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윤해주. 어벙하게 둘러보지 말고 원래 네 권리인 듯 제대로 즐겨. 쥐뿔 없어도 당당하게 굴면 대접하는 게 남자들이야. 돈 많은 남자 잡으려면 대접받는 데 익숙해지란 말이야.’
어느 날, 백화점 VIP가 됐다며 상류층의 삶을 알려 준다던 엄마.
그녀가 데려온 곳이 이곳, 세림백화점이었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엄마는 라운지 곳곳 우아한 사모님들처럼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주에게 남자를 사로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때 해주 나이는 한참 예민하고 날카롭던 사춘기, 열일곱이었다.
난생처음 와 보는 고급스러운 라운지에 감탄하기보단 남들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 엄마가 대체 어떻게 들어왔을까, 까칠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또 남자를 꼬셨겠지.
때문에 비싼 파르페를 먹으면서도 해주는 맛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값비쌌던 만큼 맛있었을 텐데, 구역질 나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실은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죄 없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아직도 그 파르페를 팔까?
10년 가까이 지났다. 이젠 유행이 지나 없어졌을 것 같지만, 궁금했다. 다시 먹어도 그때처럼 구역질이 날 것 같은지.
그때, VVIP라운지 출입문이 열렸다.
동시에 해주는 옛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지한이 돌아왔나 싶어 쳐다보니,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들어오고 있었다.
빨간 립스틱.
그녀를 단번에 알아본 해주가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번 쇼핑 때 만났던 퍼스널 쇼퍼였다.
마주치면 귀찮아질 것 같아, 해주는 이만 금색 문 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어머, 고객님!”
하지만 한발 늦어 버렸다. 여자가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해주를 아는 체해 온 것이다.
부르는데 무시할 수는 없어 해주는 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생글 웃으며 성큼, 해주에게 다가왔다.
“맞네요. 남자 고객님이랑 함께 오셨던. 제가 골라 드린 옷 입고 오셔서 확신했어요. 오늘 쇼핑 나오셨어요?”
“네, 쇼핑 나왔어요.”
부담스러울 만큼 빠르게 다가온 여자를 향해 인상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해주는 대답했다.
“왜 연락 안 주셨어요. 오늘 오시는 줄 알았으면 제가 모셨을 텐데요.”
해주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냉정한 성격은 아니지만 길게 대화하기엔 앞선 불유쾌한 기억 때문인지 벌써 피로해졌다.
해주가 이만 자리를 뜨고 싶다는 뜻으로 미소만 가볍게 지어 보였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를 보지 않는 건지 여자가 다시 말했다.
“사실 다시 뵈면 여쭙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씀하세요.”
해주가 피로감을 애써 감추며 대답하자 여자는 은밀한 질문을 하듯 속삭이며 물었다.
“고객님 성함이요. 성함이 혹시 윤해주, 아니세요?”
순간, 해주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정말 아는 사이인가? 한데 내가 못 알아보고 있는 걸까?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유심히 여자의 얼굴을 보며 기억 속 인물들을 다 끄집어내 보았다. 하지만 왠지 쉽게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반응 보니 맞네. 윤해주.”
하지만 여자는 말을 놓았다.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걸 해주에게 말해 주듯.
“너무 그대로라 사실 확신했었는데, 저번에 핸드폰 번호랑 이름을 안 가르쳐 줬잖아. 그러니 아는 체할 수가 있어야지.”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이번엔 여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번부터 궁금했는데,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른 체하는 거야?”
방금까지 상냥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웃는 낯에 미묘함이 섞였다.
“아님 내 성이 달라져서 모르는 건가? 김주경. 이러면 알겠어?”
“김주…… 경?”
처음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름을 따라 말하던 해주가 이내 잇새로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뱉었다.
그녀의 반응에 여자가 비웃음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 기억났나 보네. 나, 성 엄마 따라 바꿨어. 그동안 내 성 흔해서 별로였는데 네 엄마 덕분에 잘 바꿨지 뭐. 아줌마 잘 있지?”
주경이 물었지만 해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경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 안부 묻는데 대답 좀 해 주라. 하긴, 웬만큼 뻔뻔하지 않고서야 대답할 수 없나? 네 엄마가 어떤 짓을 했는지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한순간이었다. 주경이 표정을 무섭게 굳힌 것이.
생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진 얼굴엔 해주를 향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해주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너일 줄 몰랐어.”
“뻔뻔하게 잊고 살았으니까 잊어버렸겠지.”
“잊은 건 아니야.”
잊은 게 아니라 얼굴이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주가 주경을 마지막으로 본 건 중학생 때, 13년 전이었으니까.
눈꼬리가 처져 순한 인상이었던 주경은 빨간 립스틱 때문인지 강한 느낌이 있었다. 볼에는 분명 새끼손톱만 한 점이 또렷하게 있었는데 제거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신경 써서 보니 옛날 이미지가 어렴풋이 나오는 것 같긴 하다.
해주가 도저히 현재와 겹쳐지지 않는 주경의 과거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주경이 물었다.
“근데 너 능력 좋더라? 그때 같이 쇼핑 온 남자. 우상 회장 아들 맞지? 오늘도 같이 왔어? 어떻게 꼬셨어?”
해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주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또 지한의 얘기를 주경에게 함부로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경은 해주의 묵묵부답을 제멋대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해 주니? 설마, 몸으로 꼬셨어? 스폰, 그런 거?”
“뭐?”
해주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주경은 피식, 비웃음 비슷한 웃음을 뱉었다.
“아니면 말고. 대답 안 하는 게 수상하잖아.”
주경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해주에게 반 발자국 더 다가섰다. 그러곤 귓속말하듯 말했다.
“난 또 너도 몸 주고 꼬시는 게 특기인 줄 알았지. 몸 팔아서 우리 집 파탄 낸 네 엄마처럼.”
해주가 무섭게 미간을 좁히자 주경이 히죽 웃었다.
“그나저나 너네 엄마 딴 남자랑 도망갔다는 얘기 들리더라. 진짜야? 대단해, 정말. 완전 남자에 미친 거 아니야?”
해주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한편으론 참 여전하구나, 생각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되는대로 말을 뱉었고, 피해 의식이 참 컸었지.
엄마의 불륜.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엄마나 주경의 친부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돈만 보고 남자를 고른 엄마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잘잘못을 따지자면 주경의 친부 잘못이 훨씬 컸다.
되돌려 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해주는 무시하기로 했다.
여긴 지한과 함께 온 곳이니까.
지금 곁에 지한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주경이 이딴 소릴 지껄였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해주가 무시하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VVIP라운지 출입문이 열렸다. 지한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눈앞의 두 사람에 지한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윤해주. 그리고 하나는, 유니폼을 보아하니 퍼스널 쇼퍼 룸 직원.
오늘 쇼핑을 도운 실장은 아니고, ……빨간 립스틱.
거기까지 생각한 지한의 얼굴에 불쾌감이 짙게 떠올랐다.
다시 그가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뭡니까.”
이내 그는 해주의 옆에 섰다.
해주의 입에선 곧장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있자니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지금 그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참을걸. 왜 말려들어서는.
오랜만에 엄마 얘기를 듣게 되니 저도 모르게 분노 버튼이 눌려 버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한과 함께 왔다는 걸 계속 상기했어야 했는데.
설마 대화 내용을 들은 건 아니겠지? 출입문이 닫혀 있었는데 설마.
“무슨 일인데 분위기가 이래요?”
지한은 곤란한 표정의 해주를 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는 짜증이 솟았다.
이런 꼴 보기 싫어서 백화점에 전화까지 넣었더니.
지한이 속으로 쯧, 혀를 차곤 계속 대답하지 않는 해주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 옆에 선 직원을 바라봤다.
“권주경 씨?”
유니폼에 달린 명찰을 내려다보며 그가 천천히 주경의 이름을 읊었다.
제 이름이 불렸건만, 주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해주를 한껏 비꼬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온순해진 주경은 고객 응대를 할 때 짓는 상냥한 미소를 애써 지어 보일 뿐이었다.
“두 번째네요. 사람 불쾌하게 만드는 거. 이쯤 되면 고의처럼 느껴지는데.”
“네? 아뇨. 오해가…….”
지한이 차갑게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면 세림백화점은 직원 교육이 엉망인가? 내가 분명 안 마주치게 하라고 했을 텐데, 왜 권주경 씨가 내 앞에 있는 거지?”
“아, 그건…….”
주경은 차가운 지한의 눈을 피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지금 나타난 거야.
분명 복도에서 스쳐 지나온 지한은 통화 중이었다. 언뜻 들은 내용은 업무 얘기 같았고, 진지한 목소리에서 통화가 길어질 걸 확신했다.
그래서 일부러 해주를 찾아왔다. 혼자 있을 윤해주에게 겁을 좀 주기 위해서.
아주 오랜만에 만난 윤해주.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윤해주.
10여 년 전엔 분명 자신보다 낮은 위치였는데, 왜 제까짓 게 재벌이랑 있는 건지.
배알이 꼴려 윤해주 엄마 얘기로 벌벌 떨게 해 주고 싶었다.
‘내가 왜 주눅 들어야 해? 죄를 엄마가 지었지 내가 지었어? 넌 주눅 들고 싶으면 그렇게 해. 안 말리니까.’
이번에도 당당할 수 있을까?
전교생 앞에서 날 창피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 그 남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굴 수 있을까?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고고했다. 고작 얼굴 하나 예쁜 걸로 남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고, 늘 기고만장했다.
그래서 꼴 보기 싫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빠가 바람피운 여자의 딸이 행복한 걸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일로 주경은 상처받아 우울감이 날로 깊어져 갔는데, 윤해주는 엄마 일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당당했다.
그래서 그냥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윤해주가 제 말 한 마디에 불안에 떠는 모습을.
그랬을 뿐인데.
“이번 건, 컴플레인 확실히 걸도록 하죠.”
“아니…….”
주경은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퍼스널 쇼퍼 자리까지 왔는데.
바람을 밥 먹듯 피우던 아빠에게 볼만한 건 손 크게 사업하며 벌었던 돈뿐이었다.
친구들에게 아빠한테 버림받은 불쌍한 애 취급받았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던 용돈 덕분에 자존심을 유지했었다.
한데, 아빠의 사업이 망했다. 그나마 뒤로 빼돌린 돈은 아들을 낳은 여자한테 몽땅 주더니 새살림을 차렸다.
집에 붙은 빨간 딱지만큼이나 안쓰러운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온통 불쌍하고 안쓰럽다는 얘기뿐이었다.
주경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깡그리 부서지고 밟혔다.
가난이 싫다. 무시당하는 삶도 싫었다.
감히 자신을 동정하는 게 미치도록 싫었기에 주경은 다짐했다. 재벌을 만나 더 화려한 삶을 살겠다고.
그러기 위해선 퍼스널 쇼퍼 일이 꼭 필요했다.
한데 컴플레인이라니. 세 번을 받게 되면 무조건 다른 직무로 변경인데.
단 한 번의 컴플레인만 받아도 승진에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윤해주 앞에서 지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릴 순 없어 주경은 주먹만 꽉 쥐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