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협상-24화 (24/68)

24화.

그때였다. 퍼스널 쇼퍼 룸 문이 열린 것이.

금색 문을 밀고 나오며 안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매한 상품 포장이 전부 끝났는데, 두 고객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으셔서 모시러 가기 위해 퍼스널 쇼퍼 룸을 나서던 참이었다.

안 실장은 먼저 지한을 발견하고 미소 지으려다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주경이 왜 여기 있는 거고, 이 분위기는 다 뭔가.

안 실장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머리가 쭈뼛 서는 지금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면 세 번 중 두 번은 반드시 진땀 빼는 상황을 맞이하곤 했다.

세림백화점 VIP룸 직원으로 시작해 퍼스널 쇼퍼 룸 실장을 달기까지 8년.

그동안 키운 눈치로 봤을 때, 정확하진 않아도 대충 상황 파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우상의 강지한.

오전 11시 퍼스널 쇼퍼 룸을 예약한 그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전화를 걸어 이전에 응대했던 퍼스널 쇼퍼 매칭을 피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권주경. 그가 말한 직원으로, 퍼스널 쇼퍼 룸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된 올해 3년 차 사원이었다.

일이 미숙할 수밖에 없는 시기.

그러니 안 실장은 아까 다른 직원으로부터 고객이 주경을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걸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미숙한 주경의 응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한데, 대체 이 해결하기 막막한 분위기는 뭔지.

VVIP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객 명단에 꼭 묶어 두어야 할.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심기를 불편하게 하다니. 안 실장은 아찔해졌다.

그녀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고객의 품격에 맞게 뛰지는 않으며 얼른 세 사람 쪽으로 다가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도움 필요하신 일이 있을까요?”

옆쪽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지한이 눈을 들어 안 실장을 보았다.

웃고 있지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안 실장을 보며 그는 차갑게 물었다.

“왜 내 눈앞에 권주경 씨가 있을까요? 사전에 제가 했던 부탁, 분명하게 처리해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한은 쇼핑 내내 매너가 좋은 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180도 달라진 말투로 차갑게 말을 쏘니, 안 실장은 식은땀이 목뒤로 쭉 흐르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말씀 전달받았고, 저희 직원에게 분명하게 전달했는데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안 실장은 흘끗 눈을 들어 주경을 흘겨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문책하는 듯.

분명 전화를 받은 직원이 주경에게 10시부터 1시까진 VVIP라운지에 출입하지 말라고 전했다고 했다.

주경이 이유를 묻기에 VVIP 고객이 신신당부도 했다고 했고, 그 손님이 누구냐고 묻기에 우상 회장 아들이라고 알려 주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데 주경이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물론 평소에도 아슬아슬하긴 했다.

칭찬이랍시고 눈살 찌푸려지는 말을 뱉기도 하고, 선을 지키지 않고 웃으면서 손님의 몸을 터치하기도 하고.

그래도 예쁘게 보는 손님들은 싹싹하다고 좋아하기도 해서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고객이 직접 전화까지 하며 요구한 내용을 멋대로 무시하다니.

무엇보다 안 실장은 두 달 뒤 진급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컴플레인도 용납할 수 없었다.

“뭐 해, 주경 씨. 두 분께 사과드려.”

안 실장이 눈치를 주자 주경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짜증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사과를 하라고? 우상 회장 아들 말고, 윤해주한테도?

곧 죽어도 싫었다. 컴플레인을 받지 않기 위해선 사과해야 했지만, 그건 우상 회장 아들에게나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아도 증오심을 솟게 하는 윤해주에게 사과할 바엔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주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미래와 당장의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도 잠시, 그녀는 말했다.

“저 사과 못 해요.”

“뭐?”

“전 아직 시작도 못 했어요. 근데 제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요?”

안 실장은 경악했다.

“주경 씨 왜 이래?”

안 실장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지한의 눈치를 흘끗 보았다.

그의 기분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빨리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편 주경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를 한 번 꾹 참았다.

성질 같아선 이미 다 엎어 버렸겠지만, 여기가 보통 직장인가.

앞으로 주경이 재벌을 만날 통로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보물 같은 직장을 잃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고객 컴플레인 관리도 중요하지만, 곧 승진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 영향력이 더 세질 안 실장의 평가도 중요했다.

잠깐의 고심 끝에 주경은 일단 안 실장부터 내보내기로 했다.

“실장님. 죄송하지만 자리 좀 비켜 주세요.”

“뭐?”

“고객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잠시만요.”

“무슨 소리야. 절대 안 돼!”

“저 못 믿으세요? 제가 가장 믿음직스럽다고 하셨잖아요. 여기, 여자 고객님. 제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사적으로 나눌 말이 있어서 그래요.”

안 실장이 다시 한번 거절하려던 때였다.

“안 실장님.”

지한이 안 실장을 불렀다.

“네, 고객님.”

“오늘 구매한 것, 전부 차에 실어 주세요. 얘기 길어질 것 같진 않으니 10분, 자리 비워 주시고요.”

안 실장은 정말 그래도 될까, 제 선에서 해결 못 할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여전히 찝찝했지만 거스를 수 없는 고객의 말이라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10분 뒤에 주차장에서 뵈면 될까요?”

“그렇게 하죠.”

지한의 대답에 안 실장은 고개 숙여 인사하곤 짐을 챙기러 퍼스널 쇼퍼 룸으로 들어갔다.

VVIP라운지 공간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안 실장이 미리 정리해 놓은 쇼핑백을 가지고 다시 금색 문으로 나와 VVIP라운지를 빠져나갈 동안은.

잠시 뒤 안 실장이 출입문을 벗어났고, 이제 VVIP라운지엔 지한과 해주 그리고 주경. 세 사람뿐이었다.

주경은 이번엔 지한을 쳐다봤다. 안 실장에게 했던 것보다 조금 더 공손하게, 그녀는 말했다.

“죄송하지만, 해주랑 둘이서 얘기해도 될까요?”

해주에게 협박이나 한마디 하고 끝내려고 했다.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네 엄마 일 까발리고 다닐 거라고.

“글쎄. 내가 들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만나는 여자 사생활 정도는.”

지한이 눈썹을 까딱였다.

주경은 볼 안쪽을 짜증스럽게 씹었다. 지한이 있다면 해주에게 아무 말도 못 할 테니까.

그때였다. 주경의 눈에 지한을 곤란하다는 듯 쳐다보는 해주가 들어온 것이.

지한을 차마 부르지도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은 낯설고도 흥미로웠다.

그래, 어쩌면 남자에게 제 얘기를 하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

딱 보아하니 둘이 아직 깊은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눈앞에서 윤해주가 버림받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맞는 말씀이에요. 그럼…… 방금 저희 무슨 얘기 했는지 궁금하시죠?”

주경이 운을 떼며 물었다.

“궁금하네요.”

지한이 팔짱을 끼고 서선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주경이 말했다.

“해주 어머니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분 때문에 저희 집 풍비박산 난 얘기요.”

“김주경! 그만…….”

해주는 주경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하려고 했다. 말려야 하는데, 그만하라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지한이 그녀의 앞으로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기에.

그 상태로 지한은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굴리는 해주 대신, 주경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주경이 보기에는 지한의 표정이 흥미로워 보였다. 어떤 사건이냐에 따라 당장 해주를 내칠 것 같아 보여서, 주경은 조금 자신감을 얻고 말했다.

“불륜이요. 불륜 저질렀어요, 저희 아빠랑. 이 남자, 저 남자 돈 보고 옮겨 다니다가 우리 아빠까지 건드려서 한 가정 파탄 냈어요.”

주경은 눈썹을 그러모아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 제 행동을 불편해하셨던 거 알고 있습니다. 제가 퍼스널 쇼퍼로서 자격 없이 굴었던 것도 알고요. 하지만 저, 그날 윤해주 만난 뒤로 지금까지 잠을 못 잤어요. 전 이렇게 망가졌는데 잘 사는 꼴을 보니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주경이 여태 흘끗 쳐다보기만 하던 지한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니까 오늘 윤해주 앞에 나타난 건 제 잘못만은 아니죠? 동의를 구하듯이.

그 무언의 질문에 대답해 주듯 지한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래요. 억울했겠어요.”

됐다!

지한의 동의에 주경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적어도 컴플레인이 걸리진 않겠구나, 싶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네? 전 사실 그대로만 말씀드렸습니다.”

“내 두 눈으로 본 일이 아닌데 믿을 순 없잖아요?”

지한은 그만 주경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가 해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이에요? 방금 이 얘기.”

해주는 여전히 엄마의 얘기에 굳어 있었다.

그가 모르는 사실이 주경의 입에서 나올까 봐 노심초사하느라.

그래도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경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아뇨, 그 일은 오해가…….”

하지만 해주는 변명할 수 없었다.

“그건 알고 만나세요? 윤해주 엄마, 지금 도망자 신세로 사는 거요.”

지한에게 쩔쩔매는 해주를 제대로 엿 먹일 기회라고 생각한 주경이 말을 가로챘기 때문에.

“도망?”

지한이 눈썹을 까딱였고, 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꽤 큰 식품 회사 사장이었대요. 중견 기업에 견줄 만큼은 되는 규모의 회사가 그 여자 사치로 부도까지 났고, 그 여잔 회사가 망하니까 귀중품 다 싸 들고 도망갔대요. 들리는 얘기로는 어린 애인한테 돈 빼돌리고 같이 도망갔다는데…… 아, 이건 소문이고, 나머지는 팩트예요. 동네에서 유명한 얘기예요.”

아. 해주는 작게 탄식했다.

그 말만큼은 나오지 않길 바랐는데.

저것 때문이었다. 주경과 얼른 대화를 끝내고 싶었던 게.

지한의 앞에서 엄마 얘길 하지 않으려던 이유가 말이다.

해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주경이 10년도 훨씬 넘은 일을 물고 늘어지려는 걸까.

대체 무슨 자격지심에 그 옛날 일을 끄집어내며 이렇게까지 흥분하고 달려드는 걸까.

“내 얘기 사실이잖아, 해주야. 그렇지?”

주경이 확인 사살하려 해주에게 물었다.

대답해 줄 리가.

주경을 보며 해주는 하, 하고 한숨을 삼켰다.

그 긴 세월 동안 변한 거 하나 없는 성격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예전에도 공과 사 구분을 못 했고, 말을 과장하거나 혼자 추측한 걸 사실인 양 내뱉었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주경은 창피를 자주 당했었다.

뜬소문과 상상을 토대로 뱉어 낸 말들을 해주가 쉽게 사실적 근거를 토대로 반박하니 다들 주경을 비웃고 한심해했으니까.

그럴 때마다 주경은 늘 못난 제 탓을 하지 않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해주에게 저주처럼 말했다.

‘너 내가 진짜 끝장낼 거야!’

그때의 앙심을 지금 푸는 건가.

“주경아, 그만하자.”

해주는 아니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주경의 말, 이번엔 사실이니까. 주경이 팩트라고 말한 부분 전부 진짜였으니까.

해주는 지한의 눈치를 봤다.

그는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 화를 내고 있을까?

아니면 결혼을 파투 내겠다고 다짐하고 있을까?

“그만하긴 뭘 그만하니? 혹시 그것도 아세요?”

주경이 해주를 한 번 비웃어 주곤 지한을 향해 말했다.

“그 여자 도망가고, 그 여자가 망하게 한 식품 회사 사장이랑 해주랑 둘이서 한집에 살았던 거요.”

주경은 아주 충격적인 얘기를 할 거란 듯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한 2년? 동거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빠가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 아빠 같은 사람 만나고 싶었을 테지만, 그래도 엄마가 만나던 사람인데. 너무한 일 아닌가요?”

[결혼 협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