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빠는 참 순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배신해도 흘러가는 사람이라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다며 웃었다.
젊은 날을 바쳐 이룬 모든 걸 잃었으면서도 예쁜 딸 하나면 아무것도 잃지 않은 거라고 말해 줬다.
피가 섞인 가족보다도 더 진짜 같은 가족이 돼 준, 해주 인생의 행운 같은 아빠였다.
그런 아빠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소중한 아빠를 저렇게 말하다니.
한순간 감정이 싸하게 식은 해주가 분노가 끓어오르는 눈으로 주경을 보았다.
주경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지한이 자신과 헤어질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듯.
해주는 그런 주경의 기분을 망쳐 주고 싶어졌다. 그녀가 과하게 넘은 선만큼이나.
“오랜만에 네 소설 듣는 것도 재밌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아빠한테 못 받은 사랑 아저씨들한테 받는 네가 딱 생각할 법한 상상이야.”
“뭐?”
“정정해 줄 말이 너무 많다. 왜 네가 피해자처럼 구는지 모르겠지만…….”
해주가 감정이 싸하게 식은 얼굴을 했다. 그러곤 그대로 손을 뻗어 지한의 팔짱을 꼈다.
연인처럼 보이도록 꽤 다정하게.
“엄마한테 미혼이라고 속이고 접근한 건 네 아빠잖아. 너희 아빠가 시작했으니 엄연히 따지면 피해자는 난데.”
갑작스러운 팔짱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해주는 개의치 않았다.
“무슨 네가 피해자야? 너희 엄마, 유부남인 거 알고도 안 헤어졌잖아!”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야. 네 아버지 워낙 바람둥이잖아. 엄마랑 헤어지고 나서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또 바람났다며. 아들 낳아서 그렇게 돈을 갖다 바쳤다던데? 근데 너희 어머니도 그래. 왜 남편은 못 잡고 속은 여자만 죽도록 잡아 댄 건지.”
“야, 윤해주! 누가 그래? 그 여자한테 줬다고!”
주경이 폭발할 것같이 들끓는 목소리를 내자 해주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짠가 보네. 난 소문 그냥 얘기해 본 건데. 네가 보지도 않은 사실을 진짜인 양 떠든 것처럼.”
해주는 주경이 했던 아빠의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눈을 살벌하게 뜨는 주경이 무섭다는 듯 부러 지한에게 더 달라붙었다.
그녀는 고개를 지한의 팔뚝에 기대며 말을 덧붙였다.
“너 예전에 나한테 그랬지?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그러면 넌? 너 돈 받고 아저씨들 만나고 다니는 거 우리 스무 살 때 소문 다 퍼졌었는데, 네 아빠랑 뭐 달라?”
해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한순간 주경의 눈이 커졌다.
“그걸…… 누가 얘기했어?”
숨기고 싶던 과거였는지 주경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글쎄. 너랑 끔찍하게 붙어 다녔던 애들 중 하나겠지?”
해주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주경이 열받길 바라며 일부러 그랬다.
해주는 가끔 이성을 잃는 순간들이 있었다.
과거에는 자신에게 선을 넘을 때, 최근에는 아빠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그럴 때면 평소라면 감히 하지 못했을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리곤 했다.
2년 전엔 아빠를 위해 마음을 준 남자를 배신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빠를 위해 자신의 거짓말로 화가 났을지 모르는 그에게 아주 살갑게 달라붙었다.
생각지 못하게 전부 지한을 이용했지만, 미안한 감정보단 주경에게 대갚음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그래서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지한 씨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 어떻게 내리깔고 싶었나 본데,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약점이 한두 개가 아닌데 왜 스스로 무덤을 파는지 모르겠네.”
해주는 결코 당하고만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한에겐 죄를 졌으니 철저히 을로서 굴지만, 누군가 자신을 해하려 하면 당한 만큼 갚아 주는 성격이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
엄마는 돈만 알았고, 사랑받는 게 뭔지 몰랐으며 지켜 주는 어른 하나 없으니 스스로 지켜야 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유해지긴 했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주경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턱을 비틀던 그녀가 중요한 고객인 지한의 앞에서도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 질렀다.
“야, 윤해주! 너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잘난 거 하나 없으면서 매번 뭐가 그렇게 당당한데?”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니? 가진 거 없으면 당당해선 안 돼? 질문 이상한 거 알지?”
주경의 말을 받아친 해주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라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네가 불륜한 것도 아니고 네 사업이 망한 것도 아니면서…….”
그러나 해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거! 그게 어이없고 재수 없다고!”
주경이 더 격하게 반응하며 해주의 말을 잘라 왔으니까.
“가족 일이야! 아빠 잘못이 내 잘못이 된다고! 아빠가 바람피우면 바람피운 새끼 딸 되는 거고, 아빠 사업이 망하면 불쌍한 애 되는 거라고! 근데 왜 넌 거기서 벗어나 있어? 왜 나랑 똑같으면서 매번 행복한 척하는 건데?”
억울해 보이는 주경을 해주는 잠시 가만히 쳐다봤다.
아빠를 모욕한 걸 갚아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날뛰는 모습을 보니 좀…… 안쓰럽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도 불행한 걸까. 내가 가사 도우미를 할 때 백화점에서 쾌적하게 근무했으면 그래도 살 만했던 거 아닌가?
주경을 이해하려 애쓰다 보니 문득, 해주는 아빠 말이 떠올랐다.
‘네 엄마는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이야. 떵떵거리며 살다가 부모님 사업이 망한 뒤로 하나같이 가난해진 보혜 씨 자존심과 자존감을 짓밟았다고 했잖아. 스스로 불행하다 느꼈던 거야. 그리고 유복했던 과거를 돈으로 돌려 두고 싶었겠지. 사실 자존심도, 자존감도, 행복도 돈만으론 완전히 살 수 없는데.’
언젠가 아빠가 자신을 배신했던 엄마를 이해하며 했던 말이었다.
그래, 행복.
지금 해주도 그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그 행복을 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보니 주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경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주경의 아버지와 자신의 엄마의 불륜 직후라면.
그래서 엄마를 뼛속 깊숙이 원망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불륜을 알기 전, 평화롭던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끊임없이 생각했다면.
엄마가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택한 것처럼, 주경은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워할 대상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다 추측일 뿐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소리 지르고 절규하는 주경을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똑같이 과거의 행복을 갈망하는 입장에서, 해주가 동질감에 전의를 상실했을 때였다.
“얘긴 이 정도 하면 될 것 같은데.”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주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성을 찾은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으며 꼭 쥐고 있던 지한의 팔을 놓으려 했다.
그때 지한이 그런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올리며 저지했다.
손을 맞잡은 모양새가 됐다. 해주가 당황해서 쳐다보니, 지한은 고개를 미묘하게 옆으로 까딱이며 말했다.
“우린 따로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지한이 해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경을 바라봤다.
“권주경 씨.”
“……네.”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자신의 처분을 직감한 모습에 지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좀 경솔한 부분이 있네요. 소문은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닌데. 지어낸 얘기에 괜히 내가 시간 낭비만 했어요.”
“아니, 지어 낸 얘기가 아니라…….”
주경은 무서웠다. 지한의 표정이 방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서늘해서.
“동거라. 남녀만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엮으려는 발상이 재밌네요. 아버지가 하도 불륜하고 다니셨다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앞으론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니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들어 봤자 같은 얘기만 반복할 것 같고.”
지한이 차갑게 고개를 돌려 다시 해주를 쳐다봤다.
“이만 가죠.”
“아, 네.”
지한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손이 붙잡혀 있는 해주 또한 그 옆을 걸었다.
그녀는 불안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있는 지한의 얼굴에서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어서.
엄마 일을 알아 버렸으니 이제 지한이 어떻게 나올까.
다그칠까? 아니면 결혼을 무르자고 할까?
방금 주경에게 싸늘했던 것보다 더 냉정하게 대하겠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엄마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래서 늘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얘기하고 다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결혼이었다. 집안과 집안의 행사라고 말하는.
사실대로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특히 한 번 배신당했던 지한은 얼마나 불쾌해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계약을 파기할까?
지금 계약을 파기하면…… 해주는 아빠를 떠올리다가 다시 옆에 있는 지한을 흘끗 보았다.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지한의 곁에서 떠나게 된다면 오래도록 먹먹할 것 같았다.
2년 전, 그를 떠났을 때보다도 훨씬.
해주가 불안해하는 사이, 등 뒤로 VVIP라운지 출입문이 닫혔다.
지한은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해주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먼저 말했다.
“할 얘기 있으면 집에 가서 해요. 회사는 오후 늦게 갈 거니.”
해주는 무력했다. 당장 변명하고 싶은 것들은 많지만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전무님.”
***
평소라면 대문 앞에서 해주를 내려 주고 회사에 갔을 지한이 집까지 함께 들어왔다.
해주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지한이 슈트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쳐 놓았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지한이 뒤를 돌았다. 이내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합니까?”
현관 앞에서 해주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절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주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릎을 꿇는 것밖엔.
백화점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없다고 했지, 돌아가셨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뻔뻔하게 나갈까, 주경이 몰라서 그렇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고 거짓말을 할까.
하지만 거짓말은 계속 거짓말을 낳는다.
엄마 얘기만 나오면 지한을 속여야 하는데 그건 싫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서 돌아가셨다고 말한 것과, 작정하고 속이는 건 천지 차이니까.
결국 해주는 자신의 안일함을 그에게 빌기로 했다.
“엄마 일, 용서해 주세요. 돌아가셨다고 해도 문제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변명하자면 정말 엄마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서 그랬어요.”
지한이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자신을 쳐다만 보고만 있자, 해주는 계속 애원했다.
“절대 문제 될 일 안 생기게 할게요. 행동 조심히 하고, 외출하지 말라고 하시면 1년 동안 꼼짝 안 하고 집에만 있을게요. 계약 파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지한은 미간을 더욱 좁혔다.
그러곤 언뜻 헛웃음을 뱉는 것 같더니, 천천히 해주에게로 다가갔다. 이내 그녀의 앞에 멈춰 선 그가 말했다.
“계약 파기라. 애초에 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생각도 안 한 걸 윤해주 씨가 왜 멋대로 판단해요?”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