야! 증손주 보면 좋겠다만, 둘이 충분히 신혼 즐기고 가져. 난 그런 것까지 터치하는 노인네는 아니다!”
사실은 증손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알콩달콩 즐겨야 할 결혼 첫날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할 손자를 알기에 제안한 것도 맞았다.
시한부 인생, 두 사람이 지금 당장 아이를 가져도 자신이 생의 끝에 있을 즈음에야 아기를 낳을 테니.
물론 손주인 지한이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최고지만, 그래도 증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해주는 생각이 표정에 빤하게 드러나는 권호재를 보며 웃음 지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하룻밤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를 위해 주는 신혼부부 모습을 보여 주며 그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바로 집으로 가는 게 아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한 씨에게 중요한 시기니까요. 일 끝나면 호텔은 제가 다음에 지한 씨한테 데려가 달라고 할게요.”
해주의 말에 그제야 권호재는 누그러졌다.
그가 큼, 목기침을 하곤 말했다.
“우리 손주며느리가 그렇다니 그럼 난 더 걱정하지 않고 가마. 피곤할 텐데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맛있는 거 먹고 쉬어.”
“들어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할아버님.”
손주와 손주며느리의 인사를 받으며 권호재는 시동을 켜 놓은 차에 올랐다.
이윽고 그를 태운 차가 멀어지자, 지한이 물었다.
“정말 아쉬워요? 호텔이라도 가고 싶으면 말해요. 바로 예약하면 되니까.”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버님 아쉬워하시는 마음 달래 드리려고 말씀드린 거예요. 저 집이 편해요.”
“그래요, 그럼. 들를 곳 없으면 바로 집으로 가죠.”
“네.”
지한이 한편에 주차해 둔 검정 세단으로 걸음을 옮겼고, 해주도 그 뒤를 따랐다.
금세 차가 예식장을 빠져나갔다.
결혼식이 방금 전 일인데, 웨딩드레스가 아닌 사복 차림으로 지한과 차를 타고 있으니 벌써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신부 대기실에 있을 때만 해도 결혼을 실감했으면서.
해주는 차창을 바라보며 결혼식을 곱씹어 봤다.
예식장 문이 활짝 열리고,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받은 채 식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하객들의 주목을 받으며 지한의 팔짱을 끼고서 긴 버진로드를 걷던 순간.
길고 긴 주례 말씀이 이쯤 끝났으면 좋겠다고 느낀 순간.
결혼식 내내 긴장했던 탓일까, 아니면 지한과 함께였던 덕분일까, 그것도 아니면 손에 잡힌 지한의 단단한 팔이 믿음직스러웠던 덕분일까.
결혼식 내내 다행히 쓸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시간엔 아빠가 그리워 눈물이 날 뻔 했지만, 다시 유명 성악가의 축가를 듣는 동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 지한 덕분인 것 같다. 한 번씩 눈 맞춤을 해 주며 곁에 그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던.
그러다 해주의 생각이 한곳에서 멈췄다.
결혼식 1부가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기 전. 행진 후 웨딩 아치에 멈춰 선 지한과 해주의 위로 하얀 장미 꽃잎이 흩뿌려지던 순간.
두 사람을 찍던 사진 기사가 ‘신랑 신부님, 입 맞춰 주세요.’ 하고 외쳤다.
사진에 담기 위해서라는 걸 알면서도 해주는 당황했다.
보통의 연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겠지만, 두 사람은 계약 관계였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굳어 있는 사이, 먼저 다가온 건 지한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비튼 그는 제 앞까지 성큼 다가와 공중에서 키스하는 척했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쿵쿵댔다. 정말…… 하는 줄 알았으니까.
그 순간을 떠올리니 가까이서 맡았던 지한의 향수 냄새가 다시 짙게 나는 기분이었다.
해주가 지한을 흘끔 쳐다봤다. 몰래 그의 입술을 훔쳐보려던 순간, 그때였다.
“한데, 아까 뭡니까.”
해주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다행히 지한은 운전 중이었고, 앞창을 보고 있어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지 못했다.
지한을 쳐다보지 않은 척 얼른 고개를 돌린 해주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물었다.
“네?”
“신부 대기실에서. 많이 놀란 것 같던데.”
해주는 아, 하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부 대기실을 지나가던 남자를 본 순간.
쫓아가야 할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동시에 몸이 빳빳하게 굳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던 순간.
“아, 아니에요. 잘못 본 것 같아요.”
해주가 어물쩍 넘어가려는데 지한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잘못? 어떤 사람으로 착각했는데요.”
역시 예리한 사람. 해주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사채업자요. 차 사고 냈던 그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설마, 여기 있을 리 없는데요.”
그때, 해주가 겁먹은 사실을 눈치챈 지한이 앞을 가려 주었었다. 양어깨를 잡은 그가 손에 힘을 주어 해주를 정신 차리게 해 주었다.
시야에 그 사람 대신 지한이 들어오고, 어깨에 그의 손길이 닿자 그제야 해주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비공개 결혼식이다.
지한의 결혼식에 관한 기사는 났어도, 그의 신부에 대한 정보는 일반인이라는 것 외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해주가 오늘, 여기서 결혼하는 걸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아닐 겁니다. 오늘 하객 철저히 명단 확인하며 들여보냈으니까. 외부인은 출입했을 가능성이 없어요.”
그래. 지한의 말이 맞다. 설사 결혼하는 걸 알았더라도 경호원이 하객 명단을 철저히 확인해 입장시키는데,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을 리 없었다.
“맞아요. 그냥 닮은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헤어스타일도 달랐어요. 그 남자는 스포츠머리였는데, 제가 본 사람은 머리가 길었고요.”
그래. 잘못 본 거다.
헤어스타일도 그때 그 남자와 완전히 다른걸.
오늘 본 남자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하나로 묶고 있었고.
해주의 기억 속 그 남자는 분명 짧은 스포츠머리였는데.
게다가 그 말총머리는 여자만큼 체구가 작았다. 그러니 어쩌면 그냥 얼굴만 닮은 여자일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볼까?
오늘 본 그 사람이 그때 그 남자가 맞는지 아닌지.
사채업자들 사무실을 알고 있다. 근처에서 몰래 숨어 있다가 남자의 헤어스타일만 살짝 확인하고 올까.
……무모한 짓일까.
개발이 중단된 지역에 사무실이 있어서, 멀리서 몰래 훔쳐볼 만한 카페 하나 없었다.
주위를 얼쩡거렸다간 수상하게 보여서 붙잡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인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엔 좀 불안했다.
절대 그 사람이 아닐 거라고 정신 승리 하기엔 또 습관도 비슷했다.
남자는 평소에 안경을 쓰나 싶을 만큼 중지로 콧잔등을 긁었었다.
오늘 찰나 본 그 사람도 검지 뒤쪽으로 콧잔등인지 이마인지 모호한 곳을 문지르고 있었다.
하나, 결혼 생활에 잡음을 만들지 않기로 약속했다.
아빠는 지한 덕분에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데, 굳이 나서서 찾아보는 게 맞을까?
해주가 복잡한 생각들을 하는 사이, 한남동이었다.
***
며칠 전부터 짐을 조금씩 침실과 옷방, 화장실로 옮겨 놨다.
때문에 집에 들어와 해주는 어쩔 줄 몰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방을 따로 썼는데, 하루아침에 자연스럽게 그의 침실로 들어가긴 어려웠으니까.
해주가 어정쩡하게 거실에 서 있자, 지한이 말했다.
“씻어요. 침실 욕실 쓰고, 편히 쉬어요. 난 거실에서 씻고 바로 서재에서 일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아, 네. 그럴게요.”
“식사는 어떻게 할래요?”
지한의 물음에 해주는 고민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이 좀 더 간절했다.
“아, 전 이따가 먹을게요. 좀 쉬고 싶어요.”
“나도 당장은 생각 없으니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죠. 먹고 싶은 것 생각해 놔요.”
“네, 감사합니다.”
지한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옷방으로 들어갔고, 해주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침실로 향했다.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침실 문이 열렸다. 지한은 다시 뒤를 돌았다.
그는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해주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며 생각했다.
결혼을 했다. 결국.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밖에선 부부 연기를 했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면 데면데면해지겠지.
한 침실을 쓴대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부부와 달리 손끝 하나 닿지 않을 것이다.
1년 후엔, 딱 지금 같은 관계로 끝이 날 거고, 그날까지 지한의 묵은 미련은 정리될 것이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