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네?”
지한의 말에 해주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백화점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지한은 분명 싸늘했다.
비서인 윤에게 회사에 늦게 돌아간다고 전화했을 때도 언짢은 기색이 가득했다.
꼭 계약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던 사람처럼.
“윤해주 씨는 모르나 봅니다? 사람은 상대의 약한 모습을 보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법이란 거. 적어도 나는 그래요.”
지한이 해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요. 진짜 집에만 갇혀 있고 싶은 게 아니면 일어나요.”
해주는 머뭇거리다가 지한의 손을 잡았다. 그가 팔에 힘을 줘 해주를 일으키곤 말했다.
“해남에서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무릎 꿇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고. 다시는 무릎 꿇지 마요. 보고 있는 사람 불편하니까.”
“네…….”
해주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다가 잠시 머뭇거리곤 다시 물었다.
“하지만…… 많이 화나셨던 것 아닌가요?”
“화 안 났습니다. 왜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네요.”
“차에서 내내 아무 말씀도 안 하셨고, 표정도요.”
분명 지한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분명했다. 자신이 몇 번이나 흘끔흘끔 그를 확인했으니까.
“난 일부러 표정 굳힌 적 없어요. 회사 일 때문에 생각할 게 많아서 그랬을 겁니다. 쓸데없이 시간 뺏겨서 일정에 차질이 생겼거든.”
지한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짜증 난다는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뭐 대단한 얘기를 한다는 건지 호기심이 생겨 들어 보려 했는데, 시간 낭비만 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어요. 윤해주 씨 어머니 돌아가신 거 아니고, 집 나갔던 거란 것쯤.”
그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어…… 네? 알고, 계셨다고요?”
해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키웠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해주는 조금도 티 낸 적이 없었다. 엄마 얘기를 깊게 한 적도 없었고.
지한은 그런 해주를 바보 취급하듯 대답했다.
“잊었나 본데 나 2년 전에 윤해주 씨 뒷조사했습니다. 당연히 서류도 떼 봤고. 실종이라고 돼 있던데요.”
“아…….”
그렇구나.
너무 갑작스럽게 지한의 앞에서 엄마 얘기를 하게 된 것에만 꽂혀 잊고 있었다.
지한이 진작 자신의 뒤를 다 캤었는데.
“아실 수밖에 없었네요.”
“그래도 윤해주 씨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건 몰랐습니다.”
“그건…… 엄마랑 혼인 신고하고 살았을 때, 친자 입양해 줬어요, 아빠가.”
그럼 서류상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깊게 파고들었다면 입양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겠지만, 지한이 거기까지 파고들 이유는 없으니까.
지한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물었다.
“성이 같던데. 아버지 성 따른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우연히 성이 같았어요.”
“한자까지 똑같았다니. 좀 신기하네요.”
서류만 뗐기에 몰랐다. 어쩐지 외적으로 닮은 구석이 전혀 없더라니.
“궁금하긴 했어요.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거액의 빚을 떠안게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나 애틋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지.”
자진해서 대학 자퇴까지 하며 2억 원이라는 사채를 대신 갚아 주고 있던 것, 갑작스럽게 갚게 된 빚 원금 때문에 꽤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아버지를 위해 도망가서도 여전히 쉴 틈 없이 제 인생 허비하며 일만 했던 것.
지한은 아버지에게 정이 별로 없었다.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아버지를 혐오하는 정도에 이르렀기에 해주를 별나게 봤었다.
친자 입양, 그 단어를 들으니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고마운 마음에 은혜를 갚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해주는 대답하기에 앞서 좀 먹먹해졌다. 아빠 얘기만 나오면 그랬다.
“아빠가 절 딸로 받아 준 게 고등학생 때였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 자식이라도 다 큰 여자애를 입양하긴 쉽지 않은데…… 친엄마도 버리고 간 제게 가족이 뭔지 알게 해 준 분이에요.”
해주의 말을 들은 지한은 잠시 고민했다. 또 하나 알고 있는 사실. 어쩌면 해주는 모를 수 있는 얘길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윤해주 씨 어머니, 군산에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지한은 결국 말했다. 혹시 해주가 친어머니의 행방을 찾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래도 핏줄이니까.
“……전라북도 군산이요?”
갑작스러운 지한의 정보에 해주는 당황했다.
“2년 전에 윤해주 씨 쫓았을 때 보고받았습니다. 윤해주 씨 행방 찾기 전에 어머니 사는 곳을 먼저 찾아서.”
“아…….”
“아까 권주경 씨가 말했던 소문, 반은 맞는 것 같던데.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 어머니보다 5살 어린 남자랑 10년째 동거 중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군요.”
해주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 남자.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래요?”
지한이 가볍게 눈썹을 까딱이며 묻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만나기 전부터 자주 만나던 남자 있었어요. 엄마랑 같이 사업을 한다고 했었는데, 5살 어렸으니 그 사람 맞을 거예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었다. 이름은 박진오.
그는 엄마가 만난 남자들과 많이 달랐다.
돈 없고, 고졸에, 직업이 없고, 말투는 껄렁하고, 나이도 어리고.
키가 크고 눈이 좀 찢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엄마는 매일같이 그 남자를 만났다. 사귀던 남자들에겐 사업 파트너라고 했었고, 그건 아빠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귀찮게 사업 따위를 할 리가 없는데.
해주는 엄마가 뭘 하든 관심이 없었고, 아빠는 사랑 때문에 엄마의 거짓말을 애써 믿었던 것 같다.
“괜히 말해 준 겁니까?”
해주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지한이 물었다.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이젠 상관없는 사람이라 궁금하지는 않아요. 엄마 일…… 문제 삼지 않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해주 씨 잘못 아니니 문제 삼을 것도 없어요.”
“계약 끝나는 날까지 전무님께 엄마 일로 피해 끼치는 일 없게 할게요.”
“그러길 바라죠.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 동안 별문제 없길 바랍니다.”
지한은 가볍게 대꾸하곤 덧붙여 말했다.
“그럼 쉬어요. 난 바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으니.”
“아. 다녀오세요.”
지한이 가볍게 입매를 말아 올리곤 걸음을 돌렸다.
집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해주는 기도했다.
자신으로 인해 부디 지한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더불어 생각했다.
엄마가 그 남자와 살림 차린 거. 아빠에겐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
결혼식이 있는 날까지 특별할 거 없는 나날들을 보냈고, 2주의 시간은 금세 흘렀다.
결혼식 날이 성큼 찾아왔다.
하늘이 꽤 쾌청한 날.
WS호텔 서울 본점 플래티넘 관이 화려한 꽃 장식으로 치장됐고, 웅장한 노래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지위 높은 손님들이 식장을 하나둘 채우기 시작했고, 지한은 아버지와 둘이 식장 앞에 서서 하객들과 악수를 나눴다.
해주는 완벽한 드레스 업을 한 채로 한 손에 부케를 들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새벽부터 움직여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았으니 피곤할 텐데, 긴장한 탓에 그녀는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오늘이 왔구나. 정말, 결혼을 하네.
막연하게 결혼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말 화려하게 치장하고 꽃 장식 속에 파묻혀 있으니 좀 무서운 감정도 들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끝까지 전무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늘 마음을 다잡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또 생겨 버리면 어떡할까?
예상컨대 아주 괴로운 결혼 생활이 될 것 같았다.
“언니!”
그때였다. 신부 대기실 입구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벌떡 일어서서 반갑게 인사했겠지만, 웨딩드레스 업체에서 나온 직원이 잘 정리해 준 웨딩드레스가 흐트러질까 해주는 반색하며 손만 가볍게 뻗었다.
“아정아! 와 줘서 고마워.”
“우리 언니 왜 이렇게 예뻐? 나 보자마자 언니한테 반할 뻔했잖아.”
아정이 한달음에 달려와 해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정을 보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기분에 해주는 웃었다.
“너스레는.”
“밖에서도 신부 예쁘다는 얘기 듣고 오는 길이거든?”
“내 귀엔 별거 아니라는 말밖에 안 들리던데.”
해주의 장난스러운 말에 아정이 발끈했다.
“그거 다 열폭이야! 언니가 너무 예쁘니까 열등감 폭발한 거라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아정도 들은 모양이다.
신부를 향한 하객들의 뒷담화를.
별 볼 일 없는 애가 얼굴 하나로 결혼한다, 고작 저런 애랑 결혼할 줄 알았으면 제 딸을 들이밀어 볼 걸 그랬다.
해주의 면전에서도 개의치 않고 쑥덕대던 사람들이니 뒤에선 오죽 욕했을까.
아정은 아까 자신이 째려봤던 중년 여자들을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언니 오늘 최고 예쁘니까 고개 빳빳하게 들고 런웨이 걷듯이 입장하자. 보란 듯이 전무님 팔짱도 꽉 끼고. 꼭!”
“알겠어. 그럴게.”
해주는 아정의 신신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 편 하나가 이렇게 든든했다.
더불어 신부 대기실에 인형처럼 앉아만 있는 동안 점점 아무렇게나 복잡하게 얽히던 감정이 좀 산뜻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하나씩 하자.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접어 두고, 일단 결혼식을 잘 치르는 것부터 해내자.
그렇게 결심하고서 해주는 다시 아정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 혼자 온 거야?”
해주의 물음에 아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자 왔지.”
“심심하지 않겠어?”
“전혀. 식전엔 이렇게 언니 옆에 붙어 있고, 시작하면 언니 구경하고, 피로연 때는 음식 나온다며. 비싼 스테이크 먹느라 정신없을걸? 나 혼자 뭐든 잘하잖아.”
“그래도 마음 쓰여.”
결혼식 3일 전, 해주는 아정과 통화했었다.
결혼식장에 혼자 오지 말고 남자 친구나 다른 친구와 같이 오라고 했는데, 아정은 단호히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제 주위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들뿐이라고. 같이 아르바이트했던 사이니 알겠지만, 재형은 사람 좋게 보여도 뒤에선 입이 가벼운 편이라 남자 친구여도 믿을 수 없다고.
우상그룹 결혼식이고, 유명인들이 많이 참석할 것 같으니 혼자서만 재미를 볼 거라는 농담도 했었다.
아정은 예전부터 속이 깊었다. 해주는 그런 아정의 마음이 고마운 한편으론, 미안했다.
2년 동안 연락도 없던 주제에 다시 재회하자마자 결혼한다고 초대부터 했으니까.
그때, 아정의 크로스 백 속 핸드폰이 울렸다. 아정은 액정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다가 한숨을 짧게 내쉬고서 말했다.
“언니, 나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래, 다녀와.”
곧장 아정이 신부 대기실을 나섰고, 신부 대기실은 잠시 고요해졌다.
잠시 무언가 고민하던 해주가 자신을 돕기 위해 신부 대기실에 함께 있는 예식장 직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매니저님. 죄송하지만 제 가방에서 핸드폰 좀 꺼내 주실 수 있을까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