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1년 뒤쯤, 아버지가 우상전자 주식 손에 넣으실 겁니다.”
지한의 말에 전 이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정말인가? 한데, 그건 어떻게 아는 겐가?”
지한은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제 모든 패를 깔 수는 없죠. 중요한 건 그 전에 일을 터뜨리고 아버지를 위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 그렇지. 한데 괜찮겠나? 회장님, 자네 아버지야.”
“아버지라서 더 강하게 하는 겁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 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 맞는 말일세.”
지한은 다시금 웃음 짓고는 재킷 밑단을 잡아당겨 매무새를 다듬었다.
“얼추 훑어보셨으니 서류는 다시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일은, 제가 결혼 준비로 바빠서 당분간은 비서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아, 참. 결혼 축하하네. 이 얘길 먼저 해야 했는데.”
“감사합니다.”
“난 자네가 독신으로 살 줄 알았는데 틀렸구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결혼할 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다 하게 되는 법이지. 그럼 먼저 일어나게. 나는 갑자기 많은 정보를 들으니 다리가 풀렸어.”
손을 주먹 쥐고 다리를 통통 두드리는 전 이사의 모습에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지.”
지한이 입매를 말아 올리곤 커튼을 열어 자리를 벗어났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
평화로운 일상들이 흐르고, 어느덧 결혼식을 보름 앞둔 날이었다.
해주는 외출 준비 막바지였다. 어제, 지한으로부터 예물을 보러 갈 거라고 통보받아서 그에 맞춰 준비했다.
분홍색 트위드 원피스를 입고, 가방으론 부드러운 가죽 토트백을 선택한 뒤 베이지색 구두를 신고.
편한 차림으로 집에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꼭 외출만 하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이 생활도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지한이 데리러 오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해주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집을 나섰다.
하루하루 느린 것 같아도 시간이 참 착실히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겨울과 봄 사이의 경계, 그 어딘가에 걸쳐 있던 날씨가 이제 봄이 돼 있었다.
햇살이 포근하고, 바람은 선선하고.
해주는 봄꽃들이 만개해 화사해진 정원을 지나서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을 여니 지한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해주는 정차 돼 있는 검정 세단으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지난번과 같은 불쾌함은 없길 바랍니다. 그럼 실수 없이 준비해 주세요. 20분 내로 도착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지한은 전화 통화 중이었다.
그의 통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해주가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오르자, 지한은 이내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말했다.
“빨리 나왔네요.”
“전무님은 더 빨리 오셨네요.”
“회의가 일찍 끝났습니다. 바로 출발하죠.”
“네.”
해주가 안전벨트를 맸고, 지한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지한이 운전하는 동안 해주는 제 옆으로 있는 차창만 바라봤다.
어색함은 없었다. 갑을 관계의 당연한 침묵만 있을 뿐.
해주는 며칠 전 지한이 했던 술주정을 잊었다.
노력하면 뭐든 안 되는 게 없는 법인지 아무 일도 아니다, 의미 없는 술주정이다, 그 말을 반복해 생각했더니 이젠 꿈이라도 꾼 것처럼 아득했다.
물론, 이따금 툭, 무방비하게 그 말들이 생각났지만, 그럴 때면 다시 아빠 걱정으로 애써 설렘을 덮었다.
오늘 목적지는 백화점이었다. 예물을 보는 동안 그의 예비 신부 연기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
백화점 VIP주차장에 발레파킹을 맡기고, 지한과 해주는 곧장 VVIP라운지로 향했다.
이내 금색 문 너머 퍼스널 쇼퍼 룸으로 들어서니 오늘은 지난번과 달리 액세서리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쇼핑을 도와드릴 퍼스널 쇼퍼 룸 실장 안지희입니다. 기분 좋은 쇼핑 도와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부분.
부담스러울 만큼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한 퍼스널 쇼퍼가 지난번과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의 퍼스널 쇼퍼가 주었던 불쾌감을 떠올리며 해주는 안심했다.
값비싼 주얼리 쇼핑은 어려운 숙제 같겠지만, 적어도 기분이 불편하진 않을 테니까.
“준비된 차와 다과 드시고 계시면 두 분 예쁘게 끼실 수 있는 웨딩 밴드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친절한 웃음을 지어 보인 안 실장이 액세서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둔 선반으로 향했다.
그녀는 하얀색 벨벳 트레이에 고가의 액세서리 브랜드 상자 세 개를 담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 커플링으로 준비한 브랜드는 총 세 브랜드입니다. 먼저 보여 드릴 곳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로 총 세 가지 제품 보여 드리겠습니다.”
안 실장이 먼저 상자를 하나 열더니 다시 조금 더 작은 트레이에 놓아 내밀었다.
일상에서 가볍게 낄 만한 커플링이니만큼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브랜드 시그니처 제품으로, 깔끔한 디자인이라 일상생활에서 부담 없이 착용하실 수 있는 제품입니다.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안 실장이 먼저 해주에게 권했다. 해주가 왼손을 내미니, 안 실장은 두 개의 반지 중 작은 사이즈의 반지를 해주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반지는 안 실장의 말대로 깔끔했다. 아무 무늬 없는 플래티넘 링에 0.2캐럿의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는데, 흔한 디자인 같으면서도 디테일이 고급스러워 보였다.
이어 지한의 왼손 약지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졌다.
나란히 반지 낀 손을 들고 있으니 해주는 좀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정말 결혼하는구나.
지금까진 좀 막연하게 느껴졌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드레스 업을 제대로 한 게 아니라, 피팅일 뿐이었기에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반지는 달랐다.
그와 같은 디자인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정말 지한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현실감이 느껴졌다.
“더 화려한 걸 보시려면 이쪽. 신상 라인으로 착용해 보시겠어요?”
얼마간 손에 낀 반지를 감상했을까. 안 실장이 처음 보여 준 반지 옆에 진열해 놓았던 두 번째 반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남성용은 디자인 차이가 크지 않지만, 여성용은 메인 다이아 주변으로 참깨 다이아가 박혀 있어서, 이렇게 조명 아래선 특히 눈부실 정도로 다채롭게 빛납니다.”
해주는 그만 생각에서 빠져나와 두 번째 반지를 손에 끼웠다.
***
“커피 더 리필해 드릴까요?”
안 실장은 사이즈 주문을 따로 넣어야 하는 커플링과 웨딩 링을 포함한 반지 종류를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퍼스널 쇼퍼 룸에서 포장 중이었다.
그러다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해주를 발견하고 물었다.
해주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한은 전화 통화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쇼핑하는 틈틈이 그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계속 받지 않다가 쇼핑이 끝나자마자 콜백을 위해 퍼스널 쇼퍼 룸을 나섰다.
다시 안 실장은 포장을 했고, 해주는 좀 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안 실장을 보았다.
“저, 실장님.”
“네, 말씀하세요.”
나머지 보석들을 정리하던 안 실장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해주를 돌아봤다.
“백화점 VIP 아닌 사람도 개인적으로 연락하면 쇼핑 도와주시기도 하나요?”
해주의 물음에 안 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백화점 VIP 손님만 담당하고 있어서요.”
아마 해주가 개인적인 부탁을 하려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 실장의 대답을 듣고 나니 해주는 지난번 퍼스널 쇼퍼의 행동이 더 의아해졌다.
그때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렇게 자신에게 집착한 걸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때, 거절이 신경 쓰였는지 안 실장이 덧붙여 말했다.
“오늘 쇼핑엔 제가 도움이 많이 됐을까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괜히 안 실장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해하며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덕분에 예쁜 반지 고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다행이에요. 그리고 혹, 불쾌해하실까 봐 걱정스럽지만…… 지난번에 어떤 불편한 일이 있으셨는지 제가 여쭤봐도 될까요?”
“불편한 일이요?”
해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안 실장은 아부 섞인 눈웃음을 지었다.
부디 불쾌해하지 말라는 듯.
“다름이 아니라, 남자 고객님께서 지난번에 쇼핑 도와드린 저희 직원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하셨다고 얘기 전달받았거든요.”
“……그래요?”
안 실장의 말에 해주는 좀 당황했다.
지한이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아까 차에 탔을 때 지한이 전화를 마무리 지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난번과 같은 불쾌함은 없길 바랍니다. 그럼 실수 없이 준비해 주세요. 20분 내로 도착합니다.’
그게 먼젓번 퍼스널 쇼퍼를 얘기한 것이었나.
해주는 얼굴에 복잡한 웃음을 띠었다.
“그냥 가벼운 일이었어요. 오늘 마주치지 않았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한은 차갑게 굴면서 꼭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든다.
분명 몸에 밴 매너일 뿐이란 걸 아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속절없이 해주는 흔들려 버린다.
좋아해 봤자 이뤄질 수 없는 관계인데. 그를 마음에 두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일인데.
차라리 그냥 매몰차게만 대해 주지. 작은 감정도 생기지 못하도록…….
거기까지 생각한 해주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거짓말. 정말 그랬으면 상처받았을 거면서.
해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점점 깊이 들어가려는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브레이크 없는 생각은 자신을 어떤 감정으로까지 끌고 갈지 몰랐다.
더불어 지한이 자신을 위해 미리 백화점에 연락을 넣었다는 말로부터 시작된 들뜸, 이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 통화 끝내고 오면, 저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고 말 좀 해 주세요.”
그러자 안 실장이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오시면 말씀드릴게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
VVIP라운지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온 해주는 애꿎게 손을 씻은 뒤 티슈 한 장을 뽑아 물기를 닦고서 화장실에서 나왔다.
백화점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VVIP라운지 테이블에 사람이 차 있었는데, 점심시간이라 그럴까.
여덟 개의 테이블에 모두 손님이 없고, 직원도 자리를 비웠는지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해주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난 직후라서 그런가.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VVIP라운지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지한과 함께였다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텐데. 혼자인 지금, 그녀는 가만히 서서 라운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10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네. 아닌가? 샹들리에랑 금색 문은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고.”
해주는 과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참 많이 변했지만, 그럼에도 옛 기억을 상기시킬 만한 소품 몇 가지는 남아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해주는 불쾌한 기분도 동시에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떠올렸으니까.
사실, 해주가 세림백화점 VVIP라운지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퍼스널 쇼퍼 룸은 물론 처음이었지만, VVIP라운지는 과거 와 본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하루걸러 하루 이 백화점으로 쇼핑을 오던 엄마와 함께.
[결혼 협상]