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핸드백은 가까운 보조 의자에 놓여 있었지만, 해주는 웨딩드레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직원이 흔쾌히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해주는 감사 인사를 하고서 긴장된 표정으로 핸드폰을 켰다.
이내 전화번호부 즐겨찾기로 들어간 해주가 ‘울 아빠’ 위에서 손가락을 머뭇거렸다.
그러다 용기 내 화면을 터치하니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해주를 외면하기 시작한 진섭은 여태 단 한 번도 해주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탓에 어차피 대화하지 못할 테니 받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해주는 확신한다.
아빠가 죄책감에 자신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그래도 오늘만큼은 받아 줬으면.
결혼한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아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겠지만…….
아빠 숨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결혼식에 아빠가 참석하진 못하더라도, 아빠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었다.
신부 측 혼주석은 비겠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통화음이 가기 시작했다.
한참 뚜르르, 뚜르르. 긴장감 넘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해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오늘도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울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아도 곧 결혼식은 시작한다.
해주는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결혼식장에서 억지로 결혼하는 불행한 신부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웃어야 했다.
해주는 다시 직원에게 핸드폰을 부탁하고, 벽에 걸린 벽시계로 가까워진 예식 시작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 한산하던 신부 대기실 입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남자 구둣발 소리에 해주가 고개를 드니, 턱시도를 입은 지한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죠.”
그가 예식장 직원과 웨딩드레스 숍 직원을 한 사람씩 쳐다보며 말하자, 그의 요청대로 직원들이 자리를 비웠다.
“곧 식 시작하는데 긴장은 안 돼요?”
지한이 해주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많이 긴장돼요. 그런데 전무님은 전혀 안 떨려 보이세요.”
“그럴 리가. 나도 긴장됩니다.”
“정말요? 전무님은 긴장 안 하시는 줄 알았어요.”
“처음 겪는 일엔 누구나 긴장하는 법이죠.”
지한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이제 잠시나마 가족으로 살겠네요. 이혼 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결혼 생활 충실히 부탁하죠.”
크고 예쁜 손이 해주의 앞으로 뻗쳐 왔다. 해주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짧게 따뜻한 체온을 느끼니 조금 전,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아 속상했던 마음이 좀 희석되는 것 같았다.
해주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놓았을 때였다.
“하객 여러분, 잠시 뒤 예식이 시작할 예정이오니 자리에 착석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말이 들려왔다. 동시에 신부 대기실 문 너머로 두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문이 열렸다.
해주가 웨딩드레스 업체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어!”
해주가 문 너머로 손가락질을 했다. 눈이 커지고, 동공은 예민하게 확장됐다.
아주 놀란 해주의 표정에 지한도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
“하객 여러분, 잠시 뒤 예식이 시작할 예정이오니 자리에 착석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열받은 아정은 천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방송에 한층 더 신경질이 났다.
“내가 어딜 갈 때마다 오빠한테 보고해야 해? 끊어!”
결국 통유리 창이 시원하게 난 복도 끝에서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린 아정은 씩씩대며 뒤를 돌았다.
“뭘 보세요?”
뒤를 돌자마자 또 한 번 아정은 짜증이 났다.
하필 눈앞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전무의 비서 윤이 있을 건 뭐람.
윤은 아정의 까칠한 말투에 한 번,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어이가 없어 물었다.
“장아정 씨가 여기 왜 있어요?”
“왜 있겠어요? 초대받았으니까 왔죠!”
“누구한테?”
소규모 결혼식인 만큼 하객 수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정재계 인사들이었다.
한데 안내 데스크 직원인 아정이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다니.
지한이 아정을 초대할 리가 없었다.
아정은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을 보며 세모눈을 떴다.
“그 표정은 뭐예요? 해주 언니요! 나 해주 언니 동생이에요.”
“동생? 해주 씨한테 동생이 있었다고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윤을 비웃으며 아정이 말했다.
“친동생 말고, 친한 동생이요. 아니, 그런데 해주 씨가 뭐예요? 모시는 상사 아내면 사모님이지.”
“아, 그건…….”
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정은 혀를 쯧쯧 찼다.
“나한텐 세상 둘도 없는 원리 원칙주의자처럼 굴더니. 호칭 막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윤은 억울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을뿐더러, 그는 지한과 해주의 결혼이 가짜인 걸 알고 있었다.
해주의 친한 동생이라는 아정은 정작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은데, 계약 결혼 내용은 극비 사항이라 자신이 왜 호칭을 편하게 했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건 그렇고 방금, 남자 친구예요?”
다시 아정의 눈이 홱, 뾰족해졌다.
“통화 엿들었어요?”
“참나. 뭘 엿들어요? 여기 화장실 앞이에요. 어찌나 크게 얘기하던지 지나가는데 그냥 들리던데요?”
“아니면 됐고요. 먼저 가 볼게요.”
하필 통화 내용을 들킨 사람이 윤이라는 게 짜증이 나 아정은 뭐 씹은 표정으로 윤을 지나치려고 했다.
“이왕 들은 김에 얘기하는데 웬만하면 헤어져요.”
“뭐요?”
“내가 겪어 봤잖아요. 장아정 씨 남자 친구. 그런 사람 정상적이진 않아요.”
아정은 기가 막혔다. 회사 안에서나 상사지 밖에서까지 왜 이래라저래라, 인지.
“저 4년 만났어요. 남자 친구가 정상인지 아닌지는 제가 더 잘 알고요. 비서님 조언은 정중히 사양할게요.”
아정은 고개를 휙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예식장 쪽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튼 성질머리하고는. 진지하게 조언을 해 줘도 못 받아들이는 건 무슨 고집이야? 대체 그딴 놈 뭐가 좋다고.”
윤은 아정의 남자 친구라던 남자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때는 아정을 안내 데스크에 낙하산으로 앉혀 줬다는 인사팀 안미진 부장의 심부름 때문에 그녀의 퇴근이 늦어진 날이었다.
오후 8시.
그날도 야근을 하는 지한 때문에 야식을 사기 위해 잠시 회사를 나가던 길. 윤은 보았다.
아정과 그의 남자 친구를.
회사 앞에 서 있던 남자는 키가 크고, 안경을 썼고, 외모는 평범했다. 그럼에도 인상 깊게 남았던 건 그가 한 행동 때문이었다.
아정의 어깨를 붙잡고서, 이를 꾹 깨물고 애써 분노를 가라앉힌 목소리로 남자는 아정에게 화를 냈다.
“내가! 너 걱정하는 거 알잖아. 너 전화 안 받으면 다른 새끼 생긴 걸까 봐 돌아 버리는 거 알면서 왜 전화를 안 받냐고!”
“일했잖아. 갑자기 서류를 정리해 달라고 하는데 그럼 어떡해?”
“못 한다고 하면 되잖아! 네가 인사팀 직원이야? 왜 그 부장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나 회사 꽂아 준 사람이야. 언제든 자를 수 있다고. 그걸 무시해?”
아정도 지지 않고 받아쳤고, 결국엔 남자가 사과하는 걸로 끝났다. 그럼에도 윤이 보기엔, 같은 남자 입장으로 봐도 그냥 상종을 하면 안 될 놈 같았다.
자기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 아정을 보는 눈이 좀…… 돌았다고 해야 하나.
아정이 제 억지를 받아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참는 것같이 보이긴 했는데, 동물은 본성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지한의 곁에 있으면서 저런 돌은 눈을 가진 놈을 한둘 본 게 아니었다.
다들 돈에 미쳐 있었는데, 결국 하나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문제로 사고를 쳤다.
윤은 그 남자도 그럴 거라 확신한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 있는 눈빛만큼이나 미친 성격이 튀어나올 테고, 그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참나, 뭘 이렇게 신경 써? 남의 연애사 끼어들어 봤자 본전도 못 찾는데.”
윤은 제 확신이 틀리길 바라며 이만 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잔잔하고도 웅장한 음악이 예식 내내 울려 퍼졌다.
주례가 먼저 단상에 오른 뒤 신랑과 신부는 동시 입장을 했고, 화촉 점화는 생략됐다.
주례의 덕담이 길었고, 반지를 나누는 순간과 신랑 측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순서는 찰나처럼 지나갔다.
축가는 유명한 성악가가 축복의 노래를 불러 주었고, 꽃잎을 휘날리며 본식은 끝이 났다.
피로연은 식사를 곁들였다. 긴 칼로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터뜨려 건배했다.
지한과 해주는 팔짱을 끼고 테이블마다 인사를 다녔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결혼식을 모두 끝냈다.
지한과 해주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하객들은 그사이 제각기 흩어졌다.
지한과 해주의 짐을 트렁크에 실어 준 윤도, 해주의 곁에 끝까지 남아 준 아정도 먼저 돌아갔고, 유일한 혼주였던 지한의 친부, 강태규 또한 일찍이 예식장을 벗어났다.
식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던 강 회장은 마지막까지 언짢아했다.
체면 세우기 좋아하는 성격에, 텅텅 비어 있는 혼주석과 신부 측 하객 자리가 당연히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나마 일찌감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건 순전히 하객들 때문이었는데, 그마저도 친분 깊은 몇몇이 돌아가자마자 미련 없이 예식장을 떠났다.
그에 반해 지한의 외조부, 권호재는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